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검색 바로가기

"모든 것을 담았던 옹기", 김수환 추기경

"좋은 것과 나쁜 것, 심지어 오물까지 담을 수 있는 그릇"

얼마 전 일이다. 16일 선종한 고 김수환 추기경의 호(號)가 '옹기'라는 사실이 알려져 세인의 관심을 끈 바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옹기' 정신

김 추기경의 호는 지난해 8월 29일 북방선교 사제양성을 지원하고 있는 '옹기장학회(회장 한승수)'의 장학금 전달식때 처음 공개됐다.

서울대교구 명동의 박신언 몬시뇰은 이날 장학금 전달식에서 "2002년 3월 김 추기경님을 찾아뵙고 기념사업 성격의 '스테파노(김 추기경 세례명) 장학회' 설립을 건의하자 그 취지에 찬성하고 사재를 털어주셨다"며 "그러나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하시며 이름을 '옹기'라고 손수 지어주셨는데 그것이 추기경 아호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고 밝혔다.

김 추기경은 "옹기는 박해시대 신앙 선조들이 산속에서 구워 내다팔아 생계를 잇고 복음을 전파한 수단이자 좋은 것과 나쁜 것, 심지어 오물까지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고 말했다고 박 몬시뇰은 전했다.

김 추기경의 일생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심지어 오물까지 담을 수 있는 그릇"이란 '옹기' 정의를 통해 요약가능하다.

김 추기경 부모도 옹기장사 하며 자식 키워

한국 천주교에서 옹기는 특별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 박해를 피해 삶의 터전을 버리고 산으로 숨어든 신자들은 대부분 옹기나 숯을 구워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산에서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가 흙과 목재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옹기를 짊어지고 팔러 다니면서 천주교를 알리거나 바깥 소식을 들었다. 1970년대 한 논문에는 도공(陶工)이나 옹기장수의 조상을 물으면 십중팔구 천주교이었다는 설문결과가 남아있다.

순교자 집안의 김 추기경 부모도 옹기장사를 했다.

조부 김보현(요한) 공이 1868년 무진박해 때 서울에서 순교하자 가장을 잃은 추기경의 부친(김영석 요셉)은 영남 지방으로 이주해 옹기장수로 전전하다 대구 처녀 서중하(마르티나)를 만나 결혼한 뒤 대구에 정착했다.

김 추기경은 1922년 5월8일 대구 중구 남산동에서 두 사람 사이에 5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추기경이 초등학교 1학년 때 부친이 별세하자 어머니는 거의 평생토록 옹기와 포목을 머리에 이고 행상을 다니며 자식들을 키웠다.

모친의 권유로 성직자의 길 들어서 일제강점기때 독립운동 생각도

모친의 권유에 따라 일찍이 성직자의 삶을 결심한 그는 군위공립보통학교 5년 과정을 졸업하고,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하여 성직자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런 다음 서울의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입학하였으며, 1941년 동성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천주교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그 해 4월에는 일본 도쿄의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사실 그 무렵 김수환은 성직의 길보다 항일 독립 투쟁에 더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고 후일 밝혔다. 그러나 1944년에 들어 모든 상황이 일변하게 되었다. 당시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았던 김수환은 일제의 강압으로 학병에 징집되어 도쿄 남쪽의 섬 후시마에서 사관 후보생 훈련을 받아야만 하였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이듬해 전쟁이 끝나면서 상지대학에 복학하여 학업을 계속하다가 1946년 12월 귀국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곧바로 다음해 초에 서울의 성신대학으로 편입한 그는 4년 뒤인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 동료들과 함께 사제로 서품되었다.

김수환 신부가 첫 사목 생활을 시작한 곳은 경북 안동 본당이었다. 이어 1953년 4월 대구교구장 최덕홍(요한) 주교의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 원장을 거쳐 1955년 6월에는 경북 김천 본당 주임 겸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되었으며, 아울러 교구 평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런 다음 1956년 7월에 독일 뮌스터 대학으로 유학, 동 대학원에서 8년간 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그는 독일에서 수학하는 동안 수도자다운 철저하게 검박한 생활로 교포들과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비슷한 시기에 독일에서 공부했던 김종인 전 경제수석 등은 증언하고 있다.

