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들의 가벼운 말과 역사적 진실
[옛날 정치 지금 정치] <5> 4․19, 5․18 항쟁의 진실
말의 수난시대다. 4.19, 5.18 그리고 평택사태에 대한 발언이 문제가 되자 당사자가 당장 백기를 들었다. 모두 군 출동과 관계된 발언이다.
1960년 4.19 때 시민들은 군 진입을 환영했다. 1980년 광주에선 시민이 저항했다. 2006년 국군은 평택에서 시위군중의 대막대기에 터지고 매맞아 쓰러졌다. 세상이 어떻게 변한 것인가. 발언은 무엇이 문제인가. 이런 문제에 다가가기 위해 그 때를 거슬러 가보자.
4.19는 갑자기 닥친 데모가 아니다. 여러 대학이 함께 데모하기로 했고 정부는 대비했다. 4월 18일 오후 홍진기 내무, 김용우 국방장관이 머리를 맞댔다. 홍 내무가 말했다.
"수도권 경찰을 총동원해도 경찰병력은 1천명이다. 어제 고대가 데모를 해서 오늘 데모에는 빠지겠지만 그래도 경찰병력의 3배 이상이다. 대학생 데모에 거리의 불량배들까지 합세할 것이다. 데모는 경찰이 숫자가 많아야 통제할 수 있다. 수에서 밀리면 통제불능이다. 군이 도와주어야겠다."
"계엄도 아닌데 군을 동원할 수 없다."
"그럼 경무대만이라도 군이 지켜주어야겠다."
"경무대도 안 된다. 대통령 관저니까 헌병 배치는 불법이 아니다. 6관구 헌병중대 병력은 내주겠다."
4월19일 데모대는 국회 의사당과 중앙청을 거쳐 경무대로 몰려왔다. 경찰은 바리게이트를 설치하고 일선은 경찰, 그 뒤를 헌병들이 지켜 서 있었다. 경찰은 학생대표의 대통령 면담을 주선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대학들은 그런 준비가 없었다. 대표를 논의하느라 지체되는 사이 데모대는 계속 불어났다. 경찰은 바리게이트를 넘으면 발포한다는 경고방송을 계속했다. 넘으려할 때는 최루탄을 발사해 막았다. 그런데 바람이 경찰 쪽으로 불었다. 그 때만 해도 경찰한테도 최루가스를 막아주는 마스크가 없었다. 경찰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러자 데모대가 바리게이트를 넘었고 발포했다.
그 시간 홍 내무와 김 국방이 대통령에게 보고를 마치고 나오고 있었다. "어 실포네" 김 국방이 말했고 홍 내무는 "실포라니?" 라고 물었다. 실포가 실탄사격의 준말이라는 걸 홍 내무는 그때 처음 알았다. 이게 4.19의 경무대 앞 발포다.
긴급국무회의를 열어 계엄령을 의결했다. 오후 2시30분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군대가 서울에 들어왔다. 시민들이 박수로 환영했다. 수 시간 전에 유혈데모가 있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시민들이 탱크에 올라가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후 발포경관을 색출하고 책임자를 문책하라는 여론이 빗발쳤다. 그렇지만 경무대 앞 발포는 발포명령이 없었다. 실탄을 지급한 것이 발포명령일 수 있었다. 헌병과 경찰 모두 실탄을 지급 받고 있었다. '대통령 관저가 유린될 수도 있는 비상사태인데 실탄으로 무장하는 건 당연하다. 대통령 관저가 유린되는데 발포하지 않는다면 그게 어디 경찰이고 경비병인가.' 그런 반론도 있었다. 그러나 대세에 밀려 이런 반론은 빛을 보지 못 했다.
그 날 발포는 헌병이 먼저였을지 모른다. 6관구사령관도 그 날 경무대에 있었다. 그러나 내무부는 발포를 군에 떠밀지 않았다. 경찰도 검찰도 재판부도 제6관구 사령관이나 헌병중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경무대경찰서 곽영주 경무관이 발포명령의 책임을 졌다.
