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毛澤東의 「모순론」, 「실천론」, 「新민주주의론」이 새로운 교재가 됐어요
손학규의 운동권 증언
[ ..... 운동권 ....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毛澤東의 「모순론」, 「실천론」, 「新민주주의론」이 새로운 교재가 됐어요. ....... ]
06 2003 MAGAZINE
[인물연구] 孫鶴圭 경기도지사의「한국 現代史와의 화해」
『사회를 발전시키는 正義만 正義. 한국을 東北亞의 네덜란드로 만들자』
김연광
인구 1000만의 巨大 道政 책임자
.......................................................................................
―대학 2학년 때 시위를 하다가, 무기정학을 받고 강원도 함백의 탄광에서 일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탄광으로 간 계기가 있습니까.
『무기 정학은 기한이 없으니까,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하자고 생각했죠. 지도를 펴놓고 탄광지대가 어딘가 찾다가 함백으로 무작정 찾아갔어요. 「인생의 막장이라는 탄광의 막장에서 일해 보자」고 비장한 각오로 갔는데 현실을 전혀 모른 거예요.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했어요. 막장은 보수가 제일 높아서, 나 같은 초보는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이틀쯤 기다리다가 「보다 가시」라고 選炭(선탄)하고 나오는 버럭을 버리는 일을 했어요. 기술이 전혀 필요 없고, 임금이 제일 낮은 일이었어요. 산비탈에서 貨車(화차)를 휙 돌려 쏟는 일인데 잘못하면 사람까지 같이 돌아가요』
―시위에 단순히 참여한 것 하고, 「基層(기층) 민중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의식을 갖게 된 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 아닌가요. 대학 2학년 때부터 「앞으로 직업 혁명가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까.
『솔직히 그런 생각을 했어요. 韓日회담 반대로 대학생활을 시작했고, 3학년이 되고서는 직업이 학생 운동가가 됐어요. 학교 시험을 우습게 알았고, 고시 보는 친구들, ROTC 하는 친구들을 의식이 없다고 비웃었어요. 대학 졸업하고 노동운동에 뛰어들면서 직업 혁명가를 꿈꾸는 생활을 계속 한 거죠』
...................................................................................
대학에 입학하면서 金芝河(시인), 金道鉉(前 문화체육부 차관), 玄勝一(한나라당 국회의원), 金正男(前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같은 문리대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 의식화된 거죠. 저는 순진한 아이가 이데올로기적인 학생 운동권에 엉뚱하게 接木(접목)된 케이스예요』
「또박이」기질 때문에 학생운동 리더 돼
.................................................................................
―1960년대와 1970년대 학생운동의 이념적 기반도 민족주의와 反美, 사회주의라고 봐야죠.
『그렇죠. 그때 우리가 부르던 노래가 「미국 대사관에 불이 붙었다. 잘 탄다」였으니까. 反日 민족주의가 슬쩍 反美로 돌았어요. 거기에 反매판, 反재벌이 더해졌죠.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초년병들의 필독서가 김성두의 「재벌과 빈곤」, 라이트 밀즈의 「들어라 양키들아」였어요』
―당시 운동권이 毛澤東(모택동)의 중국과 胡志明(호지명)의 월맹에 상당히 경도됐었죠.
『1960년대 중반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들은 광복 이후에 만들어진 左翼 역사책,이른바 「마분지 이론서」를 교본으로 했습니다. 「세계사 교정」, 「조선사 교정」, 「조선사회 사상사」를 읽었어요. 그후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毛澤東의 「모순론」, 「실천론」, 「新민주주의론」이 새로운 교재가 됐어요. 「구체적인 현실에 맞는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 「큰 모순과 작은 모순이 있는데, 작은 모순은 보류해 두고 큰 모순을 주된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毛의 논리에 매혹됐어요』
......................................................................................
『소설 쓰는 黃晳暎씨와 의기투합해서 둘이서 구로공단에 조그마한 자취방을 얻어 놓고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어요. 그때는 기업체들이 「중학 졸업」 학력을 요구했어요. 경기중학 졸업 증명서를 가지고 취업이 되겠어요? 黃晳暎씨는 명문인 경복중학에 들어갔지만, 퇴학 맞고 제적당하고 해서 중·고등학교를 여러 군데 다녔어요. 그래서 취직이 쉽게 됐어요.
黃晳暎씨가 「너는 형편없는 학교를 나와서 취직도 못한다」고 놀렸어요. 그래서 국졸 학력만 요구하는 목공장에 취직했어요. 몇 달 다녔는데 그 회사 간부가 제 동창이었어요. 維新 후라 서슬이 퍼런 시절이었어요. 다른 직장을 찾겠다고 구로공단에서 뒹굴었죠』
그 무렵 그는 朴炯圭 목사를 만난다. 朴목사는 『노동운동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게 빈민선교』라면서 孫鶴圭를 기독교 사회운동에 끌어들였다. 그래서 그는 權晧景(권호경·前 기독교 방송 사장), 金東完(김동완·現 생명의 숲 가꾸기 국민운동 공동대표) 전도사와 함께 청계천의 판자촌으로 선교활동을 위해 들어갔다. 1973년부터 1970년대가 끝날 때까지 그는 기독교 사회운동에 매달렸다.
