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40대기수론', 2006년 '세대교체론'
[옛날 정치 지금 정치] <2> 세대교체 바람의 파괴력
오세훈의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쟁취는 바람의 승리다. 이 바람은 세대교체 바람으로 이어질 움직임이다.
세대교체, 이건 1970년대 야당가에 불었던 세대교체 바람과 닮은꼴이다.
70년대 세대교체 바람은 갑자기 닥쳤다. 그 때의 40대는 준비가 없었다. 그런데도 야당을 두 동강냈다. 2006년 세대교체는 준비된 바람이다. 한나라당 풍향은 그래서 관심거리다.
오세훈의 승리는 깨끗하다는 이미지가 만들었다고 했다. 이런 이미지를 불러온 오세훈 정치의 하나는 2004년 총선거를 앞두고 던진 5․6공 출신들에 대한 퇴진 요구다. 5․6공 퇴진은 열린우리당, 일부 시민단체 거기다 한나라당 소장파까지 가세한 쟁점이었다. 뒤따라간 것이지만 돋보인 것은 "나도 물러나겠다. 당신들도 물러나라"는 불출마선언이었다. 오세훈 의원은 17대 국회의원 불출마로 시민들의 기억 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문제는 그 5․6공 퇴진 요구가 여전히 불씨로 살아있고 때가 오면 불길이 되어 한나라당을 불태울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5․6공 퇴진 요구의 진원지는 노무현 대통령 진영의 '인적청산' 주장이었다. 이 테마를 한나라당에 직수입한 것은 이부영 그룹이었다.
"개혁은 인적청산이 출발이다. 당의 이미지를 수구적 패거리로 만든 수구기득권 세력은 물러가라. 5․6공이 주도하는 이상 호남인과 386은 한나라당을 거부할 것이다." 이부영 그룹 5인의 주장이다.
이들은 문제만 던져놓고 한나라당을 떠나 열린우리당 창당에 합류했다. 인적청산은 남경필 원희룡 등 소장파들의 모임인 미래연대가 이어갔다. 총선 전 미래연대는 5․6공은 물러나라. 60세 이상은 물러나라고 했다. 오세훈 의원도 여기 가세한 것이다.
구 정치인 퇴진은 시민단체 일부도 가세한 세 몰이였다. 노장층의 자진사퇴, 그리고 공천과 선거에서 교체바람이 불었다. 그 결과 2004년 총선거로 구성된 17대 국회는 초선이 절반을 넘겼다. 한나라당도 초선 의원이 절반을 차지했다. 혁명이라고 할 만한 물갈이였다. 그러나 인적청산은 끝난 것이 아니다. 열린우리당은 한국의 주류교체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한나라당에서도 소장파들은 인적청산을 인적쇄신으로 바꿔 계속 밀어붙이고 있다.
70년대 야당은 단지 세대교체였지만 폭풍이 됐다. 지금 한나라당의 세대교체는 노선에서도 대립해 있다. 잠시 70년대 세대교체 폭풍을 보자.
70년대 야당의 세대교체란 대통령 예비후보였던 유진오 총재가 병마에 쓰러지면서 일어난 돌발사태다. 당권은 유진산 부총재가 총재를 맡아 정상화했다. 문제는 대통령 후보였다. 유 총재는 정적의 공격으로 입게된 상처투성이 이미지가 장애였다.
"유 총재론 안 된다"면서 김영삼 원내총무가 대통령 후보 경쟁에 나섰다. 김대중 이철승씨도 나섰다. 신문들은 "40대 기수"라고 했다. 유 총재는 "구상유치"라고 했다. 다른 많은 중진들도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질서를 깨는 혼란"이라고 했다.
그런데 유 총재는 40대 기수를 받아들여 김대중씨를 후보로 선택했다. 이길 수 없는 선거로 본 데 따른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 선택이 세대교체 바람이 됐다.
당시는 대통령선거 후 곧바로 국회의원 선거를 했다. 김대중 후보는 국회의원 선거 후 실시되는 전당대회를 준비했다. 당수와 후보의 당권 경쟁은 국회의원 후보공천에서 충돌했다.
국회의원 후보 등록 마감 날 저녁 한 무리의 청년들이 유진산 총재 집에 난입했다. 전국구 등의 공천에 부정이 있었다면서 총재직 사퇴를 강요했다. 김대중씨는 대통령 후보 중심으로 구성된 선거대책기구를 통해 총재유고 사태로 규정하고 총재권한대행을 맡고 나섰다. 당은 삽시간에 혼란에 빠졌다.
