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속 구조조정' 파동, 각부처 앞다퉈 "그런 일 없다"
책임주체 없이 강제합병 운운으로 시장 혼란만. 면피식 한건주의
<중앙일보>는 9일 "금융위원회·산업통상자원부·해양수산부·국토교통부는 지난주 구조조정 실무회의에서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구조조정 방안을 2차 차관회의 안건으로 올리기로 했다"고 단독 보도했다. 구조조정 차관회의는 금융위원장이 주재하는 각 부처 차관급 각료회의로 사실상의 ‘구조조정 컨트롤타워’다.
<중앙>은 "이미 정부는 두 업체에 비공식적으로 자발적 합병을 권유했지만 거부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자 정부가 나서 구조조정을 압박하기로 한 것으로 풀이된다"면서 "정부가 만일 추가 지원 거부 결정을 내리면 채권단은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중단하게 된다. 이 경우 두 기업은 더 이상 정상적인 경영이 어려워진다"고 덧붙였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최근 10분기 누적적자가 각각 3천200억원과 6천700억원이 넘어 강제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것.
<중앙>은 이어 "2차 차관회의엔 석유화학과 철강업의 구조조정 문제도 안건으로 상정된다"면서 "이에 따라 구조조정 추진 과정에서 일부 기업이 해당 업종을 다른 기업에 넘기는 ‘빅딜’이 연쇄적으로 이뤄질 가능성도 커졌다"며 석유화학과 철강도 구조조정 대상임을 분명히 했다.
<중앙일보> 보도에 재계와 금융시장은 발칵 뒤집혔다. 1997년 IMF사태후 DJ정부가 '강제 빅딜'을 단행했던 것처럼 정부가 위기에 봉착한 한계산업에 대해 인위적 구조조정의 칼을 뽑아든 게 아니냐는 해석을 낳았기 때문.
파문이 확산되자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금융위원회는 보도자료를 통해 “자발적 합병을 권유하거나 강제합병을 추진한 사실이 없다”며 보도내용을 부인했다.
금융위의 강제합병식 구조조정에 반대해온 해양수산부의 김영석 장관 후보자도 이날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한진해운과 현대 상선 등 일부 선사가 유동성 위기를 맞으며 구조적 문제가 있긴 하지만, 해운업의 중요성 및 우리나라 무역 구조를 감안하면 일정한 선사는 유지돼야 한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관련당국의 부인에도 시장의 불안감은 커, 이날 유가증권시장에서 한진해운은 4.76% 하락했고 현대상선은 13.78%나 폭락했다. 정부가 강제합병을 단행할 경우 업계 2위인 현대상선이 한진해운에 먹히는 게 아니냐는 판단에서다.
시장의 혼란은 <조선비즈>가 이날 오후 "현대그룹이 주력 계열사인 현대상선 경영권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에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현대그룹은 부실이 심각한 현대상선을 산업은행에 넘기고, 현대엘리베이터가 현대증권, 현대아산 등 현대상선이 보유 중인 지분을 매입하는 내용의 자구계획을 마련했다"고 보도하면서 더욱 증폭됐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은 즉각 "산업은행에 현대상선을 넘기는 자구계획안을 제출한 적이 없다"고 펄쩍 뛰었고, 산은 역시 "현대그룹이 현대상선 경영권을 포기한다는 기사는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다.
금융위, 해수부, 산은 등의 말을 종합하면 '오보'가 춤을 췄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시장에서 이 해명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설익은 대책이 우후죽순 격으로 정부에서 흘러나오면서 시장 혼란을 증폭시켰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처럼 이날 혼란은 그 진원지가 정부라는 점에서 사태의 심각성이 더 크다. 해운, 석유화학, 철강, 조선, 건설 등 한계산업에 강도높은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등도 그동안 구조조정 필요성을 여러 차례 언급해왔다. 미봉적 건설부양책으로 경제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따가왔기 때문이다.
이에 IMF사태때 이헌재 금융위원장이 총대를 맸듯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총대를 매야 한다는 정부내 압박이 거세졌다. 한진해운-현대상선 강제합병설도 이같은 과정에 불거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IMF사태 직후 DJ정부때 단행된 '빅딜'도 결과론적으로 실패작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당시는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하고 이헌재 금융위원장이 야권사령관을 맡아 집행하는 형식으로 강도높게 진행돼 일정부분 단행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정권실세인 최경환 부총리도 선뜻 앞에 나서지 않고 있다. 구조조정의 주체가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시장법칙대로 채권단이 주체가 돼야 한다고 압박하나, 얼마전 천문학적 적자를 내면서 부채비율이 4,000%에 도달한 대우조선해양에 4조2천억원의 국민돈을 투입하기로 한 데서도 볼 수 있듯 '대마불사(大馬不死)' 원칙을 고수하면서 채권단의 자율적 구조조정은 물건너간 분위기다.
더욱이 총선, 대선 등 매머드 정치일정이 줄줄이 다가오면서 '표'를 의식한 정치권의 저항도 거세다. 구조조정은 정권 초기에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냈을 때만 가능했던 일로, 이미 구조조정의 적기를 놓쳤다는 게 정-재계의 일반적 관측이다.
걱정되는 것은 IMF사태도 YS정권말기 레임덕에 빠져들면서 위기관리의 중심축이 사라졌을 때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청와대 업무는 90%가 경제여야 정상이다. 그런데 과연 지금 청와대는 그러한가. 정치에만 올인하고 있는 건 아닌가". 박근혜 정권 출범에 지대한 기여를 했던 한 경제원로가 최근의 국정화 파동 등을 바라보며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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