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모두가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거다"
[전문] 이준구 "늘 회색분자로 살아온 나도 나설 정도니"
환경활동가들이 이포보-함안보 고공농성에 돌입한지 벌써 일주일이 되는 28일,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뜨거운 연대의 글을 올렸다.
일관되게 4대강사업에 반대해온 이 교수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그들은 목마름과 굶주림, 모기, 폭우, 그리고 뙤약볕과 싸우며 죽어가는 강을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언제 어떤 위험이 그들에게 닥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다. 이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면서까지 크레인 위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심을 굳히게 된 배경이 과연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진 뒤 이같이 답했다.
이 교수는 이어 "어느 누구도 크레인 위에서의 풍찬노숙을 즐기지 않는다. 제발 크레인에 올라야 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며 "그러나 대화와 소통을 한사코 거부하는 정부의 외고집은 그런 극단적 행동을 부채질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더 혼란스러워져야 상식이 회복될 수 있을지 그저 막막하기만 한 심정"이라고 탄식했다.
이 교수는 이에 앞서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학생 시절부터 늘 ‘회색분자’로 살아 왔다"며 "내가 갑자기 사회적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로 결심한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4대강사업은 꼭 막아야 한다는 내 양심의 소리 때문"이라며 4대강사업 저지가 시대적 양심임을 지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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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 교수가 농성중인 환경운동가들에게 헌정한 글 전문.
무엇이 그들을 크레인에 오르게 했는가?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학생 시절부터 늘 ‘회색분자’로 살아 왔다. 학생 때 그 흔하디흔했던 민주화 데모에조차 열심히 참가해본 적이 없다. 교수가 된 이후에도 별로 다를 바 없어, 어떤 사회적 이슈에 대해 목청을 높여본 적이 별로 없다. 그랬던 내가 요즈음 갑자기 ‘4대강사업 반대’를 외쳐대니 주변 사람들이 조금 의아해 하는 것 같다. “도대체 저 친구가 무슨 생각으로 4대강사업 반대에 열을 올리고 있을까?”라는 의문의 시선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지난 30년 동안 조용히 교수 생활만 하던 내가 하루아침에 사회운동가로 변신하기로 결심했을 리 없다. 정치라면 진저리를 내던 내가 갑작스럽게 정치에 뛰어들 욕심이 생겼을 리도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권력과 돈을 추구하지만, 4대강사업 반대를 외친다고 단 한 줌의 권력, 단 한 푼의 돈이라도 수중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가 갑자기 사회적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로 결심한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4대강사업은 꼭 막아야 한다는 내 양심의 소리 때문이다.
그래도 내 태도의 변화는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고 말할 수 있다. 나야 행동에 옮기지만 않았을 뿐, 늘 생각은 있었던 터였기 때문이다.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은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종교활동에만 전념해 오던 분들이 돌연 4대강사업 반대 대열의 선두에 서게 된 연유다. 보수언론은 쉬쉬하며 감추려 하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하나의 진실이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4대 종교가 모두 4대강사업 반대 대열에 동참하고 있으며, 그저 동참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열의 선두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전국의 참선수행도량에서 용맹전진해 오던 전국선원수좌회 2천 여 스님들이 ‘4대강 생명을 위한 성명서’를 발표해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한 바 있다. 산 속 깊은 곳에 조용히 앉아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에 정진해야 할 수좌들이 아닌가? 그들은 사찰을 운영하는 일조차 자기 몫이 아니라고 느껴 산사에 은둔해 수행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이런 수좌들이 얼마나 상황이 급하다고 느꼈기에 세속의 일에 집단행동을 하고 나섰을까?
이어서 조계종 스님의 절반이 넘는 4천 8백 여 명이 4대강사업의 중단을 촉구하는 ‘생명평화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그 선언이 제대로 된 타당성 조사와 검증 없이 추진하고 있는 4대강사업을 중단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자는 간절한 호소라고 말한다. 이판(理判)은 가부좌를 풀고 사판(事判)은 호미를 던지고 4대강사업 반대를 위해 총궐기한 셈이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가부좌를 풀고 호미를 던지게 만들었을까?
