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주영 대선출마' <조선>에 흘려
[정치부기자 23년의 기억들] <4> 조선일보와 나
그래서 3번의 글이 나갔다. 격려도 있었고 비판도 있었다. 그렇게 다 까발리면 어떡하느냐는 걱정도 있었다. 더 까발리라는 압력도 있었다. 밤거리 조심하라는 위협도 있었고 책으로 내라는 압박도 있었다.
나는 안다. 나를 위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말이다. 물론 글에 등장했던 당사자는 아니다.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겐 어쩌면 공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3번의 글 속에서 내 나름으론 걸른 건 걸렀다. 모든 걸 토해낸 것 같아도 그러지 않았다. 쓰지 말아야 할 것은 안썼다. 당사자는 알 거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계속 쓰게 된다면 말이다.
그런데 나의 잘못이 있었다. 어제 한 친구가 찾아왔다. 오랜 기자 친구다. 언제나 내 옆에서 충고를 해주는 절친한 사람이다. 그가 나의 잘못을 일깨워 주었다. 글속에 나의 반성과 회개가 없다는 거였다.
적어도 그런 류의 글을 쓸 땐 그것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독자가 알 거라 생각지 말라 했다. 일부러 말해야 한다는 거였다.
나는 다시 한번 3번에 걸친 나의 글을 읽었다. 친구의 얘기가 맞았다. 내 글속엔 그런 게 없었다. 사실 나는 모든 걸 밝히는 것 자체가 그것을 대신하는 줄 알았다. 실제로 과거 정치부 기자시절에 대한 총체적 반성과 회개를 전제로 글을 썼던 거다. 그것이 없었다면 쓸 수 없는 글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마음일 뿐이었다.
읽으라고 쓰는 글이다. 그러면 읽는 사람이 느끼게 했어야 했다. 그것이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마음은 그랬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의 불찰이다.
어제는 그만 쓸가를 생각했다. 친구의 말을 듣고서다. 위협만 있었다면 나는 분노로 계속 썼을 게다. 나를 위협한 사람들을 향해서 말이다. 누구인지 아니까 말이다. 격려만 있었다면 우쭐해서 계속 썼을 게다. 아무 의미 없는 글을 말이다. 그러나 충고가 있었기에 그만 쓸가를 생각했던 거다.
격려와 비난만 있었다면 어디론가 하염없이 가야했다. 좌든 우든 말이다. 위든 아래든 말이다. 그러나 충고가 나를 돌이켜 보게했다.그러니 멈출가를 생각한 거다. 그 수많은 격려를 뒤로 한 채 말이다.
그러나 쓰는 데까진 쓰겠다고 생각했다. 내일일지라도 혹은 모레일지라도 말이다.내가 기자라서다.
한마디만 더하겠다. 글 속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분들에게 말이다.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하고싶다. 애시당초 그럴 생각이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안써야 할 건 안쓸 생각이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누구한테 이 얘기를 하는지 잘 알고 있을거다.
앞으론 글의 형식을 바꾸려 한다. 하나의 주제로 한번에 마무리짓지 않으려고 한다. 연재기사답게 <계속>의 형식으로 조금씩 쓸 계획이다.
조선일보와 나
나를 정치부 기자로써 키워 준 건 조선일보였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였다. 그동안 나는 정말이지 많은 특종을 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내 특종은 아니었다. 주로 회사 간부들이 만들어준 특종이었다.
어느날이었다. 이영덕 정치부장이 나를 불렀다.
“야, 이명박 사장 좀 만나봐.” 이명박씨는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었다.
“왜요?”
경제부 기자도 아닌 내가 왜 만나야 하나 싶었다.
“정주영 영감이 정치를 하신데....얘기 좀 들어봐.”
처음엔 웃었다. “그 양반이 왠 정치를?”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이명박 사장이 나를 만나주기나 할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당시에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그래도 시킨 일이니 전화나 한번 해보자 하는 기분으로 전화를 했다. 번호도 몰라서 114에 물어봤다. 사장실을 대달라 했고 비서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다. 홍보실을 통하진 않았다. 만약 중요한 얘기라도 듣게 된다면 여러 사람이 아는 게 나을 게 없었다.
그런데 곧바로 전화가 왔다. 저녁6시에 사장실로 오라는 거였다. 아마도 5시쯤이었을 게다. 부랴부랴 계동 현대 사옥으로 갔다. 몇 층인지는 기억 나지 않는다. 다만 사장실이 생각보단 크지 않았다. 말로만 듣던 이명박 사장이었다.
“우리 정치부장께서 사장님을 만나보라 하시던데요. 정주영 회장님이 정치를 하시나요?”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다른 얘기를 하는 거였다. 나는 좀 불만스러웠다. 우리 회사 위사람이랑 얘기가 됐으니 가라했을 거고 그랬다면 가타부타 말을 해야 할 것 아닌가.
