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패션 디자이너' 1호, 앙드레 김
국내 토종 디자이너로 세계적 명성 얻어
12일 세상을 떠난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국내 남성 패션디자이너 1호'로서 한국 패션계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패션디자이너로서의 자질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와중에 피란 갔던 부산에서 외국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배우들과 그들의 의상을 보며 옷에 관심을 가진 그는 누이와 여동생을 모델로 예쁜 옷을 입은 여인을 그리며 디자이너의 꿈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그는 2002년 펴낸 회고록 '마이 판타지'에서 디자이너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한 것은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영화 '퍼니 페이스'를 본 뒤였다고 회고했다.
디자이너 지방시가 디자인한 의상이 여러 벌 나오는 이 영화를 보고 '여성의 아름다운 꿈을 실현하는 옷을 만드는데 평생을 걸겠다'고 다짐한 그는 이후 흔들리지 않고 패션 디자이너의 길을 향해 나아갔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홀로 서울로 올라와 디자이너 최경자의 양장점에서 일하던 그는 1961년 최경자가 국제복장학원을 설립하자 1기생으로 입학해 디자이너 수업을 받았다.
30명의 입학생 중 단 세 명에 불과했던 남학생 중 한 명이었던 앙드레 김에 대해 최경자는 자서전에서 "재능이 많고 감각이 뛰어났던 제자"로 평가하기도 했다.
국제복장학원에서 1년의 과정을 수료한 그는 1962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패션쇼를 열고 화려하게 패션계에 데뷔했고 이후 소공동에 '살롱 드 앙드레'라는 이름의 의상실을 열었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았던 때라 조선호텔 앞에 있는 양복접 'GQ테일러'에 무작정 찾아가 쇼윈도 중 하나를 빌려달라고 해서 양복점 한켠을 빌려 연 의상실이었다.
의상실에 붙인 앙드레라는 이름은 당시 프랑스 대사관의 한 외교관이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려면 부르기 쉬운 외국 이름이 있어야 한다며 붙여준 것이다.
1966년에는 프랑스 의상협회 초청으로 파리에서 첫 컬렉션을 열었다. 당시 언론이 '선경(仙境)의 마술'(르 피가로)이라고 극찬하는 등 호평받았고 1968년에는 여세를 몰아 미국 뉴욕에서 패션쇼를 여는 등 해외 무대에도 일찍 진출했다.
이후 국내뿐만 아니라 매년 각국의 대표적 명소에서 패션쇼를 열었던 그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이집트 피라미드 앞과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패션쇼를 개최하기도 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로부터 공식 초청받아 바르셀로나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패션에 대한 열정을 인정받아 1997년 패션디자이너로서는 처음으로 훈장을 받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에서도 훈장을 받았다. 1999년 그의 패션쇼가 열렸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11월6일을 '앙드레 김의 날'을 선포했고 2005년에는 한국복식학회가 주는 최고디자이너상을 받았다.
젊은 시절 '비오는 날의 오후 3시'라는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한때 배우를 꿈꾸기도 했던 앙드레 김은 특히 연예계와도 인연이 깊었다.
그의 패션쇼는 전문 모델뿐만 아니라 내로라하는 당대 최고의 연예인들이 등장해 남녀가 이마를 맞대는 장면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앙드레 김 무대에 서야 최고의 스타로 인정받는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연예인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던 앙드레 김 패션쇼에는 그간 김희선을 비롯해 이영애와 장동건, 최지우, 배용준, 김태희 등이 무대에 올랐다.
국내뿐만 아니라 팝스타 마이클 잭슨과 배우 나스타샤 킨스키, 브룩 실즈도 앙드레 김이 디자인한 옷을 입으며 그의 이름을 알렸다.
앙드레 김은 말년 패션뿐만 아니라 보석과 도자기, 속옷, 안경 등 다양한 분야로 '앙드레 김' 브랜드를 잇따라 런칭하며 사업을 성공적으로 확대해 나가기도 했다.
패션 디자이너로서 순탄한 삶을 살아가던 그의 인생에 1999년 불거진 '옷로비' 사건은 큰 시련이었다.
옷로비 사건 당시 참고인으로 나서며 '김봉남'이란 본명이 세상에 알려졌고 이후 개그프로그램의 소재로 등장하며 희화화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이후 옷로비 사건에 대해 '억울하고 불쾌한 일이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패션에 대한 열정으로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1982년 당시 18개월이던 아들 중도씨를 입양했으며 2005년에는 쌍둥이 손자를 얻어 할아버지가 됐다.
