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향 386들 “80년대 간첩조작사건 없었다” 강변
"청와대와 정치권에 아직도 386주사파 암약"
보수진영으로 전향한 과거 학생운동권 출신의 386들이 ‘일심회’ 사건을 ‘간첩단 사건’으로 단정하는 동시에 “80년대 사건 중에서도 (용공) 조작이 없었다”고 주장해 논란을 빚고 있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은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당주동 뉴라이트전국연합 대강당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일심회 사건과 관련해 국정원의 엄중한 수사를 촉구했다. 이 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인사들은, 소위 80년대 학생운동권 386 출신들로 뉴라이트전국연합의 간부 등 보수진영으로 전향한 사람들이다.
전대협 연사국장 출신의 이동호 현 북한민주화 포럼 사무총장과 전 반미청년회 조직원 출신의 강길모 현 <프리존> 대표 등 과거 386운동권이었다가 보수진영으로 전향한 인사들이 그 주인공이다.
황성준 전 여명그룹 중앙위원 “80년대에도 용공조작 사건은 없었다”
특히 이 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황성준 전 여명그룹 중앙위원은 “80년대 사건 중에서도 (용공) 조작이 있었느냐? 없었다”며 “간혹 (당국의) 실수는 있었다. 직책을 잘못 기재하거나 하는...”이라고 주장했다.
황 씨는 80년대 서울대 82학번을 중심으로 결성된 ‘여명그룹’ 멤버로 ML(막스-레닌주의동맹파) 이론 보급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386 이론가 출신 인사다.
황 씨는 “나도 과거에 고문을 당했다”면서도 “고문을 통해 자백하는 것이지 없었던 사건을 (당국이) 만들어내는 것은 80년대에 없었다고 본다”고 까지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하물며 노무현 정부에서 고문으로 (이번 일심회 사건을) 조작했겠냐”며 일심회 사건에 대한 진보진영의 의혹제기를 일축했다.
더 나아가 황 씨는 “나는 90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며 “그리고 소련공산당 지시를 받으며 첩보기관에서 활동해 왔다”고 주장했다. 황 씨는 이런 자신의 전력을 거론하며 “그런데도 (내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다”며 “그만큼 간첩 사건에 대해 명백한 증거를 포착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사건 역시도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과거 386 주사파들도 다 간첩이었다... 지금도 암약”
전 반민청년회 출신의 강길모 <프리존> 대표는 “이번 간첩단 사건 수사는 수사 진행중이지만 과거 우리들의 경험과 관행에 비춰봤을 때 간첩단 사건이 맞다고 본다”며 “수사과정에서 (피의자들이) 전면 부인하고, 단식하고 하는 것은 과거 운동권의 상투적인 수법으로 우리가 늘 해왔던 방법”이라고 단정했다.
더 나아가 강 대표는 “간첩이라 함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그대로 수행하고 그 과정에서 북한 권력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을 의미한다”며 “과거 주사파 학생 운동했던 우리들은 그런 의미에서 다 간첩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간첩 행동에 준하는 행동을 한 사람들이 한번도 반성하지 않고 커밍아웃을 한 적이 없다”며 “그러면서 이들이 대한민국 정부, 청와대, 국회, 시민단체, 언론, 예술단체에 안 들어간 곳이 없다”고 말했다.
강 대표는 “물론 과거를 반성하고 ‘주사 메모리칩’을 제거하는 386들도 많을 것이라 본다”면서도 “그러나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정치권에 진출한 주사파들을 보면 그 역사관, 대미관, 대북관, 경제관 등 모든 측면에서 아직 ‘주사 메모리칩’이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번 일심회 사건과 관련 “과거와 현재에 간첩 행위와 유사한 행위를 가치 판단없이 무비판적으로, 맹목적으로, 관행적으로 수행해왔던 사람들에게 이번 수사는 '너희들이 바로 간첩이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으로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전향 386들은 "과거 친북 좌파운동에 관여해왔으나 이제는 청와대와 열린우리당 그리고 정부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주요 인사들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가치로 하는 대한민국의 책임있는 공인이 된 만큼, 스스로의 과거 전력을 고백하고 현재의 사상적 좌표를 투명하게 소명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아예 “김정일의 주구가 돼 있는 것이 일부 386들”이라며 “이같은 386 일부 세력들이 현재에도 암약 돼 있다”며 “사법적 심판이 따라야한다”고 주장하는 등 격한 주장을 연이어 쏟아내기도 했다.
