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검색 바로가기

역대대통령의 '레임덕'과의 전쟁

[옛날 정치 지금 정치] <7> 사정, 탈당, 전위부대 정면돌파

대통령제의 결함의 하나는 임기 후반에 닥치는 레임덕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너무 일찍 레임덕 위기에 마주쳐 있다.

5.31선거는 탄핵사태와 비슷하다. 국민은 그의 국정을 거부했다. 열린우리당도 분열위기다. 이제 그는 추진력을 잃었다. 바닥에 닿은 느낌이다. 그렇지만 손놓고 있을 노 대통령이 아니다. 갈 데까지 내려갔다가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특유의 재주를 다시 한번 발휘할까.

대통령은 레임덕에 대비한다. 노 대통령도 레임덕을 비켜갈 방책을 강구해 두었음직하다. DJ 케이스 스터디를 했다는 말도 있다. 선거연패로 힘을 잃었다는 점에서 레임덕이 다가오는 모양새는 DJ레임덕과 닮은꼴이다. 어떤 선택을 할까. 아니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전임들의 레임덕을 되돌아보자.

노태우의 레임덕 대응, 사정

전두환 대통령은 레임덕을 겪지 않고 퇴임했다. 그는 내각제 개헌공작을 접고 대통령 직선제 채택을 노태우의 결단으로 포장했다. 6.29선언이다. 대통령 선거운동도 그가 주도해 노태우 후보를 당선자로 만들었다. 퇴임 이후에 대비해 전직 대통령이 주관하는 국정자문회의법도 만든 정도다.

노태우 대통령은 재임기간 야당과 합당해 3정파를 이끌고 간 대통령이다. 레임덕에 취약한 조건일 수 있었다. 그래서 대비했고 그 덕인지 레임덕을 거의 겪지 않았다.

그의 후기 대책은 사정으로 시작됐다. 91년 1월 검찰은 평민당 소속 이재근 이돈만 그리고 여당인 자민당의 박진구 의원을 뇌물수수혐의로 조사했다. 이재근 상공위원장 등 상공위원 3인은 유관기관인 한국자동차공업협회와 무역협회로부터 7만7천 달러를 받아 외유했다는 혐의였다.

평민당은 야당탄압이라고 반발했다. 김대중 총재는 민간단체의 정부기관 보조를 국회에서 조사하자. 여야를 구분말고 뇌물외유도 전면조사하자는 등 공세를 취했다. 노 대통령은 대꾸도 안 했다. 검찰은 2월, 세 의원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을 걸어 구속했다.

잇달아 터진 게 수서사건이다. 수서사건이란 정태수의 한보건설에 서울 양재동 일대의 금싸라기 땅을 내준 특혜분양이다. 한보는 26개 주택조합을 내세워 민원사항으로 위장해 로비를 했다. 국회건설위원회가 청원 처리라는 이름으로 한보를 거들고 나섰다. 건설부 등 관계기관은 국회의 청원을 빌미로 일을 처리했다.

노 대통령은 감사원 조사를 거쳐 수서 이권에 개입한 청와대 비서관을 해임하고 검찰수사로 넘겼다. 국회건설위원회가 수사선상에 오르고 청와대 건설부 서울시 등 관계기관이 몽땅 벌집이 되었다.

야당은 6공 최대의 비리로 규정 총공세를 폈다. 김대중 총재는 이기택 민주당과 합동해 개최한 규탄집회에서 노 대통령은 민자당을 떠나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하고 국회도 모두 사퇴해 선거로 심판 받자고 했다. 이때도 노 대통령은 미동도 안 했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평민당도 수서의 민원을 조속히 처리하라는 김대중 총재 명의의 문서까지 관계기관에 보낸 것이 들통났다. 이 단계에서 검찰은 오용운 건설위원장 이태섭 김동주 (이상 민자) 이원배 김태식(이상 평민) 등 다섯 의원을 구속했다.

이승훈 경제부총리, 홍성철 전 청와대비서실장, 김종인 경제수석, 이연택 이상배 전,현 행정수석, 민자당에선 김용환 정책위 의장, 서청원 정책실장, 그리고 김대중 총재의 측근 중의 측근인 권노갑 의원 등이 줄줄이 검찰에 불려갔다.