결국 유 총재가 사퇴하고 김홍일 전당대회 의장을 총재권한대행으로 하는 선에서 사태를 봉합했다. 71년 일어난 신민당 전국구파동이다.
선거 후 전당대회에서 유진산씨는 김홍일 대행을 총재로 밀어 김대중씨의 당권진입을 막았다. 그리고 1년 후 전당대회에서 총재직에 복귀하려 했다. 김대중씨가 절대불가를 선언하고 나섰다.
유진산씨는 대회를 강행, 총재직에 복귀했다. 김대중씨는 이 대회를 불법대회로 규정하고 김홍일 총재와 합동해 별도 전당대회를 열어 김홍일 총재의 임기연장을 결의했다. 한 정당에 두 총재가 탄생한 사실상의 분당사태였다.
야당의 분당사태는 정당활동을 정지시킨 유신체제 선포로 종결됐다. 기능이 마비된 야당은 유신체제에 단 한마디 반대투쟁도 못하고 주저앉았다. 김대중씨는 망명했고 세대교체 바람은 첫 고비에선 장유유서를 넘지 못했다.
지금 한나라당의 세대교체는 단순히 세대교체가 아니다. 노선에서도 갈린다. 노선차이는 2004년 여당이 추진한 사학법 등 4개 법안에서도 드러났다.
주류는 4개 입법을 '대한민국 주류교체'라는 인적청산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노 정권이 말하는 주류란 반공보수우파를 가리킨다. 우파타도를 내건 좌파정권이다." 주류 쪽의 시국인식이다.
소장파는 다르다. 노 정권을 좌파정권으로 보는 주류를 보수강경파로 규정하면서, 보수 강경파와 같이 가면 당도 죽고 우리도 죽는다고 주장한다.
"색깔론이나 무책임한 폭로는 유통기간이 지나 국민들은 더 이상 쳐다보지 않는다. 열린우리당을 좌파로 보는 버릇을 고쳐야 한다." (원희룡 의원)
"한나라당을 유통기한 지난 정당으로 만드는 분들은 당에서 떠나야 한다."(남경필 의원)
"냉전세력들은 5명이든 몇 명이 되든 모여서 반공민주주의정당 하라."(고진화 의원)
소장파의 주장이다.
지난 2월 국회에서 여당이 사학법을 단독으로 처리한 뒤 야당이 거리투쟁에 나서있던 때다. 원희룡 의원은 "박근혜 대표는 편협한 국가정체성 이념에 비춰 자기 틀에 안 맞으면 전부 빨갱이로 본다. 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원 의원도 자리한 당 간부회의에서 이 발언을 문제삼았다. 그러면서 "원 의원은 거의 모든 문제에서 열우당을 대변해 왔다"고 말했다.
소장파는 최병렬 박근혜 대표체제에서 초기 한동안만 주류로 머물다 비주류로 돌아섰다. 계단을 오르는 소장파의 당권투쟁이다. 오세훈의 서울시장 후보 진입은 소장파의 3단계 걸음, 이제는 당권쟁취에 첫발을 내디뎠다는 풀이다.
이런 풀이는 오세훈의 서울시장 후보 승리가 소장파의 준비된 프로그램이라는 데 근거한다. 2004년 오세훈의 불출마를 두고 소장파들의 서울시장 준비라는 말이 있었다.
변호사로 돌아간 오세훈씨는 철인3종경기에도 나가고 수필집도 내는 등 쉬지 않고 정계복귀를 위한 '이미지 업'을 해왔다. 그리고 올 정초 서울시장 예비후보 여론조사를 해봤다. 결과는 맹형규 예비후보에 약간 뒤졌다. 이걸 역전시킨 것이 강금실 바람이다. 맹․ 홍 두 예비후보가 강금실 예비후보에게 뒤진다는 여론조사가 나오자 소장파가 오세훈 카드를 내밀었다. 여론조사에서 오세훈은 강금실을 이긴다는 것으로 나왔다. 이 여론조사가 오세훈 승리를 선물했다.
"오세훈의 서울시장 후보 승리는 오세훈과 소장파, 강금실 3자 합작품이다. 지방선거 후 실시되는 7월 전당대회에서 소장파는 당권을 차지하겠다고 나설 것이다. 소장파가 당권을 잡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인적쇄신의 종점이다. 소장파의 한나라당은 주류교체를 함께 외치는 친여 정당으로 바뀔 것이다. 보수우파가 한나라당에 머물 수 있을까." 한나라당 안의 뒷공론이다.
