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라는 거대한 사회적 의제 앞에서 평범한 택시노동자 고 허세욱(당시 54)씨가 ‘한미 FTA 반대’ 구호를 외치며 온 몸을 불사른 지 1년하고도 14일이 지났다.
많은 이들이 매일 밤 광화문과 영등포 한강성심병원 앞에 모여 촛불을 들고 애타게 생환을 희망했지만 그는 결국 그해 4월 15일 오전 11시 23분께 폐에 들어찬 화기를 이겨내지 못한 채 패혈증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한미FTA폐기'를 외치며 협정 체결 하루 전인 2007년 4월 1일 분신을 시도한 故 허세욱씨의 모역.ⓒ최병성 기자
故 허세욱씨 1주기 추모제열린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
고인이 사망한 지 1년이 지난 2008년 4월 15일 낮 12시, 그의 유해가 묻힌 경기도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는 2백여명의 추모객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모란공원 주차장에는 생전에 그와 16년 간 동고동락했던 한독운수 택시노동자들의 택시가 줄지어 서 있었고 듬성듬성 벚꽃이 자리 잡은 묘역 들머리에는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는 단체들의 추모 현수막이 내걸렸다.
묘역 바로 곁에는 생전 고인과 함께 싸웠던 단체들의 깃발이 꽂혀있었고 스피커에서는 연신 고인을 추모하는 노래 ‘가슴에 새긴 외침’이 흘러나왔다.
‘너무나 그리운 당신,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참여연대) ‘허세욱 동지, 우리는 당신을 영원히 기업합니다’(운수노조 민주택시본부 한독운수분회)
낮 12시 20분께 김화수 한독운수조합 사무국장이 고인의 살아온 길을 회고하며 추모제가 시작됐다.
1953년 빈농 가정의 5남3녀 중 4째로 태어나 중학교만 졸업, 서울 철거촌에서 도시빈민 그리고 택시노동자로 살아온 30여년 세월, 1991년 노조 활동 이후 사회 참여활동, 봉사활동에 전념했던 그의 삶이 김 사무국장을 통해 소개됐다.
허세욱씨의 1주기 추모제가 열린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 곳곳에는 고인을 그리는 현수막이 걸렸다.ⓒ최병성 기자
고인의 죽음 이후 1년, 한미FTA 비준 앞둔 진보진영의 반성
추모사가 이어졌다. 진보진영 주요 단체 대표들의 추모사에서는 고인의 죽음에도 여전히 한미FTA 비준을 목전에 두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애통함과 죄스러움이 배어나왔다.
공교롭게도 고인의 1주기 추모제가 열린 이날,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후 첫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주요 의제 중 하나는 한미 FTA의 조속 비준이다.
국회 또한 이날 여야 합의를 통해 기존의 관례를 깨고 민생법안 처리를 위한 임시국회를 열기로 했다. 17대 마지막 국회는 한미FTA 비준동의안을 당장이라도 통과시킬 태세다.
천영세 민주노동당 대표는 “오늘 이 나라 대통령이 미국으로 갔다. 한미FTA와 한미 동맹을 추진하기 위한 방문이다. 국회에서는 오늘 그동안의 관례를 깨고 5월 임시국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민생국회라는 이유를 들고 있지만 한나라당은 한미FTA 비준동의안을 다수결로라도 밀어붙이겠다고 한다”며 “열사를 뵐 면목이 없다”고 고개를 떨궜다.
천 대표는 “한미 FTA 폐지하고 저지해야 하는데 열사 앞에서 여전히 부끄럽기만 하다. 힘을 합쳐도 모자란데 진보정치 세력은 갈라졌다“며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가 잘못한 점이 있다면 크게 꾸짖어 달라“고 말했다.
오종렬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대표는 “불길 너머에서 병상에서 타버린 성대로 외치시던 ‘한미FTA폐기하라’는 외침에도 산 자들, 우리는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한 채 한 해를 보내고 있다”며 “엄중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뼈를 깍 듯 나를 먼저 반성하자”고 당부했다.
추모제에는 한미FTA저지범국본,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참여연대 등 각계 시민사회단체 대표를 비롯한 2백여명의 추모객이 참석했다.ⓒ최병성 기자
진보진영 “허세울 열사가 바라는 건 추모가 아닌 투쟁”
추모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고인의 죽음 이후 지난 1년, 한미FTA 찬반여론이 역전되고 18대 국회에서는 FTA 찬성론자들이 80% 이상 의석을 석권한 현 상황에서 재투쟁을 다짐하는 남겨진 자들의 절박함이 묻어나왔다.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은 “어느덧 1년이 흘러 물결을 이루던 눈물도 당신과 함께 하고자 했던 수많은 결의들도 지쳐있지만 당신이 바라는 건 추모가 아닌 투쟁임을 알고 있다”며 “오늘 우리의 추모제는 또 다시 투쟁과 연대를 결의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배종렬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상임대표는 “한미FTA는 이 나라 대선과 총선에서의 패배로 국회 비준을 막아낸다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고 국회는 우편향 보수 세력의 의해 장악돼 암울하기 그지없다”며 “그러나 우리는 이명박 정부에 맞서 예전보다 더 큰 단결된 힘으로 싸워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노회찬 진보신당 상임공동대표는 “18대 총선의 당선자 중 FTA 찬성론자가 2백70명이 넘는 참혹한 상황에서 더 이상 최후의 보루를 비준동의권을 갖고 있는 국회로 삼을 수는 없다”며 “국민 속으로 들어가 국민들과 함께 비준을 막아내겠다”고 말했다.
1시간 30분 가량 진행된 추모제는 내년 2주기에 맞춰 출간되는 ‘허세욱 평전’을 집필 중인 송기역 작가의 추모시 낭송과 민중가수 김영시가 추모곡 공연, 추모객들의 헌화를 끝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모든 행사를 마무리하고 돌아선 추모객들의 발걸음은 무거워보였다. 진보정치권의 분열, 보수세력의 개헌 의석 확보에 강경 일변도로 탈바꿈한 공권력과 맞닥뜨려야하는 진보진영의 엄혹한 상황을 보여주는 듯했다.
허세욱씨의 영전에 헌화하는 추모객들.ⓒ최병성 기자
‘허세욱 정신계승사업회’, 추모기념관 열어
한편 참여연대,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등 시민사회단체들의 참여로 발족한 허세욱 정신계승사업회는 이날 1주기 추모제에 이어 오후 6시 고인이 16년간 몸담았던 서울 봉천동 한독운수안에 ‘허세욱 추모기념관’을 개소한다.
추모기념관에는 고인의 유품과 고인이 생전 직접 제작해 나눠줬던 팜플렛, 각종 집회에서 촬영된 고인의 사진과 친필 유서 등이 전시될 예정이며 이날 오후 정식 개소식 이후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
추모사업회는 이날 추모기념관 개소를 시작으로 내년 2주기 추모식에 맞춘 ‘허세욱 평전’ 및 유고집 추란, 민족민주열사 유가족 후원 및 장학사업 등 다양한 사업을 펼쳐나갈 예정이다.
1주기 추모제에 맞춰 출범한 허세욱 기념사업회는 추모기념관 개소를 비롯해 고인을 기리는 각종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