정계와 관계가 얼어붙었다. 다음은 어떤 사건이 터질지 몰라 재계까지도 긴장했다. 레임덕 같은 건 얼씬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선거의 해 92년이 밝았다. 김영삼 대표최고위원과 그의 민주계가 요구하는 조기전당대회가 숙제였다. 지명 후면 레임덕이다. 노 대통령은 정초 김종필 박태준도 동석한 자리에서 YS와 담판했다. 여당이 야당보다 먼저 지명대회 하는 나라는 없다. 조기지명대회는 안 된다. 4월 국회의원 선거 후에 하자. 셋이 모두 같은 의견인데 아무리 뚝심으로만 살아온 YS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국회의원 선거 때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은 전국유세를 했다. 집권당 대표라면 기관장 등에게 격려금을 주는 건 관례였다. 그런데 YS는 돈이 없었다. 안 할 수는 없어 마련했는데 대표가 주기엔 봉투가 너무 가벼웠다. 이래서 홍인길 비서가 봉투 전달을 맡아 했다. 대통령 권력에 한치의 틈도 없음을 엿볼 수 있었던 사례의 하나다.

선거는 민자당 의석이 줄어 과반수가 무너진 패배였다. 민정계는 김영삼 대표의 책임이라고 공세를 폈다. YS 민주계는 지명대회를 아니한 업보라고 맞받았다. 후보 지명전도 YS독주가 아니었다. 이종찬이 나서고 박태준도 노 대통령의 낙점을 기대했다. 아니 장담했다. 모두 노 대통령의 마음을 잡아야 할 사람들이었다.

5월 19일 김영삼 대표가 후보로 지명됐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난 8월, 제2이동통신 사업자로 선경이 선정되면서 특혜시비가 일어났다. 선경은 노 대통령의 사돈기업, 야당들이 사돈한테 마지막 선물을 주었다고 떠들어댔다.

김영삼 후보가 노 대통령과 주례회동을 가진 뒤 이동통신 선정을 백지화하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8월 24일 선경을 대표로 한 대한텔레콤이 포기의사를 발표했다. 체신부도 선정백지화를 발표했다. 노 대통령의 백기였고 레임덕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민자당을 탈당하고 중립선거관리내각이라는 카드를 내밀었다. 민주당 김대중 후보와 국민당 정주영 후보가 환영했다. 김영삼 후보는 졸지에 집권당 후보에서 제1당 후보가 되고 노 대통령이 레임덕에서 탈출하는 전세역전이었다.

선거전 막이 올랐을 때 노 대통령은 중립선언을 이유로 자금지원을 안 했다. 김영삼 후보의 자금계획에 차질이 왔다. 다급해진 YS가 재계에 SOS를 보냈다. 한보의 정태수가 김영삼 캠프에 다가갈 수 있었던 틈은 이래서 생겼다. 그리고 이게 한국헌정사의 비극으로 기록되는 전직 대통령의 사법처리와 한보사건의 불씨가 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1995년 재임기간중 비자금 조성을 사과하고 있는 노태우대통령. 재임말기 그는 사정으로 레임덕을 막았으나 결국 사정의 제물이 돼야 했다. ⓒ연합뉴스


김영삼의 레임덕 대응, 탈당

김영삼 대통령의 레임덕은 96년 연말 노동법 단독 처리에서 시작됐다. 금융계의 구조조정이 다급했지만 야당은 나라의 형편을 외면했다. DJ 민주당이 노조와 함께 거리 투쟁에 나섰다. 김영삼 물러나라는 구호가 서울거리에 출렁거렸다.

대통령은 밀리지 않겠다는 단호한 자세였다. 그런데 한보사건이 터졌다. 홍인길을 비롯해 대통령의 측근들이 한보의혹의 표적이 됐다.

대선을 겨냥한 DJ민주당이 포문을 열었다. 당내에 한보사건 진상조사단을 구성하고 폭로전을 시작했다. 한보는 YS 대선자금의 뿌리라고 했다. 그러다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에게 포문을 돌렸다. 5백억 수수설을 비롯해 연속적으로 의혹을 폭로했다. 헬기를 타고 두 차례나 당진공장을 방문했다. 식당주인의 증언이 있다. 이런 식이었다. 신문은 민주당의 폭로를 여과 없이 써댔다. 현철을 구속하라고 두들겨댔다.

사건을 담당하고 있던 대검의 최병국 중수부장이 정태수 회장을 감방에서 불러내 직접 심문했다.

