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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제3 후보론'에 넉다운 퇴장

"영의정이 왕이 된 적은 없다" 정설 입증

고건 전총리가 16일 대선출마를 포기했다. 연초부터 정가에 나돌아온 '대권 포기설'이 끝내 현실화한 것이다.

고 전총리의 대선출마 포기는 정가 일각에서 꾸준히 예견돼 온 것이기도 하다. 고 전총리의 측근조차 지난해말 "고 전총리가 과연 출마선언을 할 지조차 확신 못하겠다"고 토로했을 정도다.

고 전총리의 정치적 좌절은 자신의 작품이다. 고 전총리는 2004년 탄핵후 노무현 대통령이 복귀하는 과정에 노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움으로써 대선후보 중 일인으로 자리매김됐다. 2004년 5월 총리직 사퇴후 노 대통령의 아마추어적 국정운영이 부각된 데 따른 반사이익으로 '안정적 국정운영'에 대한 국민적 여망이 높아지면서, 고 전총리는 범여권의 독보적 대선주자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지난해 고 전총리는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굳건히 할 몇차례 결정적 계기를 놓쳤다. 5월 지방선거와 재보선때 그는 선거판에 뛰어들어 '자력으로' 자신의 정치적 파워를 과시해야 했다. 그러나 이때마다 그는 '관망'을 택했다. 정부여당이 줄줄이 참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런 변수로 작용하지 못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지 않는 특유의 '신중함'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민주당 등 범여권에서는 '고건 회의론'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지방선거 등에서 도약한 민주당의 한화갑 대표 등은 '고건 무임승차 불가론'을 폈다. "고건이 한 게 뭐냐"는 게 주된 논지였다. "조선 5백년사에 영의정이 왕이 된 적은 없다"(김종인 민주당 의원)는 비유까지 나왔다. 고건 지지율은 계속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동교동과의 관계도 악화됐다. 지난해 10월 북한의 핵실험이 계기가 됐다. 보수 성향의 고 전총리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햇볕정책을 비판하며 '가을 햇볕정책'을 주장했다. 동교동이 발끈했다. "고건은 안된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호남쪽 고건 지지자들도 고 전총리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지난해말 노대통령과의 격돌후 지지율 변화도 고 전총리에게 충격이었다. 그는 노대통령의 비난에 대한 반격을 통해 지지율 반전을 기대했다. 그러나 나온 결과는 정반대로 지지율 하락이었다. 그동안 고건 지지층 중 일정부분이 친노 성향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여기에 결정타로 작용한 것은 정운찬 전 서울대총장 등 '제3 후보론'의 등장이었다. 범여권의 관심이 일제히 제3 후보쪽으로 향했다. 고 전총리는 범여권 후보단일화의 '호남 들러리' 쯤으로 치부됐다. 그동안 고 전총리와 물밑대화를 나눠온 염동연 열린우리당 의원까지 고 전총리를 외면했다. 고 전총리가 주창한 정치연석회의도 물건너가는 분위기가 됐다. 참석해 봤자 그는 들러리 중 한명에 불과했다. 정치권 분위기가 그랬고, 언론도 그랬고, 특히 국민의 시선이 그랬다.

고 전총리는 이때부터 '장고'에 들어갔다. 대외활동을 멈춘 것은 올 연초부터였으나, 지난해말부터 그는 말이 없어졌다. 군 방문 등 연말 행사때도 그에게선 활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16일 그는 장고끝에 대선출마 포기를 결심했다. 2004년 5월 총리직 사퇴후 1년8개월간의 정치실험 중단이었다.

고건 퇴장으로 범여권은 더욱더 혼란으로 빨려들게 됐다. 고 전총리 퇴장의 반사이익이 김근태-정동영 등 열린우리당 주자들에게 돌아갈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며, 이명박 등으로의 쏠림현상이 심화될 것으로 보는 전문가 시각이 많다. 반대로 범여권내 '제3 후보'의 절박성이 더 커졌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나라당내 박근혜-이명박 전쟁과 더불어 고건 퇴장으로, 2007년 대선국면은 연초부터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안개속으로 빨려드는 양상이다.
박태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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