4.19의 도화선이 된 것은 3.15 부정선거다. 당시 대통령은 민주당 조병옥 후보의 병몰로 경쟁 없는 단일후보였다. 부정은 부통령 선거에서 저질러졌다. 정권교체가 없는 선거라서 각 지역 경찰서장들이 득표경쟁을 했다. 이게 3.15부정선거다.
4.19 날 학생들의 구호는 "선거 다시 하라"는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물러가라는 외침은 없었다. 대통령 하야를 내건 건 4월 26일 교수데모가 처음이다. 그러나 데모대가 경무대에 도착하기 전에 대통령 하야성명이 방송됐다.
새로 내각을 짜기로 한 허정이 38시간동안 연락을 끊었다. 야당인 민주당 소속 장면 부통령이 부통령을 사퇴했다. 대통령이 하야할 때 정권인수는 야당이 하지 않는다는 간접성명이다. 그런 조치와 함께 대통령 하야권고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4월26일 동시에 일어난 사태들이다. 대통령은 이런 움직임에서 정부에 최후통첩 성격의 각서를 보낸 미국의 손길을 확인했다. 그리고 하야성명을 냈다. 이게 4.19의 진실이다.
열린우리당 이원영 의원은 평택사태와 관련한 방송대담에서 평택 미군기지이전 반대 시위와 5.18 광주의 군 투입은 성격이 다르다. 광주는 질서유지 목적으로 투입된 것이고 평택은 군사시설 보호를 위해 군이 들어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말을 문제삼았다.
민주당은 "군사쿠데타 세력의 5.18학살을 정당화한 망언"이라며 의원직에서 물러나라고 했다. 당사자인 이 의원도 5월 14일 광주에 가서 "숭고한 목숨을 바친 민주영령과 광주시민에게 제 경솔한 발언을 사죄한다"고 했다. 이 의원 발언의 어느 대목이 문제인가.
80년을 서울의 봄이라고 했다. 국회에선 유신헌법 개정이 논의되고 있었다. 김대중씨도 사면 복권돼 정치에 복귀했다. 그러나 정국은 한치 앞이 안 보이는 안개정국이기도 했다. 박 대통령의 잔여임기를 맡게된 최규하 대통령이 평통의 투표로 대행 꼬리를 떼고 대통령을 맡았지만 정치적으로 무력했다. 실권은 계엄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군부는 3김을 불신했다. 특히 김대중씨를 거부했다.
79년 11월 하순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말했다. "참모총장이 되니까 김대중에 대한 기록을 보내주었다. 세 개였는데 그 중 하나가 좌익관련 기록이었다. 그의 경력은 장교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장교가 될 수 없는 사람이 국군통수권자가 될 수 없는 것 아닌가."
78년의 12.12로 군을 장악한 신군부도 마찬가지였다. "좌익활동을 했고 일본에선 한민통과 함께 활동했다. 미국에선 자신의 통일론은 북의 연방제와 같다고 했다. 대중경제론은 대기업 불신 등 혁명적인 방법을 담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 국군통수권은 안 된다"고 말했다. 오프 레코드여서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군부 비토설'로 널리 떠돌았다.
5월17일 낮엔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서울 거리를 덮었다. 저년 7시 비상게엄이 선포됐다.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도 금지하는 포고령도 발동했다. 계엄군은 한밤에 김대중씨를 연행했다.
5월18일 광주에서 데모가 일어났다. 데모가 격렬해지고 경찰력이 밀리자 군이 투입됐다. 데모대는 더 강하게 저항했다.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내 저항하기까지 했다. 왜 광주는 군에 적의를 드러냈을까. 김대중씨는 광주의 희망이었다. 그 희망을 계엄령과 계엄군이 앗아갔다. 그게 80년의 광주다.