“언론보도가 곧 심증 굳히는데 결정타?”
그러나 이 날 기자회견에 나온 전향 386들도 딱히 이번 사건을 ‘간첩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논리적 근거는 없었다. 다만 자신들의 심증에 따른 주장일 뿐이었다.
이 날 기자회견에서 이들 전향 386들은 ‘간첩단으로 규정하는 법리적 이유’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우리들도 법리적으로 ‘간첩단 사건이다’라고 하는 것은 명확히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며 “다만 국정원 관계자 말에 따르면 수사 필요상 북한공작원과의 접촉 등 증거확보 중에 있다는 사실을 기초했을 때 간첩단으로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또 이들은 “일단 현재 국정원 관계자 증언으로 나온 것을 보면 현재 이번 사건 피의자들이 북한으로부터 수수한 공작금을 확보한 것으로 얘기되고 있다”며 거듭 일심회 사건을 간첩단 사건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들이 인용한 '국정원 관계자'는 다름 아닌 언론보도였다.
‘국정원 관계자에게서 구체적인 수사 진행과정을 직접 들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들은 “직접 들은 게 아니고 언론보도를 통해 이미 드러난 것”이라며 언론보도가 이들의 심증을 굳히는 유일한 증거였음을 반증했다.
이들은 한 발 더 나아가 “공안사건이라는 것이 원래 그 실체를 밝혀내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며 “국정원 수사를 ‘믿느냐 안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 철저하게 좌파가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이 이번 사건을 통한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강 대표는 “법리적 판단을 한 것이 아니라 개연성에 대한 판단을 한 것”이라며 “퍽치기 전과 30범이 모여 가지고 퍽치기 혐의로 들어온 피의자를 보고 ‘쟤는 퍽치기 맞네’ 이런 판단을 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황성준은 누구?
이 날 격한 발언을 쏟아낸 황 씨는 80년대 대학가의 대표적인 'ML파'(마르크스-레닌주의동맹파) 핵심 멤버였다. 서울대 정치학과 83학번인 황 씨는 서울대 82학번을 중심으로 한 ‘여명그룹’을 결성, 대학가의 사회주의 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주사파들이 운동권을 장악한 상태여서 여명그룹과 같은 ML파의 입지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당시 황 씨와 함께 활동한 모 지인은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황 씨는 막스-레닌 전집을 영문판으로 다 읽을 정도로 영재였다”며 “실천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보다는 이론에서 굉장히 뛰어났던 친구”라고 밝혔다.
황 씨가 몸담았던 여명그룹 멤버들은 80년대 후반 노동현장으로 파고들어 <여명>이라는 잡지를 발간 노동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기 시작한다. 같은 시기 월간 <노동자의 길>이 대학가와 노동가의 대중지로 통했다면, <여명>은 주로 실천가들이나 이론가들에게 새로운 사회주의 이론과 노동이론을 전파하는 전문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1992년 초, 황 씨를 비롯한 여명그룹 멤버들은 주대환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이 이끈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에도 합류하게 된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삼민그룹, 여명그룹, 노동계급그룹 등 지하에서 분화되어 활동하던 단체들의 통합운동이 바로 한국노동당으로 나타난 셈이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은 곧바로 '한국노동당‘을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로 규정, 창립준비위원장이었던 주대환 씨를 비롯한 핵심 간부 4명을 구속했다.