세계 최연소 추기경...군사정권시절 인권 수호에 앞장

김 추기경은 1964년에 귀국하여 그 해 6월에 <가톨릭 시보>사 사장에 취임한 뒤, 1966년 2월 15일, 44세의 김 신부는 마산교구 설정과 동시에 그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1967년 초 서울대교구장 노기남(바오로) 대주교가 사임하면서 김 신부는 다음해 4월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가 된다. 이때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면서 봉사하는 교회,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했다.

동시에 가난하면서도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하여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과 서민, 노동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다. 실제로 그는 대교구장 취임 직후부터 억압받고 가난한 민중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파행적인 정치 현실과 불확실한 노동 문제 등에 관한 강력 발언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대내외적으로 인권 옹호자로서 명성을 높여갔다.

1969년 드디어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됐다. 당시 136명의 전세계 추기경 중 최연소 추기경으로 기록된다. 그는 1970년대의 유신 체제 이래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던 인사들의 인권을 위해, 구국과 정의 회복을 위해, 1980년대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시절에도 민주화 운동을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그는 젊은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의 싸움을 보듬는 동시에, 권력의 탄압으로부터 보호하는 바람막이 역할을 하며 명동성당을 '민주화의 성지'로 만들었다.

특히 고인은 1972년 유신헌법이 제정되기 직전, 서슬 퍼렇던 시절에 전국으로 생중계되는 미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려는 정부여당을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고, 1980년 정월 초하루, 새해 인사차 추기경을 방문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서부활극을 보는 것 같다’며, 대통령 면전에서 쓴 소리를 쏟아내기도 했었다.

고인은 그러나 얼마 전 회고록을 통해 "나는 스스로 민주화운동에 앞장 선 것이 아니라, 본의 아니게 1970-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한 가운데 있었을 뿐"이라며 자신을 낮추기도 했다.

1998년 75세 정년이 되자 그는 서울 대교구장을 물러나 은퇴생활을 해왔으며, 지난해 중반부터는 노환으로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면서 강남성모병원에서 생활을 해오다가 16일 오후 6시12분 선종했다.

"별은 떨어지는 게 아니라 잠시 숨은 것일뿐"

김 추기경은 지난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에서 의문의 추락사를 당한 '박정희의 최대 정적' 장준하 선생의 영결미사를 집전하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보다 새로운 빛이 돼 우리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일 뿐입니다."

김 추기경의 말대로 김 추기경 또한 떨어진 게 아니라 잠시 숨은 것일뿐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지난 6월 11일 서울 혜화동 주교관에서 명동주교좌본당 주임 박신언 몬시뇰과 성라자로마을 후원회 운영위원, <평화신문> 기자들과 함께 86살 생신 축하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천주교에 의해 대외적으로 공개된 마지막 사진이다. ⓒ<평화신문>

김수환 추기경이 86회 생신 축하 케이크 촛불을 끄고 있다. ⓒ<평화신문>
김혜영 기자

관련기사

댓글이 9 개 있습니다.

  • 20 20
    극일자

    김수한씨 잘 죽었소이다
    대한민국은 친일 당신의 죽음을 축볼할 것이외다. 지옥에서 잘 지내시오.

  • 11 11
    111

    촛불 탄압자........ 김수환
    ~~~~~ 작년에 느꼈지......

  • 14 9
    asdf

    죽으면서 '고맙다'고 한 인생은
    개인적으로 괜찮은 인생이다.

  • 14 12
    좌빨타령국가부도

    비록 정치적인 견해는 달리하지만....
    고인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며...영면을 빕니다...

  • 9 18
    111

    공권력에 의해 국민 불에 타 주었는데도 입닥친 인간 뒤졌는데
    난리가났다.........

  • 12 15
    111

    일제의 앞잡이가 세상을 떴군.
    ~~~~~

  • 16 8

    영원히 축복 받으소서...
    이제 그곳에서 영원한 안식과 저희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십시오...
    Ps. 이런 기사에서도 보수니 뭐니 하지 맙시다... 보기 좋지 않습니다

  • 17 9
    cecil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편안한 안식에 드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편안한 안식에 드소서

  • 13 12
    더워~~ㅠㅠ

    영원한 안식을~~~
    기원드리며, 억압의 시대에 소금으로 나타나주어서 감사합니다. 최근에 보수층이 추기경님을 이용했지만 추기경님의 본심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 맨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