4.19도 5.18도 과거의 역사다. 하나의 사건에는 무수한 요인이 있다. 그리고 이젠 4.19에서 벗어나야 한다. 80년대도 넘어서야 한다. 지금은 앞을 보고 가야할 시간이다.
1960년 4.19 때 시민들은 군 진입을 환영했다. 1980년 광주에선 시민이 저항했다. 2006년 국군은 평택에서 시위군중의 대막대기에 터지고 매맞아 쓰러졌다. 세상이 어떻게 변한 것인가. 발언은 무엇이 문제인가. 이런 문제에 다가가기 위해 그 때를 거슬러 가보자.
4.19는 갑자기 닥친 데모가 아니다. 여러 대학이 함께 데모하기로 했고 정부는 대비했다. 4월 18일 오후 홍진기 내무, 김용우 국방장관이 머리를 맞댔다. 홍 내무가 말했다.
"수도권 경찰을 총동원해도 경찰병력은 1천명이다. 어제 고대가 데모를 해서 오늘 데모에는 빠지겠지만 그래도 경찰병력의 3배 이상이다. 대학생 데모에 거리의 불량배들까지 합세할 것이다. 데모는 경찰이 숫자가 많아야 통제할 수 있다. 수에서 밀리면 통제불능이다. 군이 도와주어야겠다."
"계엄도 아닌데 군을 동원할 수 없다."
"그럼 경무대만이라도 군이 지켜주어야겠다."
"경무대도 안 된다. 대통령 관저니까 헌병 배치는 불법이 아니다. 6관구 헌병중대 병력은 내주겠다."
4월19일 데모대는 국회 의사당과 중앙청을 거쳐 경무대로 몰려왔다. 경찰은 바리게이트를 설치하고 일선은 경찰, 그 뒤를 헌병들이 지켜 서 있었다. 경찰은 학생대표의 대통령 면담을 주선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대학들은 그런 준비가 없었다. 대표를 논의하느라 지체되는 사이 데모대는 계속 불어났다. 경찰은 바리게이트를 넘으면 발포한다는 경고방송을 계속했다. 넘으려할 때는 최루탄을 발사해 막았다. 그런데 바람이 경찰 쪽으로 불었다. 그 때만 해도 경찰한테도 최루가스를 막아주는 마스크가 없었다. 경찰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러자 데모대가 바리게이트를 넘었고 발포했다.
그 시간 홍 내무와 김 국방이 대통령에게 보고를 마치고 나오고 있었다. "어 실포네" 김 국방이 말했고 홍 내무는 "실포라니?" 라고 물었다. 실포가 실탄사격의 준말이라는 걸 홍 내무는 그때 처음 알았다. 이게 4.19의 경무대 앞 발포다.
긴급국무회의를 열어 계엄령을 의결했다. 오후 2시30분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군대가 서울에 들어왔다. 시민들이 박수로 환영했다. 수 시간 전에 유혈데모가 있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시민들이 탱크에 올라가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후 발포경관을 색출하고 책임자를 문책하라는 여론이 빗발쳤다. 그렇지만 경무대 앞 발포는 발포명령이 없었다. 실탄을 지급한 것이 발포명령일 수 있었다. 헌병과 경찰 모두 실탄을 지급 받고 있었다. '대통령 관저가 유린될 수도 있는 비상사태인데 실탄으로 무장하는 건 당연하다. 대통령 관저가 유린되는데 발포하지 않는다면 그게 어디 경찰이고 경비병인가.' 그런 반론도 있었다. 그러나 대세에 밀려 이런 반론은 빛을 보지 못 했다.
그 날 발포는 헌병이 먼저였을지 모른다. 6관구사령관도 그 날 경무대에 있었다. 그러나 내무부는 발포를 군에 떠밀지 않았다. 경찰도 검찰도 재판부도 제6관구 사령관이나 헌병중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경무대경찰서 곽영주 경무관이 발포명령의 책임을 졌다.