당시 소련에 머물고 있던 이 소식을 들은 황 씨는 입국을 포기, 1992년 2월 상트 페테르부르크대 경제학부 박사과정에 입학한다. 황 씨가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시기도 이 무렵이다. 이후 황 씨는 2002년 귀국할 때 까지 10여년이 넘는 세월을 러시아에 머물며 1994년부터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대 동방학부 조교수로 임용되기도 했다. 또 황 씨는 1995~2001년까지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002년 귀국 후 러시아와 무역사업을 하기도 한 황 씨는 현재는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 중에 있다. 황 씨는 소설가 황순원의 친손자이기도 하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은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당주동 뉴라이트전국연합 대강당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일심회 사건과 관련해 국정원의 엄중한 수사를 촉구했다. 이 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인사들은, 소위 80년대 학생운동권 386 출신들로 뉴라이트전국연합의 간부 등 보수진영으로 전향한 사람들이다.
전대협 연사국장 출신의 이동호 현 북한민주화 포럼 사무총장과 전 반미청년회 조직원 출신의 강길모 현 <프리존> 대표 등 과거 386운동권이었다가 보수진영으로 전향한 인사들이 그 주인공이다.
황성준 전 여명그룹 중앙위원 “80년대에도 용공조작 사건은 없었다”
특히 이 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황성준 전 여명그룹 중앙위원은 “80년대 사건 중에서도 (용공) 조작이 있었느냐? 없었다”며 “간혹 (당국의) 실수는 있었다. 직책을 잘못 기재하거나 하는...”이라고 주장했다.
황 씨는 80년대 서울대 82학번을 중심으로 결성된 ‘여명그룹’ 멤버로 ML(막스-레닌주의동맹파) 이론 보급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386 이론가 출신 인사다.
황 씨는 “나도 과거에 고문을 당했다”면서도 “고문을 통해 자백하는 것이지 없었던 사건을 (당국이) 만들어내는 것은 80년대에 없었다고 본다”고 까지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하물며 노무현 정부에서 고문으로 (이번 일심회 사건을) 조작했겠냐”며 일심회 사건에 대한 진보진영의 의혹제기를 일축했다.
더 나아가 황 씨는 “나는 90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며 “그리고 소련공산당 지시를 받으며 첩보기관에서 활동해 왔다”고 주장했다. 황 씨는 이런 자신의 전력을 거론하며 “그런데도 (내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다”며 “그만큼 간첩 사건에 대해 명백한 증거를 포착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사건 역시도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과거 386 주사파들도 다 간첩이었다... 지금도 암약”
전 반민청년회 출신의 강길모 <프리존> 대표는 “이번 간첩단 사건 수사는 수사 진행중이지만 과거 우리들의 경험과 관행에 비춰봤을 때 간첩단 사건이 맞다고 본다”며 “수사과정에서 (피의자들이) 전면 부인하고, 단식하고 하는 것은 과거 운동권의 상투적인 수법으로 우리가 늘 해왔던 방법”이라고 단정했다.
더 나아가 강 대표는 “간첩이라 함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그대로 수행하고 그 과정에서 북한 권력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을 의미한다”며 “과거 주사파 학생 운동했던 우리들은 그런 의미에서 다 간첩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간첩 행동에 준하는 행동을 한 사람들이 한번도 반성하지 않고 커밍아웃을 한 적이 없다”며 “그러면서 이들이 대한민국 정부, 청와대, 국회, 시민단체, 언론, 예술단체에 안 들어간 곳이 없다”고 말했다.
강 대표는 “물론 과거를 반성하고 ‘주사 메모리칩’을 제거하는 386들도 많을 것이라 본다”면서도 “그러나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정치권에 진출한 주사파들을 보면 그 역사관, 대미관, 대북관, 경제관 등 모든 측면에서 아직 ‘주사 메모리칩’이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번 일심회 사건과 관련 “과거와 현재에 간첩 행위와 유사한 행위를 가치 판단없이 무비판적으로, 맹목적으로, 관행적으로 수행해왔던 사람들에게 이번 수사는 '너희들이 바로 간첩이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으로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전향 386들은 "과거 친북 좌파운동에 관여해왔으나 이제는 청와대와 열린우리당 그리고 정부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주요 인사들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가치로 하는 대한민국의 책임있는 공인이 된 만큼, 스스로의 과거 전력을 고백하고 현재의 사상적 좌표를 투명하게 소명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아예 “김정일의 주구가 돼 있는 것이 일부 386들”이라며 “이같은 386 일부 세력들이 현재에도 암약 돼 있다”며 “사법적 심판이 따라야한다”고 주장하는 등 격한 주장을 연이어 쏟아내기도 했다.