지방선거 후 여․야당의 당 정비가 정계가 요동치는 태풍이 될지 모른다는 얘기는 그래서 나온다.
세대교체, 이건 1970년대 야당가에 불었던 세대교체 바람과 닮은꼴이다.
70년대 세대교체 바람은 갑자기 닥쳤다. 그 때의 40대는 준비가 없었다. 그런데도 야당을 두 동강냈다. 2006년 세대교체는 준비된 바람이다. 한나라당 풍향은 그래서 관심거리다.
오세훈의 승리는 깨끗하다는 이미지가 만들었다고 했다. 이런 이미지를 불러온 오세훈 정치의 하나는 2004년 총선거를 앞두고 던진 5․6공 출신들에 대한 퇴진 요구다. 5․6공 퇴진은 열린우리당, 일부 시민단체 거기다 한나라당 소장파까지 가세한 쟁점이었다. 뒤따라간 것이지만 돋보인 것은 "나도 물러나겠다. 당신들도 물러나라"는 불출마선언이었다. 오세훈 의원은 17대 국회의원 불출마로 시민들의 기억 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문제는 그 5․6공 퇴진 요구가 여전히 불씨로 살아있고 때가 오면 불길이 되어 한나라당을 불태울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5․6공 퇴진 요구의 진원지는 노무현 대통령 진영의 '인적청산' 주장이었다. 이 테마를 한나라당에 직수입한 것은 이부영 그룹이었다.
"개혁은 인적청산이 출발이다. 당의 이미지를 수구적 패거리로 만든 수구기득권 세력은 물러가라. 5․6공이 주도하는 이상 호남인과 386은 한나라당을 거부할 것이다." 이부영 그룹 5인의 주장이다.
이들은 문제만 던져놓고 한나라당을 떠나 열린우리당 창당에 합류했다. 인적청산은 남경필 원희룡 등 소장파들의 모임인 미래연대가 이어갔다. 총선 전 미래연대는 5․6공은 물러나라. 60세 이상은 물러나라고 했다. 오세훈 의원도 여기 가세한 것이다.
구 정치인 퇴진은 시민단체 일부도 가세한 세 몰이였다. 노장층의 자진사퇴, 그리고 공천과 선거에서 교체바람이 불었다. 그 결과 2004년 총선거로 구성된 17대 국회는 초선이 절반을 넘겼다. 한나라당도 초선 의원이 절반을 차지했다. 혁명이라고 할 만한 물갈이였다. 그러나 인적청산은 끝난 것이 아니다. 열린우리당은 한국의 주류교체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한나라당에서도 소장파들은 인적청산을 인적쇄신으로 바꿔 계속 밀어붙이고 있다.
70년대 야당은 단지 세대교체였지만 폭풍이 됐다. 지금 한나라당의 세대교체는 노선에서도 대립해 있다. 잠시 70년대 세대교체 폭풍을 보자.
70년대 야당의 세대교체란 대통령 예비후보였던 유진오 총재가 병마에 쓰러지면서 일어난 돌발사태다. 당권은 유진산 부총재가 총재를 맡아 정상화했다. 문제는 대통령 후보였다. 유 총재는 정적의 공격으로 입게된 상처투성이 이미지가 장애였다.
"유 총재론 안 된다"면서 김영삼 원내총무가 대통령 후보 경쟁에 나섰다. 김대중 이철승씨도 나섰다. 신문들은 "40대 기수"라고 했다. 유 총재는 "구상유치"라고 했다. 다른 많은 중진들도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질서를 깨는 혼란"이라고 했다.
그런데 유 총재는 40대 기수를 받아들여 김대중씨를 후보로 선택했다. 이길 수 없는 선거로 본 데 따른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 선택이 세대교체 바람이 됐다.
당시는 대통령선거 후 곧바로 국회의원 선거를 했다. 김대중 후보는 국회의원 선거 후 실시되는 전당대회를 준비했다. 당수와 후보의 당권 경쟁은 국회의원 후보공천에서 충돌했다.
국회의원 후보 등록 마감 날 저녁 한 무리의 청년들이 유진산 총재 집에 난입했다. 전국구 등의 공천에 부정이 있었다면서 총재직 사퇴를 강요했다. 김대중씨는 대통령 후보 중심으로 구성된 선거대책기구를 통해 총재유고 사태로 규정하고 총재권한대행을 맡고 나섰다. 당은 삽시간에 혼란에 빠졌다.
결국 유 총재가 사퇴하고 김홍일 전당대회 의장을 총재권한대행으로 하는 선에서 사태를 봉합했다. 71년 일어난 신민당 전국구파동이다.
