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 인상 없이는 '집값 급락' 기대 못한다
[기고] “금리 인상하면 경기 침체된다”는 주류의 거짓말
관심이 쏠리는 곳은 언론의 반응이다. 금리동결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기사의 논조는 물론 언론에 자주 나오는 경제학자나 경제학교수들도 한결같이 “금리인상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언론 기사나 칼럼에서 “금리를 인상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학자나 전문가를 본 적이 없다. 만약 신문이나 방송에서 그런 주장을 한다면 경제에 무지한 사람으로 취급당할 분위기다.
제도권 경제학자들의 금리인상 반대 논리
그러나 국민의 절반이 넘는 집없는 서민과 청년들의 삶에서 가장 큰 문제는 폭등한 집값이다. 그들의 살림살이를 흔히 “민생”이라 부르는데, 그 민생을 살리는 것은 집값 하락 없이는 불가능하고, 그러려면 금리인상이 신속하게 또 큰 폭으로 단행되어야 한다.
집값폭등에 불을 당긴 주범이 대출이고, 그 대출이 급증한 것은 초저금리 때문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긴 설명은 사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 달여 전 후배의 경험담을 들으며 대출이 집값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실감한 적이 있다. 작년 늦가을 주택투자를 위해 서울 곳곳을 찾아다니던 후배는 적당한 매물을 발견하여 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대출을 받으러 은행지점을 찾아가서 가슴이 철렁했다고 한다. 집이 있는 사람은 추가 주택대출이 전면 금지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찌어찌하여 당초 예상의 절반 정도를 대출받아 잔금을 치렀지만, 소위 ‘대출받아 주택에 투자하기’는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는 “작년 말부터 서울 집값이 하락하는 것은 주택소유자에게 대출을 금지했기 때문이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집값하락의 일등공신은 ‘대출 규제’
역으로 말하면 지난 4년 집값을 폭등시킨 가장 큰 요인이 대출이었음을 말해준다. 만약 집권 초기에 대출을 억제하는 정책을 시행했더라면 서울의 집값 폭등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집없는 서민과 청년들의 고통도 없었을 텐데, 하는 탄식이 내 입에서 나왔다.
대출규제가 작년 말부터 집값을 하락세로 돌려놓긴 했으나, 하락속도는 상승속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만하다. 신규 투기수요는 차단되었으나 다주택자의 매물은 출회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주택자의 매물이 출회되려면 주택보유 비용을 높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금리인상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경제학교수나 박사라는 사람들이 금리인상은 경제에 무지한 자들이나 하는 주장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으니 금리인상은 기대할 수 없다.
일반인의 머릿속에도 이런 주장이 심어져 있다. 금리의 결정은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라고 생각하는 일반인들로서야 신문과 방송에서 자주 나오는 “유명”교수나 박사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런 결과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이 주장을 깨지 않고서는 금리의 신속한 인상을 기대할 수 없고, 따라서 집값의 큰 폭 하락도 기대하기 어렵다.
‘집값 큰 폭 하락’의 필수조건인 금리인상
경제학교수든 박사든 금리인상을 반대하는 첫째 논리는 경기침체다. “금리인하는 경기부양 효과가 있고, 금리인상은 경기를 위축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논리가 경제학 좀 아는 사람들에겐 상식으로 통한다.
도대체 이런 주장이 어떻게 경제학자들 머릿속에 확고한 신념으로 심어졌을까? 현실을 보면 이런 주장과는 완전 반대의 현실이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지난 10여년 한국경제와 세계경제는 사상최저금리를 유지했는데도 경기가 좋아지기는커녕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주류 경제학자들은 여전히 이 주장을 신봉하고 있다. 그들도 학자들이므로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어떤 논리라는 것이 있을 텐데 그 논리는 무엇인가?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경제학도들이 가장 많이 읽는 <맨큐의 경제학>을 다시 읽어봤다. 그리고 한 문장을 발견했다.
“어느 경우든 통화량이 증가하면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증가한다.”
통화량 증가가 어떤 경로를 거쳐 수요를 증가시키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마치 밤이 되면 어두워진다는 말처럼 자명한 사실을 말하듯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어느 경우든”이란 말 자체가 논리학에서 말하는 항상 “참”인 명제, 즉 “공리”를 뜻하는 말 아닌가.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성립한다는 것이니, 절대불변의 진리 혹은 항상 성립하는 법칙이라는 말이다.