패션디자이너로서의 자질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와중에 피란 갔던 부산에서 외국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배우들과 그들의 의상을 보며 옷에 관심을 가진 그는 누이와 여동생을 모델로 예쁜 옷을 입은 여인을 그리며 디자이너의 꿈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그는 2002년 펴낸 회고록 '마이 판타지'에서 디자이너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한 것은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영화 '퍼니 페이스'를 본 뒤였다고 회고했다.
디자이너 지방시가 디자인한 의상이 여러 벌 나오는 이 영화를 보고 '여성의 아름다운 꿈을 실현하는 옷을 만드는데 평생을 걸겠다'고 다짐한 그는 이후 흔들리지 않고 패션 디자이너의 길을 향해 나아갔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홀로 서울로 올라와 디자이너 최경자의 양장점에서 일하던 그는 1961년 최경자가 국제복장학원을 설립하자 1기생으로 입학해 디자이너 수업을 받았다.
30명의 입학생 중 단 세 명에 불과했던 남학생 중 한 명이었던 앙드레 김에 대해 최경자는 자서전에서 "재능이 많고 감각이 뛰어났던 제자"로 평가하기도 했다.
국제복장학원에서 1년의 과정을 수료한 그는 1962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패션쇼를 열고 화려하게 패션계에 데뷔했고 이후 소공동에 '살롱 드 앙드레'라는 이름의 의상실을 열었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았던 때라 조선호텔 앞에 있는 양복접 'GQ테일러'에 무작정 찾아가 쇼윈도 중 하나를 빌려달라고 해서 양복점 한켠을 빌려 연 의상실이었다.
의상실에 붙인 앙드레라는 이름은 당시 프랑스 대사관의 한 외교관이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려면 부르기 쉬운 외국 이름이 있어야 한다며 붙여준 것이다.
1966년에는 프랑스 의상협회 초청으로 파리에서 첫 컬렉션을 열었다. 당시 언론이 '선경(仙境)의 마술'(르 피가로)이라고 극찬하는 등 호평받았고 1968년에는 여세를 몰아 미국 뉴욕에서 패션쇼를 여는 등 해외 무대에도 일찍 진출했다.
이후 국내뿐만 아니라 매년 각국의 대표적 명소에서 패션쇼를 열었던 그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이집트 피라미드 앞과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패션쇼를 개최하기도 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로부터 공식 초청받아 바르셀로나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패션에 대한 열정을 인정받아 1997년 패션디자이너로서는 처음으로 훈장을 받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에서도 훈장을 받았다. 1999년 그의 패션쇼가 열렸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11월6일을 '앙드레 김의 날'을 선포했고 2005년에는 한국복식학회가 주는 최고디자이너상을 받았다.
젊은 시절 '비오는 날의 오후 3시'라는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한때 배우를 꿈꾸기도 했던 앙드레 김은 특히 연예계와도 인연이 깊었다.
그의 패션쇼는 전문 모델뿐만 아니라 내로라하는 당대 최고의 연예인들이 등장해 남녀가 이마를 맞대는 장면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앙드레 김 무대에 서야 최고의 스타로 인정받는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연예인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던 앙드레 김 패션쇼에는 그간 김희선을 비롯해 이영애와 장동건, 최지우, 배용준, 김태희 등이 무대에 올랐다.
국내뿐만 아니라 팝스타 마이클 잭슨과 배우 나스타샤 킨스키, 브룩 실즈도 앙드레 김이 디자인한 옷을 입으며 그의 이름을 알렸다.
앙드레 김은 말년 패션뿐만 아니라 보석과 도자기, 속옷, 안경 등 다양한 분야로 '앙드레 김' 브랜드를 잇따라 런칭하며 사업을 성공적으로 확대해 나가기도 했다.
패션 디자이너로서 순탄한 삶을 살아가던 그의 인생에 1999년 불거진 '옷로비' 사건은 큰 시련이었다.
옷로비 사건 당시 참고인으로 나서며 '김봉남'이란 본명이 세상에 알려졌고 이후 개그프로그램의 소재로 등장하며 희화화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이후 옷로비 사건에 대해 '억울하고 불쾌한 일이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패션에 대한 열정으로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1982년 당시 18개월이던 아들 중도씨를 입양했으며 2005년에는 쌍둥이 손자를 얻어 할아버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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