후세인 교수형 집행, 30일 새벽에
생포 3년만에 사형, 이라크 내전상태 돌입 우려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새벽 6시 이전에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미국이 이라크에서 운영하는 알-후라 TV가 긴급 뉴스로 보도했다. 지난 2003년 12월 자신의 고향인 티크리트의 한 농가에서 체포된 지 3년여 만이다.
30일 새벽에 기습적으로 사형 집행
후세인은 지난 2003년 미군의 침공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뒤 그해 12월 체포된 뒤 지난 26일 재판에서 1982년 이라크 두자일 마을에서 시아파 주민 148명의 학살 주도 혐의가 인정돼 교수형 선고가 확정됐었다.
이라크 정부는 후세인 전 대통령에 대한 형 집행에 강력 항의하는 수니파의 바트당 등을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신속히 사형을 집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군 당국은 사형 집행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후세인의 신병 인도 사실을 부인하는 등 안개전술을 폈다.
후세인 사형 집행 소식이 알려지면서 사형시 극한투쟁을 선언했던 수니파 바트당 등이 격렬히 저항하고 있어 향후 이라크 정국은 더욱 극심한 내전상태에 빠져들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후세인 누구인가
1937년 4월 바그다드 북부 티크리트에서 태어난 후세인은 지난 1955년 바그다드로 이주 민족주의 학교를 다녔다. 이듬해 그는 아랍 바트 사회주의 당원으로 가입한 뒤 사관학교에 진학하려고 했지만 거부당했다.
후세인은 1959년 당시 총리인 압둘 카림 카심 살해 계획에 가담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시리아를 거쳐 이집트로 탈출해 가멜 아브델 나세르 당시 대통령의 보호를 받으며 카이로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이라크로 돌아온 그는 바트당의 이라크 정부 전복과 관련돼 수감돼있던 1964년 옥중에서 바트당 부총장에 선출됐으며 1967년 감옥을 탈출했다.
이듬해 자신의 친척인 알메드 하산 바크르가 이끄는 바트당은 쿠데타를 일으켜 이라크 정권을 잡는 데 성공했으며 후세인은 쿠데타 성공의 중요역할을 맡은 것을 계기로 이라크 혁명군위원회의 부의장을 맡으며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됐다. 이후 1979년 후세인은 바크르 대통령의 사임을 이끌어 내고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후세인은 1980년대 쿠데타를 모의한 혐의를 들어 쿠르드 족에 대한 대대적 숙청 작업을 실시했으며 이 과정에서 숨진 쿠르드 족은 최소 5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라크는 1990년 중동의 석유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접경국가인 쿠웨이트를 침공했으며 이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 이라크 금융제재가 도입되는 계기가 됐다. 이에 지난 1991년에 걸프전이 발발하며 ‘사막의 폭풍’이라 불린 미국의 공습을 받았으며 1백 시간에 걸친 지상전투 끝에 이라크군은 패퇴, 쿠웨이트에서 철수해야 했다.
이후 이라크는 1998년 유엔 무기사찰단에 대한 협조를 전면 중단을 선언했으며 그 결과 미-영 연합군의 이라크 대량살상무기제조 의심지역에 대한 대대적 공습이 이어졌다. 2003년 2월 유엔 무기사찰단이 이라크에서 비밀 로켓을 발견하자 미국은 후세인 정권이 무기프로그램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국제사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3월 전격적으로 이라크 침공을 감행했다.
대통령 궁을 빠져나간 후세인은 도피를 시작했으며 2003년 3월20일 은신해 있던 가옥에 대한 공습이 있기 전 탈출했다. 그러나 이 공습으로 후세인의 두 아들이 사망했다. 그러나 후세인은 같은 해 12월 13일 도피 9개월 만에 자신의 고향인 티크리트 부근 농가의 토굴에 은신해 있다가 미군에게 생포됐으며 3년여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30일 새벽에 기습적으로 사형 집행
후세인은 지난 2003년 미군의 침공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뒤 그해 12월 체포된 뒤 지난 26일 재판에서 1982년 이라크 두자일 마을에서 시아파 주민 148명의 학살 주도 혐의가 인정돼 교수형 선고가 확정됐었다.
이라크 정부는 후세인 전 대통령에 대한 형 집행에 강력 항의하는 수니파의 바트당 등을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신속히 사형을 집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군 당국은 사형 집행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후세인의 신병 인도 사실을 부인하는 등 안개전술을 폈다.
후세인 사형 집행 소식이 알려지면서 사형시 극한투쟁을 선언했던 수니파 바트당 등이 격렬히 저항하고 있어 향후 이라크 정국은 더욱 극심한 내전상태에 빠져들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후세인 누구인가
1937년 4월 바그다드 북부 티크리트에서 태어난 후세인은 지난 1955년 바그다드로 이주 민족주의 학교를 다녔다. 이듬해 그는 아랍 바트 사회주의 당원으로 가입한 뒤 사관학교에 진학하려고 했지만 거부당했다.
후세인은 1959년 당시 총리인 압둘 카림 카심 살해 계획에 가담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시리아를 거쳐 이집트로 탈출해 가멜 아브델 나세르 당시 대통령의 보호를 받으며 카이로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이라크로 돌아온 그는 바트당의 이라크 정부 전복과 관련돼 수감돼있던 1964년 옥중에서 바트당 부총장에 선출됐으며 1967년 감옥을 탈출했다.
이듬해 자신의 친척인 알메드 하산 바크르가 이끄는 바트당은 쿠데타를 일으켜 이라크 정권을 잡는 데 성공했으며 후세인은 쿠데타 성공의 중요역할을 맡은 것을 계기로 이라크 혁명군위원회의 부의장을 맡으며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됐다. 이후 1979년 후세인은 바크르 대통령의 사임을 이끌어 내고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후세인은 1980년대 쿠데타를 모의한 혐의를 들어 쿠르드 족에 대한 대대적 숙청 작업을 실시했으며 이 과정에서 숨진 쿠르드 족은 최소 5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라크는 1990년 중동의 석유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접경국가인 쿠웨이트를 침공했으며 이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 이라크 금융제재가 도입되는 계기가 됐다. 이에 지난 1991년에 걸프전이 발발하며 ‘사막의 폭풍’이라 불린 미국의 공습을 받았으며 1백 시간에 걸친 지상전투 끝에 이라크군은 패퇴, 쿠웨이트에서 철수해야 했다.
이후 이라크는 1998년 유엔 무기사찰단에 대한 협조를 전면 중단을 선언했으며 그 결과 미-영 연합군의 이라크 대량살상무기제조 의심지역에 대한 대대적 공습이 이어졌다. 2003년 2월 유엔 무기사찰단이 이라크에서 비밀 로켓을 발견하자 미국은 후세인 정권이 무기프로그램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국제사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3월 전격적으로 이라크 침공을 감행했다.
대통령 궁을 빠져나간 후세인은 도피를 시작했으며 2003년 3월20일 은신해 있던 가옥에 대한 공습이 있기 전 탈출했다. 그러나 이 공습으로 후세인의 두 아들이 사망했다. 그러나 후세인은 같은 해 12월 13일 도피 9개월 만에 자신의 고향인 티크리트 부근 농가의 토굴에 은신해 있다가 미군에게 생포됐으며 3년여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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