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DJ-JP 이념논쟁
[옛날 정치 지금 정치] <10> 좌파집권 8년의 변화
5.31지방선거 후 열린우리당에선 좌회전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그들은 지방선거 패인은 경제실패라고 했다. 6월 14일 열린 비상대책회의에서도 정부의 개혁이 친북, 반미, 반 기업으로 비춰진 게 문제라고 했다. 초선의원들은 생활고 아랑곳없는 대북 퍼주기, 과거사, 세금 등 좌파정권의 중심정책까지 도마에 올렸다. 이쯤이면 열우당은 좌파이념 정당이 아니다. 한나라당의 소장파들의 좌파 행진도 주춤해진 상태다.
그럼 좌회전은 멈추는 것인가. 아니다. 노 대통령은 꿈쩍도 않는다. 노 대통령은 좌회전을 멈출 생각이 아니다.
한국정치 좌회전의 출발점은 김대중 정권이다. 김대중씨는 90년대 중반엔 보수 자리를 놓고 다른 정파들과 경쟁했다. 그런데 집권 후 좌회전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정치권의 색깔이 달라졌다. 90년대 중반, 보수를 경쟁하던 정당과 정당 사람들이 2000년대 들어 진보를, 좌파를 경쟁하는 형편이다. 정권의 좌회전이 이런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 냈다.
90년대 중반에서 2006년 사이 정세변화는 별로 없다. 그런데 정당과 정치인들은 진보와 보수 사이를 넘나들었다. 국민의 의식도 크게 달라졌다. 이 과정을 보면 정치인 그리고 대중정당들의 말은 이념에 관한 한 믿을 것이 아닌지 모른다. 정당과 정당 사람들은 시류 따라, 민심 따라 보수와 진보를 넘나든다. 보수 쪽도 진보 쪽도 설 수 없는 사람들은 중도다. 이제 그 자취를 더듬어 보자.
90년대 정치권의 이념논쟁은 JP, DJ의 신당 창당이 배경이다. 95년 9월 민주당의 이기택 계열을 떨쳐내고 창당한 DJ의 새천년국민회의는 호남과 운동권 일색. 이래서 보수색깔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보수의 깃발을 걸고 5.6공 사람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여기 포문을 연 것이 자민련 김종필 총재다. 김영삼 정권에서 밀러나 자민련을 창당한 김종필씨는 YS가 토막내고 있는 보수를 끌어안는 데서 활로를 찾고 있었다. 국민회의의 보수 진입은 보수본류라는 자민련의 깃발을 흐리게 하는 경쟁자로 판단한 모양이었다.
95년 9월 김종필 총재는 "새로 만든 당이 보수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보수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한국전쟁 때 기피했거나 달아난 사람들은 보수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YS까지 싸잡았다.
YS쪽은 무시했다. DJ는 대변인 설훈을 내세워 우리는 한번도 진보주의를 주장한 일이 없다는 장황한 해명을 했다. JP쪽의 재 반격으로 두 정당간 성명전이 펼쳐졌다. 요약하자.
"6.25 때 공산침략자와 싸운 정치지도자가 아니고는 보수 운운할 자격이 없다. 우리가 경제개발 할 때 민주주의 운운하며 개발행보를 가로막은 사람이 보수 운운하는 것은 가소롭다."(김종필, 9월 29일 충남 아산지구당 창당대회에서)
"민주주의 안에 보수가 있다. 쿠데타가 아니라 민주투쟁한 사람이 보수다. 국민회의는 민주주의 시장경제 그리고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우파정당이다."(김대중 기자회견)
"공산주의자들은 아직 우리 사회에 잠복해 있다. 세상이 바뀌니까 옷을 갈아입고 보수를 자처하고 있다."(김종필 기자간담회)
"군사쿠데타로 민주정부를 전복시킨 자는 보수를 말할 자격이 없다. 그것은 수구반동이다." (박지원 국민회의 대변인)
"반동이라는 용어는 공산당 용어다. 김대중씨는 좌파가 아니라 좌익이다. 그는 남로당 산하의 민해청 청년부 소속이었다."(자민련 박규식 의원)
두 정당간에 매일 주고받던 성명전에서 국민회의가 물러섰다. 박지원 대변인은 야당끼리 싸우는 건 김영삼 정권을 돕는 일이라며 이젠 대응을 안 하겠다고 했다. 휴전이었다. 그런데 불을 다시 붙인 건 김대중 총재다. 이번엔 자민련이 아니라 김영삼 대통령의 신한국당이 상대였다.
