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초산테러'와 '40대 기수론'
[옛날 정치 지금 정치] <6> 정치생명 노렸던 어느 테러 이야기
이번 테러에서 연상되는 비슷한 테러는 1969년 6월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를 겨냥했던 초산테러다. 김 총무의 상도동 자택은 좁은 골목을 거의 직각으로 꺾이는 골목길을 돌아 들어간다. 테러범은 그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김 총무가 탄 승용차가 골목을 도느라 거의 반 정지상태가 된 때 차 문을 열려고 했다. 두 명의 낯선 청년이었다. 차 문이 잠겨 있어 문이 열리지 않았고 운전기사가 위험을 깨닫고 자동차 속력을 냈다. 그러자 유리문을 향해 병을 던지고 도망쳤다. 자동차 칠이 불타 벗겨지는 손상을 입고 있었다. 초산이 든 병이었다. 차 문이 열렸다면 김 총무는 얼굴이 회복불능의 손상을 입었을 테러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은 승용차 문을 거의 잠그지 않는다. 그런데 김 총무는 반드시 잠근다.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에 가 있을 때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문은 반드시 잠가야 한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그는 이 배움 덕으로 치명적인 테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특별수사반이 편성되고 국회도 조사에 나섰지만 작은 단서 하나 잡지 못했다. 그러나 김 총무는 국회본회의에서 테러는 김형욱 정보부장이 지령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대체 무슨 연유였을까.
테러가 있기 몇 달 전으로 기억한다. 국회에서 취재 중인데 회사에서 급히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갔더니 편집국장이 엽서 하나를 내밀었다. 반공법 위반 피의 사실에 관해 조사할 것이 있으니 14시까지 남산 정보부로 나오라는 출두통지서였다. 뭐 짚이는 게 있느냐고 했다. 모르겠다고 했더니 내막을 알아볼 동안 잠시 피해 있겠느냐 아니면 나가겠느냐고 물었다. 난 나가겠다고 했다.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보부에 믿을만한 분이 있었다. 당시 국내 정치담당이던 조일재 과장이다. 신념이 있고 바른 자세를 지닌 분이었다. 후일 주일공사로 나가 친 김일성단체인 조총련의 모국방문을 실현시키기도 한 유능한 정보원이다. 내가 전화를 걸었다. 반공법 위반이라니 터무니없다고 말했더니 조 과장은 "알아보고 연락하겠다"고 했다. 10분쯤 지났을까 전화를 걸어왔다.
"김영삼과 관련해 물을 거다. 별일 아니다. 협조해주면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바로 짚이는 게 있었다.
정보부에 갔다. 어느 방에 안내했다. 한 요원이 다가오더니 당신 해설기사 정확하더라 운운하면서 담배를 권하고 나가버렸다. 담배를 피고 있는데 또 다른 요원 한 명이 들어오더니 여기가 휴게실인줄 아느냐며 발로 의자를 걷어찼다. 심문하기 전 겁주고 기죽이는 수법이다.
심문이 시작됐다. 김규남을 아느냐고 물었다. 간첩혐의로 체포된 의원이다. 모른다고 했더니 국회 담당기자가 국회의원도 모르느냐고 비아냥거렸다.
최근 3 개월 동안 만난 사람과 시간 그리고 대화내용을 쓰라고 했다. 나는 못쓴다고 우겼다. 내가 일일이 기억할 수 없다. 누구를 만나 무슨 얘기를 했느냐고 물으면 대답하겠지만 기억을 더듬어 몽땅 쓰라니 난 기억할 수 없다고 우겼다. 김영삼과 만나는 시간 대화 등도 꼬치꼬치 물었다. 그러나 심문은 계속 주변만 돌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건 나는 그들이 알려고 하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알려는 건 어느 날의 대화다.
기자의 아침은 취재원과의 전화로 시작된다. 그 날 아침 김 총무는 조선호텔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했다. 다른 기자 두 명도 나왔다. 조중동 기자다. 김규남 간첩사건으로 얘기가 옮았다. 내가 얘기했다.
김규남의 간첩혐의는 국회의원이 된 이후가 아니라 이전의 일이다. 공화당 전국구 의원은 공천 전 정보부에서 신원조사를 한다. 조사를 제대로 했다면 그때 알아냈을 일이다. 조사가 부실해 간첩을 국회의원이 되게 했다. 정보부장이 책임질 일이다.
