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욱 동지는 우리시대의 전태일"
<현장>서울-안성 추모 물결, 허씨 장례 '민족민중노동열사장'
"더 이상 시끄럽게 하지 말고 돌아가달라. 유족들끼리 조용히 장례를 치르겠다."(허세욱씨 유족)
택시노동자 허세욱씨가 보름여 투병 끝에 사망한 15일 저녁, 시신이 안치된 경기도 안성 성요셉병원 영안실에서는 유족들과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범국본 관계자들이 장시간 조문을 놓고 실랑이를 벌여야했다.
유족들 '조문 불허', 문성현 민노당 대표 등 대표단 발길 돌려
유족들은 지하 분향소로 향하는 곳곳에 허씨의 가족 명의로 '일체의 외부 화환과 조문을 사절하겠다는 내용의 안내문을 붙이고 영안실인 '성혜원' 입구에서부터 조문객들을 막고 나섰다.
이날 유일하게 조문이 허락된 이들은 허씨가 소속됐던 민주택시연맹 구수영 위원장을 비롯한 택시노동자 30여명 뿐이었다.
결국 오후 9시 20분, 빈소를 방문한 문성현 민주노동당 대표와 오종렬 전국연합 상임의장, 홍근수 목사 등 대표단은 1시간의 실랑이끝에 조문을 못한 채 돌아서야 했다. 대표단은 유족들의 비난과 욕설을 들으면서 유족들에게 조문을 간곡히 부탁했지만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문 대표는 결국 유족의 뜻을 꺽지 못하자 영안실 앞 노상에서 두 번의 절을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문성현 "허세욱 당원, 우리와 심장을 연결된 투쟁의 동지"
문 대표는 "멕시코 칸쿤에서 이경해 열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것이 농민투쟁의 이정표가 됐듯이 허 동지의 분신은 이제 FTA 투쟁의 정치적 좌표가 됐다"며 "살아달라고, 살아남으셔야 한다고 그렇게 바랬는데..."라고 말끝을 잇지 못했다.
문 대표는 "허세욱 당원은 유족들과는 피를 나눴지만 우리들과는 심장으로 연결된 투쟁의 동지"라면서 "한미FTA 반대 투쟁에 언제나 허 동지의 숭고한 뜻과, 헌신과 희생, 소박했던 운동의 삶을 기리고 함께 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문 대표는 "민주노동당은 허 동지가 살아오면서 해온 다양한 궤적의 활동을 정리하고 그의 헌신을 기념하는 광범위하고 다양한 사업을 당 차원에서 전개해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종렬 상임의장은 "허세욱 동지는 비단 FTA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모든 민중들이 억압받고 수탈당하고 소외당해서는 안된다는 염원을 희생 속에 담은 것"이라며 "허 동지가 남긴 절절한 유서는 이제 FTA를 반대하는 모든 운동의 강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 의장은 또 "유족들끼리 조용히 장례를 치르겠다는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허 동지의 헌신과 희생에 대해 우리로서는 사람의 도리를 다해 예우한다는 것이 일관된 입장"이라며 "유족들의 장례와 별도로 사회장의 형식으로 일정 기간 고인의 추모기간을 가질 것"이라고 밝혔다.
유족 '가족장' vs 대책위 '사회장', 각각 장례 치루기로
허씨가 사망한 15일, 유족들과 '한미FTA 무효 민중민주 노동열사 허세욱 동지 장례대책위원회'(허세욱 대책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조문과 분향소 설치 문제를 비롯해 장례절차 및 일정 등에서 이견을 보이며 묘한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유족들은 오전 11시 23분 고인이 사망한 직후, 시신을 서울 영등포 한강성심병원에서 허씨의 고향인 경기 안성 성요셉병원으로 옮긴 후 대책위와 일체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유족들은 오후 들어 민주노총 경기도본부 조합원과 민주노동당 경기도당 당원들, 민주택시연맹 조합원들이 모이자 경찰 측에 유가족 신변보호 및 사체보호 요청을 할 정도로 대책위를 향해 극도의 경계심을 드러냈다.
대책위는 유족들이 서울에서 안성으로 시신을 옮기는 과정에서 보여준 치밀함과 한강성심병원 측이 대책위에 일언반구 없이 유족들에게 시신을 인도한 절차에 대해서 불편한 감정을 내비쳤지만, 고인을 생각해 의혹 제기로 확대해 나가지는 않는다는 방침이다.
대책위는 김용한 민주노동당 경기도당위원장과 구수영 민주택시연맹 위원장을 중심으로 유족들의 설득에 나섰지만 '빈소도 꾸리지 않고 조용히 내일 오전 화장으로 장례절차를 마무리짓겠다'는 답변만이 되돌아왔다. 유족들은 고인의 사망 24시간이 되는 낮 12시께 화장터로 향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책위, 허씨 장례 '한미FTA반대, 민족민중노동열사 장례식'으로 확정
대책위는 이에 앞서 허씨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이후 오후 2시께 긴급대책회의를 열어 허씨의 장례를 서울 한강성심병원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추후 일정을 잡아 '한미FTA반대, 민족민중노동자열사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유족들이 완강히 사회장을 거부함에 따라 유족들의 가족장과 별도로 장례절차를 밟고 고인의 가묘를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설치할 예정이다.
