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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정 도박대책은 근시안적인 미봉책"

3백여 시민단체들 "사회전반에 만연한 도박산업 관리해야"

“피해 증언에 앞서서 책임 있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그분들은 서민들이 오락을 통해 하루에 몇백만원씩 잃고 빈털터리가 되는 것을 원하는 가. 한번 동네 성인오락실을 가봐라. 남녀노소 없이 가정주부나 연령층 높은 분들이 밤을 새가면서 오락하다 빈털터리에 가정파탄, 신용불량자로 전락해 자살까지 하고 있다.”

도박게임장에 빠져 자신의 사업과 가정을 모두 잃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강씨(45)는 분통을 터뜨렸다. 경품권의 환전을 교묘히 이용한 도박게임장이 성행하면서 자신과 같은 피해자들이 속출하고 있지만 정부가 이를 사실상 방치해온 데 따른 분노였다.

평범한 자영업자였던 40대 가장 강씨는 ‘돈 1~2만원이면 가볍게 즐길 수 있다’는 지인의 권유로 도박게임장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출입 횟수가 잦아들수록 잃는 돈은 불어났고 결국 불과 10개월만에 가진 돈 모두를 탕진했다. 아내와는 이혼했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강씨는 얼마 전 자살까지 시도했다. 강씨는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고 말하며 고개를 떨궜다.

정부가 국가미래산업으로 게임산업을 집중 육성하는 사이 독버섯처럼 도박게임장이 성행하고 있다. 허가제가 아닌 등록제라는 간편한 개장 기준은 동네 단위로 게임장을 확산시켰고 그 결과 한국의 도박중독자 비율은 이미 도박을 법적으로 허가하는 캐나다, 호주에 4배에 달할 정도다.

시민단체 “사행성 도박산업,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

경실련,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참여연대 등 3백개 시민.사회.종교단체로 구성된 ‘도박산업규제및개선을위한전국네트워크(도박규제네트워크)’는 2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안국동 달개비(구 느티나무 카페)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도박게임장의 본질적인 근절대책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날 피해자 증언에 나선 강모씨는 한편으론 게임중독에 후회하면서도 여전히 자신과 같은 피해자를 속출시키고 있는 정부의 방치에 분통을 터뜨렸다.ⓒ뷰스앤뉴스


이들 단체는 “문광부가 장관 고시로 상품권을 경품에 포함시킨 것이 ‘바다이야기’ 등 상품권을 이용한 게임 개발과 유사도박장 개설을 유도한 것”이라며 “검경의 일회적인 단속이나 정부의 행정 고시가 아닌 특례법을 통해 도박게임 자체를 근본적으로 뿌리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날 기자회견에 앞서 당정이 발표한 ‘사행성 게임장 근절 대책’을 “근시안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다”며 “도박게임을 ‘사행행위등규제및처벌특례법’에 포함시켜 게임업체의 로비를 막기 위해 게임물등급위원회에 비영리민간단체 관계자가 50% 이상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이들은 “도박게임장 뿐만 아니라 경륜, 경마의 장외발매소 등 사회 전반에 만연한 도박산업을 관리감독하고 통제하기 위해 국무총리실 산하에 ‘사행산업통합감독관리위원회’를 신설하라”고 촉구했다.

당정은 이날 경품용 상품권 제도를 폐지하고 사행성 게임장에 대한 등록제를 허가제로 전환하며 신고포상금제를 도입하는 근절대책을 골자로 한 ‘게임산업진흥에관한법률(게임진흥산업법)’를 9월 안에 입법예고한다고 밝혔다.

만연된 도박게임장으로 인한 피해자가 속출하고 시민사회단체들의 비난이 거세지자 뒤늦게 내놓은 ‘사후약방문’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도박공화국’을 부추기고 있는 사행성 도박산업에 대한 본질적인 대책은 아니라는 반발이 시민단체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정부가 허용한 상품권 제도, 도박게임장 성행 부추겨

‘바다이야기’, ‘황금성’, ‘야마토’. [2006 대한민국 게임산업백서]에서 공개한 한국 전체 이용 게임 1위부터 3위까지의 명단이다. 당정협의를 통해 이번에 퇴출된 이 게임들은 발행된 경품권을 환전하는 형식으로 현금이 오가는 사실상의 사행성 도박게임이지만 국내 법 제도의 허점을 틈타 전국 곳곳에서 횡행해왔다.