김 총무가"그렇지"라며 동의했다. 국회로 자리를 옮겨 김형욱 정보부장 문책해임을 요구하는 성명을 냈다. 안보는 돌보지 않고 정치사찰이나 하는 K CIA의 실상이 드러난 사건이라고 몰았다. 각 신문에 3 내지 4단짜리 기사로 보도됐다.
김형욱 정보부장은 제 자리 지키기를 으뜸의 과제로 했다. 그의 자리를 넘보는 일은 용납하지 않았다.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정보부장 적임자로 손꼽히기라도 하면 장본인은 그 날로 상처를 입었다. 그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결의가 돼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권력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던 일이다. 야당 의원조차 그 부문은 건드리기를 겁냈다.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걸 건드린 것이다.
그는 조사를 했다. 그리고 어떤 기자가 충동질해서 김영삼 총무가 그런 성명을 내게 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 정보에서 맨 먼저 혐의자로 지목된 것이 중앙일보 이영석 기자다. 그래서 출두하라는 통지서를 보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불려가기 전 바로 이걸 조사하기 위해서라는 걸 알게 됐다. 조 과장이 준 힌트 덕이다. 뭘 알아내려는지 아는데 알게 할 바보는 없다. 밤을 새며 조사한 결과는 혐의 없다는 걸로 결론났다.
다음 차례가 조선일보 기자다. 불려간 기자는 그 날 조선호텔 커피숍에 함께 있던 기자가 아니다. 역시 허탕쳤다. 다음은 동아일보다. 아무튼 조중동 기자가 차례차례 불려갔다. 그리고 정보부가 내린 결론은 기자가 충동질했다는 정보가 잘못된 정보다. 김영삼이 스스로 판단해 성명을 낸 것이다. 대체 김영삼이가 왜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조사해 보라.김형욱의 판단이었다.
처음엔 잘 지내보자는 신호를 보냈다. 김 총무가 괄시 못할 사람을 중간에 넣어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런데 잘 지내기로 하는 협상이 진전되지 않았다. 다음 차례는 약점을 캐내는 조사다. 주변을 비롯해 샅샅이 조사했다. 이쯤이면 김 총무도 주변을 조여온다는 걸 안다. 너 정말 해보겠다는 거냐. 이런 메시지가 오갔다. 재미없다는 협박도 주고받았다. 너 배는 철판 깔았냐는 협박도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 조용해졌다. 불가근불가원 사이가 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초산테러가 일어났다. 김 총무가 테러는 김형욱 정보부장이 시킨 짓이라고 단언한 배경이다. 김 총무의 추측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심증을 갖게 한 둘의 사연이다.
김 총무는 이 사건으로 더 유명해지고 40대 기수를 선창할 만치 정치적으로 자랐다. 그렇지만 자칫했으면 정치생명이 끊어졌을 수도 있었다. 테러는 끔찍한 일이다. 그 시절 미수에 그친 이런 사건에도 국민은 하나같이 치를 떨었다.
그런데 박 대표 테러에선 상상할 수 없는 반응이 있었다. 노사모의 노혜경 대표는 비아냥거렸고 민족문학작가회의 손명호라는 인간은 "통콰이" 라고 환호했다. 정권에 의해 편 갈이가 심해졌다지만 어떻게 사회가 이토록 황폐해질 수 있는 것인가.
테러는 불시에 다가온다. 대비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무섭고 끔찍하다. 71년 대통령 선거 때의 일이다. 그 해 4월25일 박 대통령은 장춘단공원에서 대통령 후보로 갖는 마지막 연설을 했다. 당시는 연설이 운동의 중심이어서 수십만 청중이 모이는 대형 집회였다. 그 날 몰려든 청중들이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겠다고 다가서는 바람에 경호원이 짠 스크럼이 출렁거리고 청중이 쓰러지는 사고가 있었다. 연설을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온 대통령은 연설회는 참 위험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간첩이 수류탄이라도 터뜨리면 어떻게 되겠나. 야당집회에 테러해놓고 뒤집어씌우면 어떻게 하지. 유세는 정말 위험해"
박 대통령의 염려대로 유세는 위험하다. 그러나 선거가 있고 유세는 해야 한다. 요즘은 TV 토론 등으로 유세의 비중이 낮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유세는 안 할 수 없다. 그런데 유세 때 야당대표는 테러에 노출된다. 물론 경호를 한다. 그러나 대통령 경호 수준의 철저한 경호는 불가능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이지 테러가 두려운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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