대책위는 이와 관련 16일 오전 10시,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향후 확정된 공식 장례절차와 일정에 대한 브리핑을 진행할 예정이다.
현재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참여연대,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등 허씨가 소속된 단체들로 구성된 대책위는 병원 입구에 두 개의 천막을 치고 이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대책위는 상황실에서 밤을 새우면서 가족들이 기습적으로 장례절차를 밟을 경우 장지까지 따라갈 예정이다.
현장에서 대기하고 있는 주봉희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허 동지가 남긴 3개의 유서 중에서 가족에게 보낸 것만 공개되지 않았지만 허 동지가 유서에서 남긴 분명한 뜻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소외된 이들을 돌아보고 그들과 함께 해달라는 것이었다"며 "가족들의 심정도 이해는 가지만 조금만 더 고인의 뜻을 헤아려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울-안성, 촛불추모제 등 애도 물결 넘쳐
한편, 허씨가 사망한 이날 서울과 안성에서는 각각 고인을 추모하는 추모제가 열리는 등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허씨의 사망이 전해지면서 고인이 생전에 투병생활을 했던 서울 한강성심병원에는 5백여명의 시민들이 모여 애도의 촛불을 밝혔다.
이날 추모제에서 추모사를 낭독한 허영구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분신 당시 허세욱 동지에게서 나온 것은 500원 짜리 동전 두 개, 100원 짜리 동전 세 개가 전부였다. 자신을 모두 내던진 삶을 살았던 허세욱 동지야말로 '우리시대의 전태일'이었다"며 "평소 노동운동을 하며 '전태일 정신'을 운운해 온 게 부끄럽다"고 말해 주변을 숙연케 했다.
권영길 의원단 대표는 "열사의 영전 앞에서 다짐한다"며 "신명나는 새 세상을 당신과 누리려했던 기대는 슬픔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 슬픔을 한 번의 오열 속에 묻고 열사의 벗들 노동자, 농민, 서민들과 함께 당신이 꿈꾸었던 자주, 평등의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겠다"고 말했다.
노회찬 의원은 "노무현 정부가 결국 허세욱 동지를 죽인 것"이라며 "망국적 한미FTA를 온몸으로 막고자 했던 허세욱 동지의 죽음에 대한 깊은 슬픔과 애도의 마음을 이땅의 민중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고 말했다.
심상정 의원은 "죽음을 부르는 한미 FTA 협상을 국민의 손으로 막고,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길에 저와 민주노동당이 앞장서 나가겠다. 열사의 큰 이름 앞에 비록 오늘은 슬픔에 잠기지만, 우리는 내일 더 커지고, 떠 또렷해질 것"이라며 "한미 FTA로부터 이 나라와 서민의 삶을 지켜낼 것이라고 다짐했다.
시신이 안치된 경기 안성 성요셉병원 앞에서도 오후 11시께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가운데 대책위 관계자 60여명이 모여 약식으로 촛불을 들고 추모제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허세욱 동지는 평소 택시를 몰면서 승객들과 한미FTA토론을 즐기고 범국본 유인물을 꼭 챙겨주는 등 소박한 운동을 해오신 분"이라며 "비단 FTA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활발하게 활동하신 고인의 뜻을 마음에 새기자"고 다짐했다.
"아직 갈때가 아닌데" 안성 빈소, 조문 거부당한 채 밤샘 대기
오종렬 전국연합 상임의장은 "허 동지의 죽음으로 울분과 분노가 있을 수 있지만 그걸 표출하는 방식은 극복해야한다"며 "이제 문서공개 투쟁을 시작으로 국민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 광범위한 범국민운동을 발전시켜나가는 것만이 허 동지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한독택시 노조의 한 조합원은 조문을 막는 유족들 앞에서 연신 담배를 피우며 침통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는 "가족들의 심정을 이해하지만 평생 함께 운동을 해오면서 울고 웃었던 우리들과의 인연 또한 소중한 것"이라며 "세욱이형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부끄러운 감정을 떨쳐낼 수가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형이 우리에게 남긴 유서에도 나왔지만 끝까지 우리의 힘든 처지를 생각하며 모금을 하지말라고 했다. 항상 그렇게 주변 사람들을 걱정해주고 위로해줬던 분"이라고 허씨를 회상했다. 그는 "이렇게 가면 안되는데, 아직은 형이 할일이 참 많은데...아직도 형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와닿지 않는다"며 빗속에 서서 망연자실, 빈소를 향한 텅빈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저작권자ⓒ뷰스앤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