-당신 때문에 나라가 흔들린다. 한보를 도운 중심인물에 대해 얘기를 하자.
-그런 것 없다. 모두들 도와주었다.
-현철이도 도와주었겠지.
-내가 대통령하고도 직통으로 전화가 되는데 그런 아이들을 왜 상대하나.
-아들하고 친구라던데…
-둘째하고 대학 동문인가? 별로 친하지 않은 모양이더라.

2시간을 심문했다. 현철은 한보와는 관계가 없었다. 헬기를 타고 당진에 간 사람은 현철이 아니라 김모 변호사였다. 70대의 변호사여서 현철과 혼동할 리 없었다. 그런데 민주당은 식당 주인이 증언했다는 거짓말을 했고 그러니 세상은 현철이는 헬기로 모시는 한보의 VIP로 믿는 판이었다.

5월17일 검찰은 현철을 구속했다. 한보가 아니라 한솔그룹의 금전수수 혐의를 걸었다. 대통령은 5월30일 사과성명을 냈다. 한보사건 폭풍에 이렇게 무너지면서 대통령은 레임덕이 되고 말았다.

한보사건이 남긴 교훈은 폭로와 신문보도다. 여과 없는 보도와 평론, YS에게 신문은 밉고 무섭고 끔찍했으리라. 그 경험은 DJ에겐 타산지석이 됐을 게다. 권력은 신문과 밀월이 안 된다. 숨을 죽여놓아야 한다. 그걸 한보사건에서 배운 DJ고 노무현 대통령일지 모른다.

한보의 바람 다음에 온 것이 DJ비자금이다. 10월 이회창 캠프에서 DJ비자금 파일을 입수해 이를 검찰에 넘겼다. 두 아들의 병역문제 재탕, 부패의혹 퍼뜨리기 등 민주당의 공세에 맞선 이회창 캠프의 카드였다. 검찰은 고발을 받았으니 수사해야 한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검찰은 10월22일 수사는 대선 이후로 미룬다고 발표했다.

김 대통령은 이회창 후보에게 통보했다. "수사는 제2의 광주사태를 각오해야 한다. 수사하면 선거는 없다. 선거를 통해 이길 생각을 하라." 그러나 이회창은 대통령의 탈당을 공개적으로 권고하는 것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레임덕 제2파다.

제3파는 IMF다. 국기부도 위기를 맞아 일본에 그리고 미국에 SOS를 보냈다. 일본은 난색을 표시했다. 클린턴은 IMF에 가라고 했다. 대선을 넘길 수 있도록 봐달라고 사정했지만 싸늘했다. 당시 정부의 미.일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당연히 들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왜 고개를 저었을까. 김 대통령은 두 나라 수뇌에게 거만한 모습으로 비쳤다. 두 나라 관계는 좋았지만 대통령들의 관계는 이래서 나빴다. 그게 거절당한 배경이고 진짜 이유다.

11월28일 클린턴 대통령이 김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왔다."국가부도사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IMF 협상을 12월1일까지는 마무리지어야 한다"최후통첩이었다.

별 수 없이 선거 한복판에서 IMF로 갔다. IMF 의장은 김영삼 정권의 보증만으론 안 되고 대통령 후보들의 이행각서를 요구했다. 국제적 레임덕이 YS가 마주쳤던 레임덕 3파다.

하산이 더 어렵다던 등산애호가 YS가 하산준비도 못한 채 내리막에 몰려 레임덕의 수렁에서 임기를 끝낸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김대중의 레임덕 대응, 전위부대의 정권 재창출

김대중 대통령의 레임덕은 부패가 불러들였다. 2000년 진승현의 금융부정에서 시작해 이용호 최규선 정현준 등의 이른바 4대 게이트가 연달았다. 권력주변이 부패의혹으로 얼룩졌다. 아들들마저 스캔들에 휩싸였다.

2001년 4월 재.보선에서 DJ민주당은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못 냈다. 10월 보선에서도 참담한 패배는 되풀이됐다. 당이 술렁거렸다. 비선을 차단하라고 했다. 인적쇄신이라는 희한한 조어도 이 때 등장했다. 11월 8일 김 대통령은 민주당 총재직을 물러났다.

2002년 들어서면서 아들의 스캔들이 사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3월 셋째 홍걸이 구속됐다. 4월엔 둘째 홍업도 구속됐다. 대통령은 아들들의 스캔들과 관련해 무려 다섯 차례나 사죄하는 말을 했지만 구속은 피할 수 없었다. 김 대통령은 민주당은 끝났다는 아우성을 뒤로하고 02년 5월 민주당을 탈당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레임덕의 수렁은 아니었다. 우선 야당에 명예훼손이나 무고 같은 건 아랑곳 않는 이회창 돌격대가 없었다. 신문도 정권이 뽑아든 세무조사 등의 칼날 탓인지 한보사건 때 보였던 공격적인 보도평론이 없었다.