4.19의 도화선이 된 것은 3.15 부정선거다. 당시 대통령은 민주당 조병옥 후보의 병몰로 경쟁 없는 단일후보였다. 부정은 부통령 선거에서 저질러졌다. 정권교체가 없는 선거라서 각 지역 경찰서장들이 득표경쟁을 했다. 이게 3.15부정선거다.
4.19 날 학생들의 구호는 "선거 다시 하라"는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물러가라는 외침은 없었다. 대통령 하야를 내건 건 4월 26일 교수데모가 처음이다. 그러나 데모대가 경무대에 도착하기 전에 대통령 하야성명이 방송됐다.
새로 내각을 짜기로 한 허정이 38시간동안 연락을 끊었다. 야당인 민주당 소속 장면 부통령이 부통령을 사퇴했다. 대통령이 하야할 때 정권인수는 야당이 하지 않는다는 간접성명이다. 그런 조치와 함께 대통령 하야권고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4월26일 동시에 일어난 사태들이다. 대통령은 이런 움직임에서 정부에 최후통첩 성격의 각서를 보낸 미국의 손길을 확인했다. 그리고 하야성명을 냈다. 이게 4.19의 진실이다.
열린우리당 이원영 의원은 평택사태와 관련한 방송대담에서 평택 미군기지이전 반대 시위와 5.18 광주의 군 투입은 성격이 다르다. 광주는 질서유지 목적으로 투입된 것이고 평택은 군사시설 보호를 위해 군이 들어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말을 문제삼았다.
민주당은 "군사쿠데타 세력의 5.18학살을 정당화한 망언"이라며 의원직에서 물러나라고 했다. 당사자인 이 의원도 5월 14일 광주에 가서 "숭고한 목숨을 바친 민주영령과 광주시민에게 제 경솔한 발언을 사죄한다"고 했다. 이 의원 발언의 어느 대목이 문제인가.
80년을 서울의 봄이라고 했다. 국회에선 유신헌법 개정이 논의되고 있었다. 김대중씨도 사면 복권돼 정치에 복귀했다. 그러나 정국은 한치 앞이 안 보이는 안개정국이기도 했다. 박 대통령의 잔여임기를 맡게된 최규하 대통령이 평통의 투표로 대행 꼬리를 떼고 대통령을 맡았지만 정치적으로 무력했다. 실권은 계엄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군부는 3김을 불신했다. 특히 김대중씨를 거부했다.
79년 11월 하순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말했다. "참모총장이 되니까 김대중에 대한 기록을 보내주었다. 세 개였는데 그 중 하나가 좌익관련 기록이었다. 그의 경력은 장교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장교가 될 수 없는 사람이 국군통수권자가 될 수 없는 것 아닌가."
78년의 12.12로 군을 장악한 신군부도 마찬가지였다. "좌익활동을 했고 일본에선 한민통과 함께 활동했다. 미국에선 자신의 통일론은 북의 연방제와 같다고 했다. 대중경제론은 대기업 불신 등 혁명적인 방법을 담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 국군통수권은 안 된다"고 말했다. 오프 레코드여서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군부 비토설'로 널리 떠돌았다.
5월17일 낮엔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서울 거리를 덮었다. 저년 7시 비상게엄이 선포됐다.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도 금지하는 포고령도 발동했다. 계엄군은 한밤에 김대중씨를 연행했다.
5월18일 광주에서 데모가 일어났다. 데모가 격렬해지고 경찰력이 밀리자 군이 투입됐다. 데모대는 더 강하게 저항했다.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내 저항하기까지 했다. 왜 광주는 군에 적의를 드러냈을까. 김대중씨는 광주의 희망이었다. 그 희망을 계엄령과 계엄군이 앗아갔다. 그게 80년의 광주다.
4.19도 5.18도 과거의 역사다. 하나의 사건에는 무수한 요인이 있다. 그리고 이젠 4.19에서 벗어나야 한다. 80년대도 넘어서야 한다. 지금은 앞을 보고 가야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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