김대중 총재는 11월 설훈의 도봉을 지구당 창당대회에서 "신한국당이 어제는 극좌인사를, 오늘은 극우인사를 영입하려하고 있어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신한국당은 보수인지 혁신인지 분명히 하라"고 요구했다. 노동계 출신 이태복씨 등의 입당을 문제삼았다.
신한국당에선 손학규 대변인이 나셨다."김대중씨는 군사정권 때 색깔논쟁의 피해자라면서 색깔론을 제기하는 것은 자신의 약점을 가리기 위한 위장 전술"이라고 반격했다.
국민회의는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이재오 등 민중당 계열의 신한국당 입당도 문제제기를 했다. "신한국당에는 5.3사태 등 민주화운동을 탄압할 구실을 만들어 민주화운동을 저해한 급진과격인사들도 있다. 신한국당의 정체는 무엇인가"라고 따졌다. 5.3사태란 87년 야당의 인천대회에 친북 전단을 뿌린 폭력시위 주동세력을 말한다.
신한국당도 이에 김대중 총재의 과거를 문제삼고 나섰다. 손학규 대변인은 "김 총재는 서경원을 통해 김일성의 돈을 받았고 노태우 대통령의 돈도 받는 등 극좌에서 극우까지 청탁을 가리지 않고 돈을 받은 주제에 다른 당을 극좌에서 극우라는 용어로 공격할 자격이 있는가" 라고 따졌다.
95년 북한은 수해를 당했다.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조성한 산비탈의 계단식 밭이 무너져 토사가 되어 논밭을 돌밭으로 만든 최악의 피해였다. 북한은 심각한 식량위기에 처했다. 일본과 미국이 지원에 앞장섰다. 미국은 핵 위기로 단행했던 북한에 대한 금융제재도 풀었다. 그런데 김영삼 정부는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에 조건을 걸었다. 휴전선으로 남하한 공군기지의 철수 등 3개항이다.
이런 대북 정책에 대해 야당도 동조했다. 자민련은 오랜만에 우리와 같은 주장이 나왔다고 했다. DJ의 국민회의도 북한의 태도를 보고 식량지원을 결정해야 한다. 다만 종교단체 등의 식량지원은 열어주어야 한다고 했다. 꼬마 민주당이 유일한 반대당이었다. 이규택 대변인은"신한국당이 내년 4월 총선에서 보수층의 표를 의식해 쌀 지원을 반대한다"고 비난했다. 북한의 식량위기에 대해 북한당국이 달라지지 않으면 지원할 수 없다. 미국도 한국정부와 보조를 맞춰야 한다는 정부정책이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이게 90년대 후반의 한국이었다.
그 무렵 김대중씨는 국민회의를 우회전시켰다. 보수본류를 자처한 JP의 국민회의와 연합해 집권했다. 우파정권이었다. 그러나 집권하자 바로 좌회전을 시작했다.
DJ정부를 국민의 정부라고 했다. 그 이전의 정부는 국민의 정부가 아니었다는 뉘앙스다. 제2건국을 내걸고 전국 조직을 갖는 위원회도 만들어 제1건국과 선을 그었다. 48년의 건국을 제1건국으로 밀쳐낸 차별화의 신호였다.
의문사조사위원회를 만들어 대한민국 50년의 그늘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해방정국, 6.25전란 중의 의문의 죽음을 파헤쳤다.
햇볕정책을 앞세워 북에 다가갔다. 김정일과 회담한 후 평화를 선언했다. 이제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 김정일은 식견 있는 지도자라고 추켜세웠다. 이제 전쟁은 없다고 했다.
재벌, 보수언론을 손보기 시작했다. 전교조를 합법화, 사학들에 대한 도전이 시작됐다. 재벌, 언론, 그리고 종교계가 중심인 사학은 한국의 보수 본산이다. 보수본산을 허무는 정책들이었다.
노 정권은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이 정책을 고스란히 승계하고 있다. 의문사조사위는 과거사조사위로 더 확대되었다. 개혁을 내건 언론법 사학법 그리고 재벌규제가 모두 DJ정책을 계승하고 단계를 높인 것들이다.
지방선거 후 당이 요동했지만 노 대통령은 미동도 안 했다. "한두 번 선거로 나라가 잘되고 못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 의식, 문화, 정치구조 등이 나라의 미래를 결정한다."
"역사 속에서 구현되는 민심과 그 시기 국민들의 감정적 이해관계에서 창출되는 민심을 다르게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길게 봐야 한다."
노 대통령의 이 말은 좌회전 8년에 연결해 해석해 볼 발언. 노 정권의 노선에 멈춤은 없다는 명백한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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