선거 후 전당대회에서 유진산씨는 김홍일 대행을 총재로 밀어 김대중씨의 당권진입을 막았다. 그리고 1년 후 전당대회에서 총재직에 복귀하려 했다. 김대중씨가 절대불가를 선언하고 나섰다.
유진산씨는 대회를 강행, 총재직에 복귀했다. 김대중씨는 이 대회를 불법대회로 규정하고 김홍일 총재와 합동해 별도 전당대회를 열어 김홍일 총재의 임기연장을 결의했다. 한 정당에 두 총재가 탄생한 사실상의 분당사태였다.
야당의 분당사태는 정당활동을 정지시킨 유신체제 선포로 종결됐다. 기능이 마비된 야당은 유신체제에 단 한마디 반대투쟁도 못하고 주저앉았다. 김대중씨는 망명했고 세대교체 바람은 첫 고비에선 장유유서를 넘지 못했다.
지금 한나라당의 세대교체는 단순히 세대교체가 아니다. 노선에서도 갈린다. 노선차이는 2004년 여당이 추진한 사학법 등 4개 법안에서도 드러났다.
주류는 4개 입법을 '대한민국 주류교체'라는 인적청산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노 정권이 말하는 주류란 반공보수우파를 가리킨다. 우파타도를 내건 좌파정권이다." 주류 쪽의 시국인식이다.
소장파는 다르다. 노 정권을 좌파정권으로 보는 주류를 보수강경파로 규정하면서, 보수 강경파와 같이 가면 당도 죽고 우리도 죽는다고 주장한다.
"색깔론이나 무책임한 폭로는 유통기간이 지나 국민들은 더 이상 쳐다보지 않는다. 열린우리당을 좌파로 보는 버릇을 고쳐야 한다." (원희룡 의원)
"한나라당을 유통기한 지난 정당으로 만드는 분들은 당에서 떠나야 한다."(남경필 의원)
"냉전세력들은 5명이든 몇 명이 되든 모여서 반공민주주의정당 하라."(고진화 의원)
소장파의 주장이다.
지난 2월 국회에서 여당이 사학법을 단독으로 처리한 뒤 야당이 거리투쟁에 나서있던 때다. 원희룡 의원은 "박근혜 대표는 편협한 국가정체성 이념에 비춰 자기 틀에 안 맞으면 전부 빨갱이로 본다. 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원 의원도 자리한 당 간부회의에서 이 발언을 문제삼았다. 그러면서 "원 의원은 거의 모든 문제에서 열우당을 대변해 왔다"고 말했다.
소장파는 최병렬 박근혜 대표체제에서 초기 한동안만 주류로 머물다 비주류로 돌아섰다. 계단을 오르는 소장파의 당권투쟁이다. 오세훈의 서울시장 후보 진입은 소장파의 3단계 걸음, 이제는 당권쟁취에 첫발을 내디뎠다는 풀이다.
이런 풀이는 오세훈의 서울시장 후보 승리가 소장파의 준비된 프로그램이라는 데 근거한다. 2004년 오세훈의 불출마를 두고 소장파들의 서울시장 준비라는 말이 있었다.
변호사로 돌아간 오세훈씨는 철인3종경기에도 나가고 수필집도 내는 등 쉬지 않고 정계복귀를 위한 '이미지 업'을 해왔다. 그리고 올 정초 서울시장 예비후보 여론조사를 해봤다. 결과는 맹형규 예비후보에 약간 뒤졌다. 이걸 역전시킨 것이 강금실 바람이다. 맹․ 홍 두 예비후보가 강금실 예비후보에게 뒤진다는 여론조사가 나오자 소장파가 오세훈 카드를 내밀었다. 여론조사에서 오세훈은 강금실을 이긴다는 것으로 나왔다. 이 여론조사가 오세훈 승리를 선물했다.
"오세훈의 서울시장 후보 승리는 오세훈과 소장파, 강금실 3자 합작품이다. 지방선거 후 실시되는 7월 전당대회에서 소장파는 당권을 차지하겠다고 나설 것이다. 소장파가 당권을 잡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인적쇄신의 종점이다. 소장파의 한나라당은 주류교체를 함께 외치는 친여 정당으로 바뀔 것이다. 보수우파가 한나라당에 머물 수 있을까." 한나라당 안의 뒷공론이다.
지방선거 후 여․야당의 당 정비가 정계가 요동치는 태풍이 될지 모른다는 얘기는 그래서 나온다.
<저작권자ⓒ뷰스앤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