“언론보도가 곧 심증 굳히는데 결정타?”
그러나 이 날 기자회견에 나온 전향 386들도 딱히 이번 사건을 ‘간첩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논리적 근거는 없었다. 다만 자신들의 심증에 따른 주장일 뿐이었다.
이 날 기자회견에서 이들 전향 386들은 ‘간첩단으로 규정하는 법리적 이유’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우리들도 법리적으로 ‘간첩단 사건이다’라고 하는 것은 명확히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며 “다만 국정원 관계자 말에 따르면 수사 필요상 북한공작원과의 접촉 등 증거확보 중에 있다는 사실을 기초했을 때 간첩단으로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또 이들은 “일단 현재 국정원 관계자 증언으로 나온 것을 보면 현재 이번 사건 피의자들이 북한으로부터 수수한 공작금을 확보한 것으로 얘기되고 있다”며 거듭 일심회 사건을 간첩단 사건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들이 인용한 '국정원 관계자'는 다름 아닌 언론보도였다.
‘국정원 관계자에게서 구체적인 수사 진행과정을 직접 들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들은 “직접 들은 게 아니고 언론보도를 통해 이미 드러난 것”이라며 언론보도가 이들의 심증을 굳히는 유일한 증거였음을 반증했다.
이들은 한 발 더 나아가 “공안사건이라는 것이 원래 그 실체를 밝혀내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며 “국정원 수사를 ‘믿느냐 안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 철저하게 좌파가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이 이번 사건을 통한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강 대표는 “법리적 판단을 한 것이 아니라 개연성에 대한 판단을 한 것”이라며 “퍽치기 전과 30범이 모여 가지고 퍽치기 혐의로 들어온 피의자를 보고 ‘쟤는 퍽치기 맞네’ 이런 판단을 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황성준은 누구?
이 날 격한 발언을 쏟아낸 황 씨는 80년대 대학가의 대표적인 'ML파'(마르크스-레닌주의동맹파) 핵심 멤버였다. 서울대 정치학과 83학번인 황 씨는 서울대 82학번을 중심으로 한 ‘여명그룹’을 결성, 대학가의 사회주의 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주사파들이 운동권을 장악한 상태여서 여명그룹과 같은 ML파의 입지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당시 황 씨와 함께 활동한 모 지인은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황 씨는 막스-레닌 전집을 영문판으로 다 읽을 정도로 영재였다”며 “실천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보다는 이론에서 굉장히 뛰어났던 친구”라고 밝혔다.
황 씨가 몸담았던 여명그룹 멤버들은 80년대 후반 노동현장으로 파고들어 <여명>이라는 잡지를 발간 노동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기 시작한다. 같은 시기 월간 <노동자의 길>이 대학가와 노동가의 대중지로 통했다면, <여명>은 주로 실천가들이나 이론가들에게 새로운 사회주의 이론과 노동이론을 전파하는 전문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1992년 초, 황 씨를 비롯한 여명그룹 멤버들은 주대환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이 이끈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에도 합류하게 된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삼민그룹, 여명그룹, 노동계급그룹 등 지하에서 분화되어 활동하던 단체들의 통합운동이 바로 한국노동당으로 나타난 셈이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은 곧바로 '한국노동당‘을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로 규정, 창립준비위원장이었던 주대환 씨를 비롯한 핵심 간부 4명을 구속했다.
당시 소련에 머물고 있던 이 소식을 들은 황 씨는 입국을 포기, 1992년 2월 상트 페테르부르크대 경제학부 박사과정에 입학한다. 황 씨가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시기도 이 무렵이다. 이후 황 씨는 2002년 귀국할 때 까지 10여년이 넘는 세월을 러시아에 머물며 1994년부터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대 동방학부 조교수로 임용되기도 했다. 또 황 씨는 1995~2001년까지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002년 귀국 후 러시아와 무역사업을 하기도 한 황 씨는 현재는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 중에 있다. 황 씨는 소설가 황순원의 친손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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