반면 DJ돌격대는 건재했다. 설훈 의원은 최규선 게이트에 이회창도 연결된 의혹이 있다고 대들었다. 송석찬 의원은 이회창 일가에 막말을 퍼붓는 저돌성을 발휘했다. 김대업이 이회창 아들들의 병역비리를 재탕하는 대업을 펼쳐주었다. 호남의 절대 지지도 흔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더 강하게 대통령의 편에 섰다.

권력은 부패로 망한다. 부패는 치명상이다. DJ는 부패의 수렁에 빠졌고 그게 때 이른 레임덕을 불렀다. 그러나 레임덕을 거뜬히 돌파했다. 호남의 조건 없는 절대 지지가 레임덕을 막아준 철벽이었다.

레임덕은 부패나 실정이 부른다. 국민의 지지가 있으면 레임덕은 안 온다. 그게 청와대가 남긴 경험의 진실이다.
이영석 교수신문고문/언론인

댓글이 1 개 있습니다.

  • 20 18
    오상희

    이영석기자는 지금 당장 반성하라!!
    이영석 기자님..
    지난번에 댓글을 남겼던 오상희입니다.
    오늘은 존칭,격식을 모두 던져 버리고 다시또 "쓴소리"한마디 하겠습니다.
    다음과 같은 표현은 사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DJ에 관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레임덕의 수렁은 아니었다.....신문도 정권이 뽑아든 세무조사 등의 칼날 탓인지 한보사건 때 보였던 공격적인 보도평론이 없었다......호남의 절대 지지도 흔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더 강하게 대통령의 편에 섰다......호남의 조건 없는 절대 지지가 레임덕을 막아준 철벽이었다........
    이기자는 예전부터 글을 쓸때 DJ에게 왠지 적대적입니다.
    신문에 공격적인 보도평론이 없었다고요?....
    지금 장난하나요?...이기자는 어느나라 사람입니까?..조선일보의 사설도 안 읽어봤나요?.조선일보는 예전부터 DJ를 차마 "빨갱이"라고 부르지는 못하고, 좌파,좌경세력으로 표현하면서 "색깔 공세"를 했던 신문입니다..세무조사 이후에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약해지지 않았지요...
    조선일보 사설을 읽어본 사람은 DJ에 대한 공격성을 느낍니다.
    이기자는 언론인이면서 그런것도 못느꼈나요?....
    지금 장난칩니까?
    세무조사는 권언유착을 끝장내버린 조치였습니다.
    DJ가 더이상 언론사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죠.
    그런데 무슨 뚱딴지 같이 공격보도가 없었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
    그리고, 동아일보가 세무조사 이후에 한나라당편에 섰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모두다 알고 있습니다..이영석기자만 모르는것 같네요..
    지금 장난치나요?
    그리고, 호남의 철벽지지??.....
    나원참...정치기자가 맞나요??
    2000년 국회의원 총선에서 호남에서는 무소속 국회의원이 4명이 당선됐지요
    강운태, 이정일, 박주선, 이강래..
    1997년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 호남표의 결집도가 떨어졌습니다.
    그 사실을 알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데
    무슨 "호남의 조건 없는 절대 지지가 레임덕을 막아준 철벽이었다"라는 표현을 썼나요?
    황당..황당..그 자체입니다.
    레임덕에 시달린 DJ는 장상(전 이화여대 총장), 장대환(매일경제 회장)을 국무총리로 임명했지만 과반수 의석을 가진 한나라당으로부터 거절당해서 결국은 김석수를 총리로 임명했지요.
    이영석 기자.!
    똑바로 글을 쓰세요..
    보아하니. YS를 친하고 DJ하고는 적대적인 사이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객관적인 사실까지도 왜곡시켜서 글을 쓰면 안됩니다.!
    그딴 식으로 쓸려면 차라리 직접 정치를 하세요.
    비겁하게 겉으로는 "공정"을 위장하고 실제로는 "편파"적인 글쓰기를 하지 마세요!
    계속 이런 식으로 쓸려면 아예 붓을 꺽으세요!!

↑ 맨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