한국 천주교 교단의 4대강사업 반대 역시 주교회의의 결의를 거친 범교단적 차원의 운동이다. 내 기억에 이번 일 말고는 천주교 주교단이 어떤 사회적 이슈에 대해 공식적인 목소리를 낸 적이 없다. 민주화의 열망으로 온 사회가 들끓었던 긴박한 상황에서도 천주교 교단의 공식적인 움직임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4대강사업을 반대한다는 주교회의의 결정이 나오자마자 성(聖)과 속(俗)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시비를 거는 사람이 나타났다. 주교단에서도 이런 시비가 나올 것임을 뻔히 예견하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다고 느꼈던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주교회의의 결정에 이어 사제와 수도자 5천 여 명이 4대강사업의 즉각 중단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천주교 교단 전체 사제와 수도자 총수의 절반이 넘는 규모인데, 이 중에는 ‘봉쇄 수도원’의 수도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한 번 들어가면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한 세상에 나올 수 없다는, 세속과는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 바로 봉쇄 수도원이다. 매일의 일상이 기도와 명상, 독서 그리고 노동으로 꽉 채워져 있는 구도의 생활만이 존재하는 탈속의 공간이다. 이곳의 수도자들 다수가 그 선언문에 서명했다는 것은 심상한 일이 아니다.
내가 강연을 하기 위해 일전에 방문한 바 있는 한 봉쇄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다. 신문에 연일 톱기사로 대서특필되는 사건조차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강연 도중 그런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내가 미안하게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4대강사업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만은 대부분의 수도자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강연을 하면서 나는 속으로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무엇이 구도에 전념해야 할 이들을 속세의 번잡한 일로 끌어들였을까라는 의문이다.
불교, 천주교에 이어 최근에는 개신교 목회자 1천 3백 여 명이 4대강사업의 즉각 중단을 촉구하는 ‘한국교회 목회자 선언’을 발표했다. 종단 차원에서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불교, 천주교와 달리, 개신교의 경우에는 찬반 의견이 엇갈려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개신교 안에도 4대강사업을 반대하는 의견이 상당히 광범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지금까지 시국선언이라는 명확한 의사표현 방식을 통해 4대강사업 반대 입장을 표명한 종교인이 무려 1만 명을 넘는 셈이다. 정부에서는 모든 종교인이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로 애써 위안을 삼으려 하지만, 궁색한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보는 정도의 판세라면 실질적으로 우리 종교계가 거의 일치단결해 4대강사업에 반대하고 있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찬성하는 종교인들을 아무리 모아 본다 해도 이 거센 반대의 흐름에 비하면 몇 개의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이 종교인들을 4대강사업 반대 대열의 선두로 몰아넣은 것이 과연 무엇일까? 돈과 권력에 대한 욕심일까? 열심히 일하고 있는 정부의 발목을 잡기 위한 불순한 동기일까? 아니면 순진한 종교인들로 하여금 상황을 잘못 판단하게 만든 선동일까? 모두 다 엄청나게 틀린 짐작일 뿐이다.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짐작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 대한 엄청난 모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리라.
사실 종교인들이 세속의 일에 팔 걷어붙이고 나서는 것은 일종의 극단적 행동이다. 그것이 종교인 본연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이 그런 극단적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세속 사람들만의 힘으로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4대강사업이 뭇 생명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파괴적 사업임이 분명한데도 세속의 사람들은 이를 막지 못했다. 이런 딱한 상황을 그대로 볼 수 없어 그런 극단적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약 정부가 종교인의 이런 양심의 소리, 이성의 소리에 진지하게 귀 기울였다면 더 이상의 극단적 행동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철저하게 귀를 닫고 외면해 왔기 때문에 농성을 하고, 단식을 하고, 머리를 깎는 한층 더 극단적 행동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문수 스님은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이는 소신공양까지 감행하기에 이른다. 얼마나 답답하고 걱정스러웠으면 그 한밤에 자기 몸을 불사르기로 결심했을까? 정말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속세의 사람들까지도 극단적 행동을 통해 4대강사업을 저지하려고 나섰다. 몇 명의 환경운동가들이 낙동강 함안보 건설현장의 크레인과 한강 이포보 기둥 상판을 점거해 농성에 돌입한 것이다. 그들은 목마름과 굶주림, 모기, 폭우, 그리고 뙤약볕과 싸우며 죽어가는 강을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언제 어떤 위험이 그들에게 닥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다. 이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면서까지 크레인 위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심을 굳히게 된 배경이 과연 무엇일까? 바보가 아니라면 그 답이 무엇인지 모를 리 없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 환경운동가뿐 아니라 4대강사업에 반대하는 모든 지식인과 종교인이 크레인으로 올라가 농성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대화와 소통이 단절된 세상에서 극단적 행동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정신적 크레인에 오른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크레인 위에서의 풍찬노숙을 즐기지 않는다. 제발 크레인에 올라야 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대화와 소통을 한사코 거부하는 정부의 외고집은 그런 극단적 행동을 부채질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더 혼란스러워져야 상식이 회복될 수 있을지 그저 막막하기만 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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