‘통화량이 증가하면 수요가 증가한다’는 “참”인 명제인가?
이 한 문장이야말로 주류경제학자들이 신봉하는 ‘금리 효과’ 이론을 떠받치는 주춧돌 같은 명제다. 주류경제학은 이 문장이 공리라는 전제로 논리를 전개한다. 이 문장의 앞뒤에 한 문장씩을 추가하면 이런 논리로 발전한다.
“금리를 인하하면 통화량이 증가한다. 그리고 통화량 증가는 어느 경우든 재화와 서비스의 수요를 증가시킨다.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 경기가 부양된다.”
이렇게 하여 “금리인하는 경기부양 효과가 있다”는 논리가 완성된다. 이 논리의 일란성 쌍생아가 “금리인상은 경기둔화를 초래한다”이다.
위 논리의 첫 문장과 셋째 문장은 “참”인 명제다. 금리란 통화시장에서의 가격이다. 가격이 하락하면 수요가 증가하므로 금리하락은 “거의 항상” 통화량 증가를 초래한다. 또한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수요의 증가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경기를 부양한다. 거의 모든 경기침체는 수요부족 때문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첫째와 셋째 문장이 “참”인 것과 달리 둘째 문장은 “참”인 명제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에 “거짓”인 명제다. 지금 우리 현실을 직시하면 그 명제가 “참”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명박정부 이후 무려 10년 이상 금리가 비정상적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했다. 최경환이 네 차례 기준금리를 인하한 2014년 이후에는 줄곧 1%대에 머물렀다.
앞에서 말했듯 금리가 낮으면 돈을 빌리는 가격이 싸지는 것이니 돈의 수요가 급증했고 시중에 돈이 엄청나게 풀렸다. 위 명제에서 말하는 “통화량이 증가하면”이라는 전제조건이 성립된 것이다.
그런데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나? 천만의 말씀이다. 만약 수요가 증가했다면 기업의 매출이 증가하고 따라서 생산이 증가했을 것이다. 소비가 생산을 이끌어서 경제성장율이 높아지고 경기는 활활 살아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정부 이후 줄곧 성장률은 우하향 곡선을 그렸는데, 그 근본원인이 수요부족이었다.
주류경제학이 파놓은 “함정”
자본주의 선진국 경제도 똑같은 상황이었다. 미국과 유럽, 일본은 한국보다 더 낮은 제로 금리를 실행했고, 그것도 부족하여 통화를 무제한 공급하는 ‘양적 완화’를 실행했다. 그러나 수요는 살아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 많은 경제학박사들이 “어느 경우든” 성립하는 진리이자 법칙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그 명제가 왜 현실에서 성립하지 않았을까? 일반인들도 언뜻 생각하기에 시중에 돈이 많아지면 소비가 증가하는 것은 상식이지 않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착각 혹은 함정이 있다. 사람들은 자기 돈이 많아지면 소비를 늘린다. 그러나 시중에 돈이 많다고해서 소비를 늘리진 않는다. 시중의 돈이 내 돈은 아니지 않은가.
시중에는 돈이 넘쳐흐른다. 그러나 서민의 주머니는 텅텅 비어 먼지만 풀풀 날렸다. 이것이 지난 10여 년 한국의 현실이었다.
주류경제학 교과서가 “공리”라고 기술한 명제가 사실은 “거짓”이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 거짓 공리에 근거한 주류경제학의 통화이론은 모두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통화량이 증가하면 수요가 증가한다”는 이렇게 바뀌어야 “참”인 명제가 된다. “소득이 증가하면 소비가 증가한다”가 공리인 것이다.
만약 앞의 명제가 공리가 되려면 한 가지 명제가 추가되어야 한다. “통화량이 증가하면 개인(혹은 가계)의 소득이 증가한다.” 다시 말해 통화량 증가가 가계소득의 증가로 연결되면 소비는 증가한다.
그러므로 주류경제학자들의 금리효과에 대한 주장이 옳은 주장이 되기 위해서는 “통화량이 증가하면 소득이 증가한다”가 “참”임을 증명해야 한다.
만약 그것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금리인상이 경기침체를 심화시킨다”는 “거짓” 주장을 당장 멈춰야 한다. 그리하여 집없는 서민과 청년들의 고통을 해소할 집값 하락을 위한 금리인상을 신속하게 단행해야 한다.
<송기균경제연구소 (blog.daum.net/kigsong)>
<저작권자ⓒ뷰스앤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