..............................................................................................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306100041
박현채 --- 《해방전후사의 인식》
[ ...... 박현채 ..... 식민지반봉건사회 .......
우선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여 민주주의적인 토지개혁을 ...... 정권을 확실히 장악한 다음, 적당한 때를 보아 사회주의 혁명으로 ........
바로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 ..... 위와 같은 2단계 혁명을 신민주주의혁명 ....... ]
(1) 빗나간 역사의식
이영훈
2009-05-12
..........................................................................................
《해방전후사의 인식》 비판
...................................................................................
우선 비판의 표적을 명확히 하기 위해 《해방전후사의 인식》(한길사, 1979~1989, 이하 《인식》으로 약칭)이란 여섯 권의 책을 소개하겠습니다. 《인식》은 해방전후사를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해석한 결정판입니다. 이 책은 1980~1990년대에 대학을 다닌 한국인들에게 너무나 큰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읽지 않은 대학생이 거의 없을 정도여서 여섯 권 합하여 100만 권 가까이나 팔려 나갔다고 하는군요. 재야 시절의 노무현 대통령도 이 책을 탐독했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현 집권세력의 요처에 포진한 이른바 386세대라는 젊은 정치가들의 현대사 인식은 이 책을 통해 형성되었습니다. 현 정부가 20세기 한국사 전체를 대상으로, 심지어는 1894년의 동학농민봉기까지를 대상으로 해서, 무려 16개에 달하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이른바 ‘과거사청산’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도 이 책을 읽으면 그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식》의 각 권에는 총론이 있습니다. 총론은 책의 성격과 내용을 대변합니다. 그 총론을 중심으로 《인식》 각 권의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
이렇게 제2권의 총론이 역사인식이라면 제3권의 총론에서는 사회경제의 분석과 그에 기초한 혁명이론이 제시됩니다. 제3권의 총론자는 박현채 선생입니다. 이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 되었습니다만, 박 선생은 한국전쟁 당시 전남 백아산에서 소년 빨치산으로 활동한 분입니다. 박 선생에 의하면 식민지기와 미군정기는 식민지반봉건사회(植民地半封建社會)입니다. 세계사적으로 크게 보면 자본주의사회이지만, 아직 제국주의의 지배하에서 지주제를 중심으로 한 봉건적 부문이 강하게 남아 있어 사회경제적 변혁이 반(反)제국주의와 반(反)봉건적 토지개혁을 주요 과제로 하는 사회라는 뜻입니다.
좀 더 풀이하면 아직 자본주의의 발전 정도가 미약하여 공산당이 당장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객관적 여건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선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여 민주주의적인 토지개혁을 수행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농민의 지지를 확보하여 정권을 확실히 장악한 다음, 적당한 때를 보아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가자는 주장이지요.
아시아의 정치사에서 이러한 사회주의 혁명의 이론을 개발하고 실천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毛澤東)이지요. 그는 위와 같은 2단계 혁명을 신민주주의혁명이라 불렀습니다. 해방 후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마오의 이 같은 혁명이론을 수용하고 실천했습니다. 박현채 선생도 그러한 사상을 계승 한 사람이지요. 그래서 위와 같은 혁명이론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1970년대까지 한국에서 그러한 주장을 공개적으로 제기하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자본주의가 중진 단계로 발전한 1980년대 중반부터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러자 다시 마오의 혁명이론으로 해방전후사를 재해석하고자 했던 것이 제3권의 총론이라고 하겠습니다.
제4권의 총론은 최장집과 정해구 두 교수가 함께 쓴 것인데 《인식》 여섯 권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논문입니다. 두 교수는 앞의 세 권까지의 도덕심판과 역사인식과 혁명이론을 전제한 위에 한국전쟁의 기원과 성격에 관해 설명을 덧붙임으로써 해방, 분단, 건국, 전쟁에 이르는 전 역사 과정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그야말로 스케일이 큰 논문입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북한 정권의 성격에 관한 언급이 나오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두 사람의 주장을 들어보면 북한은 혁명적인 소련국의 지원하에 혁명적인 공산주의자와 혁명적인 민중이 연합한 정권으로서 미제와 반민족·반혁명 세력의 지배하에 있는 남한을 해방시킬 ‘민주기지’였습니다.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그러한 성격 차이 때문에 거의 불가피했던 내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이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남한의 해방과 혁명은 좌절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렇게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정하는 이야기가 대한민국 내부에서, 그것도 제도권에 속한 대학사회에서, 최초로 제기된 아슬아슬한 대목이 바로 제4권의 총론이라고 하겠습니다.
...........................................................................
이상과 같이 《인식》은 마오의 신민주주의혁명론에 입각하여 대한민국의 건국사를 비판한 다음, 북한의 주체사상에 기대어 민족통일을 전망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
제가 《인식》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제시된 대한민국 건국사에 대한 비판과 그 바탕을 이루는 민족주의 역사의식만큼은 여전히 오늘날 한국의 사회와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힘으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서술체계로까지 공식화하여 다음 세대의 역사의식까지 지배하는 권위로 군림하고 있는 실정이지요.
...................................................................................
다소 극단적인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인식》과 그에 입각한 현행 역사교과서를 그냥 두고서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념적이고 후진적인 역사의식으로는 선진국 진입에 요청되는 정신문화 영역에서의 도약을 기대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09/05/12/200905120003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