이들 일명 성인오락실로 불리우는 도박게임장은 2005년 기준으로 1만3천5백10개, 총 매출액은 3조 7천9백66억원에 달한다. 이는 전체 게임장의 89.5%에 달하고 총 매출액 규모는 온라인게임, PC방 등 전체 게임시장 중 43.7%로 절반 가까운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도박게임장의 이용 연령대도 30대 이상이 81.7%를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40대가 38.4%로 가장 높은 비중을 보여 최근 게임중독으로 인한 가정파탄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

사행성 게임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1년. 당시 문화관광부가 장관고시를 통해 상품권을 경품에 포함시키면서 이에 따른 게임 개발이 이뤄졌다.

문광부는 2002년 2월 9일 유가증권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한 ‘음반.비디오물및게임물에관한법률(음비법)’을 장관 고시로 개정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환전 가능한’ 유가증권인 상품권을 경품에 포함시켰다.

이후 모든 게임장에서 상품권을 현금으로 환전하기 시작했고 관련업체에 따르면 이에 따른 거래액은 연간 1백40조원을 웃돌게 됐다.

문광부는 이 문제를 현행 게임산업진흥법의 개정을 통해 해결하려했지만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초당 배팅과 시간당 배당을 조정’하는 기술적인 규제에 머물렀다.

사실상의 현금 거래를 허용하면서 기계조작을 통해 배팅과 배당률을 조절하겠다는 정부의 대책은 상품권의 거래 액수만을 올려놓았을 뿐 증가하는 도박게임장을 제어하지 못했다.

특히 최근에는 조직폭력배의 유착관계가 폭로될 만큼 이미 도박게임장은 지하 경제에 막대한 이득을 안겨주고 서민층의 피해를 확산시켰다.

이날 발표한 당정 대책 또한 기존의 도박게임장 퇴출과 검경의 집중단속, 상품권 폐지 등의 다양한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시민사회단체들은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도박게임장은 사행성 도박산업의 한 형태일 뿐 장기적으로 도박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지 않는 한 제2, 3의 새로운 유형의 도박게임이 등장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3백개 시민.사회.종교단체로 구성된 '도박사업규제네트워크'는 27일 기자회견을 통해 도박산업 전반에 대한 통합관리시스템 구축을 촉구했다.ⓒ뷰스앤뉴스


김남근 참여연대 부집행위원장(변호사)은 “당정이 뒤늦게 정책조율을 통해 상품권 폐지를 발표하고 이를 고시로 운영한다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정부관료 몇몇이 지침을 바꿔 내놓은 대책을 누가 신뢰할 수 있겠냐”며 사회적 합의 절차를 외면하는 정부의 대책에 불신을 드러냈다.

“도박 부추기는 정부, 근시안적인 미봉책으로는 안된다”

김 부위원장은 “도박산업이 이번에 문제가 된 성인게임장 뿐만 아니라 경마나 경륜의 장외발매소 형태로 전국 각지로 확산되고 그만큼 도박피해자도 확산되는 실정”이라며 “가장 큰 문제는 정부가 경쟁적으로 도박산업 육성 중심 정책을 내놓고 이를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정책적으로 사행성 도박산업을 육성해 서민들 등골을 다 빼먹고 이제 와서 사후약방문식 대책을 내놓을 것 아니라 경마, 경륜, 카지노 등 산재한 도박산업을 통합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며 거듭 국무총리 산하 사행산업통합관리위원회 설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국레저연구소의 ‘2005년 사행산업 현황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공공복리나 관광진흥을 목적으로 허가된 합법 도박장은 경마장, 경륜장, 경정장, 카지노를 포함해 총 67개소에 달한다.

하지만 경마장, 경륜장의 장외발매소가 48개소(경마장-32개, 경륜장-16개)로 전체 매출의 70~80%를 차지하면서 전국을 경마장, 경륜장화하고 있다.

특히 이 같은 도박산업의 시행부처가 경마(농림부/한국마사회), 경륜.경정(문화관광부/국민체육진흥공단), 카지노(문화관광부), 복권(국무총리 산하 10개 정부부처)로 난립하면서 정부가 경쟁적으로 국민들의 사행심 조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비난이 거세지고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서면을 통해 남편의 게임중독으로 인한 가정파탄을 증언한 30대 주부 김모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중독의 나라다. 내 집 문만 열고 100m도 채 안가서 ‘스크린 경마장’, ‘PC방’, ‘성인오락실’, ‘노래빠’, ‘단란주점’, 그 밖에도 불건전하고 사행성이 강해 젊은 사람들의 사고를 마비시키고, 가정을 파탄내는 시설들이 즐비하다. 눈 앞에 쾌락을 던져주는 시설에 한번쯤 눈을 돌리지 않는 젊은이들이 있을까? 술 한잔이 한 병으로, 한 병이 깊은 중독으로 빠지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정부가 기금조성을 목적으로 앞다퉈 도박산업에 뛰어들고 있는 현실 속에서 사행성 도박장 근절을 위해 내놓은 대책을 시민사회가 불신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최병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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