한동안 다른 얘기를 하다가 다시 물었다.
“정 회장님이 정치를 하신답니까?”
그때서야 이사장은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문제가 있을까?”
‘그렇다’면 그렇다지 ‘만약’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난 그런 말투가 싫었다.
“만약이 어디 있습니까? 하신답니까 안하신답니까?”
그러나 이사장은 선수였다. 결코 ‘그렇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글세 만약 그렇다면 현대는 어떻게 될까?”
“현대가 어떻게 되기는요. 정치를 하시면 하는 거지요.”
나도 별로 관심 없다는 듯 냉소적 자세로 바꿨다.
그러면 ‘그렇다’는 소리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끝까지 ‘만약’이었다. 조금도 책잡힐 언사를 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정보는 주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정 회장님이 정치를 하실 계획이라고 신문에 쓰겠습니다. 사장님 말씀하시는 걸로 볼 때 시인을 할 수 없어 그러시는 것일뿐 시인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내일 기사를 써서 모레 자에 내겠습니다. 아니면 아니라고 지금 말하시죠.”
그러나 끝끝내 ‘아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다음날 나는 기사를 썼다. 다른 곳엔 확인할 수도 없었다. 누구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어서다. 아는 사람이 없으니 더 물어볼 데도 없었다.만약 현대가 “오보”라고 주장한다면 나는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그 정도의 오보라면 꼼짝없이 사표 감이었다. 그러나 나는 썼다. 속으론 이영덕 부장을 믿었던 거다.
조선일보 1면 톱이었다. ‘정주영회장 정치참여’ 가 제목이었던 것 같다. 대선 출마를 계획한다는 얘기도 썼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당시로선 엄청난 뉴스였다. 대한민국 최고 재벌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니 그럴 만 했다.
당시 나는 조선일보 여당 출입이었다. 민자당인지 신한국당인지 확실친 않다. 그 중에서도 민정계 담당이었다. 박태준 박철언씨등이 나의 취재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조선일보와의 관계가 좋지 못했다. 그들은 조선일보가 YS 총대를 멨다고 비난했다. 그러니 나도 그들과 관계가 편할 리 없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집고 넘어가고 싶다. 당시 세상은 조선일보가 YS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것은 나중에 중앙일보가 이회창을 만들려한 데에도 영향을 줬다고 본다.
그러나 그때 조선일보가 YS를 만들었다는 건 진실과는 좀 거리가 있다. 정치부 기자인 나 자신이 회사 간부로부터 기사와 관련된 어떠한 방향 제시를 받은 적이 없다. 내가 볼 땐 YS가 교묘히 조선일보를 활용했던 거다. 거의 모든 정보를 주었다. 그것도 독점적으로 말이다. 하나부터 열까지였다. 뛰어다닐 필요도 거의 없었다. 자기가 찾아서 흘려주었다. 그러니 YS 중심의 정보로 신문이 채워지는 건 당연했다.
다른 신문의 반발이 없지 않았다. 낙종이 많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YS는 어쩌다가 다른 신문에도 정보를 흘렸다. 그러나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내가 아는 정치인 중 언론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이 YS다. 천부적 기질이 있다.
심지어 이러기까지 했다. 당시에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표 간에 주례회동이란 게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청와대에서 만났다. 대개 오후 2,3시쯤이었다. 주례회동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두 사람의 갈등이 심했기 때문이다.
YS의 차는 언제나 세종로를 지나 청와대로 향했다. 세종로 큰 길가에 조선일보가 있다. YS는 세종로를 지날 때쯤 조선일보 간부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오늘 대통령을 만나서 이런 얘기를 하겠다고 말이다. 선배한테 듣기론 YS가 전화를 걸어 “나 지금 청와대로 가는 차 속인데...지금 세종로를 지나고 있어...”라고 했다는 것이다. 듣는 기자의 긴장도를 한껏 올려놓는 기발한 방식이다.
그럴 때면 정치부에 비상이 걸렸다. 갑자기 기사를 써서 5시에 넘겨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회동이 끝나고서도 마찬가지였다. 청와대에선 아무 발표가 없는 적도 많았는데 말이다.
그러니 민정계 의원들이 조선일보를 씹었던 거다. 그들은 결코 대권이 YS에게 안 간다고 주장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그럴 리 없다고 했다. 노태우를 가장 잘 아는 그들이었다. 박철언만큼 누가 노태우를 알겠는가. 그러니 대권후보 자리가 YS에게 갈 거라고 쓰는 조선일보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일보로선 그들을 비판할 수 밖에 없었다. 자위 수단이었다.
정주영씨의 국민당도 마찬가지였다. 악순환이 일어났다. 조선일보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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