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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盧대통령 개헌발의 국회연설 원고

"우리 사회의 신뢰 바로 세우기 위해 개헌 발의"

<청와대 주> 이 글은 국회연설을 위해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작성해 두었던 대국회 연설문 원고입니다. 비록 국회연설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대통령이 개헌을 제안했던 취지가 소상하게 담겨 있습니다. 개헌에 대한 책임있는 공론과 역사의 기록을 위해 공개합니다.

존경하는 국회의장, 국회의원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

저는 이미 말씀드렸던 대로 헌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대통령의 연임을 허용하고,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일치시키자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개헌이 꼭 필요한 이유를 다시 말하라고 한다면, 저는 ‘규범, 신뢰, 기회’ 이 세 가지 단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규범은 사회의 기초입니다. 사회는 규범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좋은 규범은 좋은 사회를 만듭니다. 부실한 규범은 부실한 사회를 만듭니다. 자유와 평등, 평화와 진보, 공정, 투명과 같이 소중한 가치는 민주적인 규범이 있어서 비로소 보장되고 있습니다.

독재자들은 언제나 정권 유지를 위해 민주적인 규범을 독재에 편리한 규범으로 뜯어 고쳤습니다. 그 결과 민주주의는 파괴되었습니다.

보다 발전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보다 민주적인 규범이 필요하고, 보다 합리적인 사회를 위해서는 보다 합리적인 규범이 필요합니다. 보다 효율적인 사회를 위해서는 보다 효율적인 규범이 필요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규범이 진보한 것도 사회문화가 진보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규범이 사회의 진보를 이끌어 온 것도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헌법은 모든 규범의 근본입니다. 헌법에 문제가 있다면 헌법을 고쳐야 합니다.

우리 헌법은 민주정치를 해 본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부실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여러 번 고치기는 했지만, 그 대부분이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와 성장하는 국민의 역량에 맞게 고친 것이 아니라, 독재자들이 그들의 정권을 연장하고, 국민을 속이고 통제하고, 나아가서는 독재자와 독재에 협력한 사람들의 기득권을 누리기에 적합하도록 고친 것이어서 헌법은 더욱 부실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의 헌법은 20년 전 6월항쟁의 결과로서 만들어진 것이어서 이전과는 크게 다릅니다만, 이 또한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6·29선언으로 독재정권이 한발 물러서기는 했으나, 그들이 만들어 놓은 각종의 권력기구와 30년간 사회 구석구석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기득권 세력은 여전히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었고, 그에 반해 민주진영은 분열되어 있어서, 나라의 미래를 위한 진지한 토론을 하기에는 너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사정은 이러한데 대통령 선거가 6개월도 남지 않은 기간 동안에 헌법을 개정하고 선거법을 손질하고 후보를 뽑아서 선거를 치르자니 자연 헌법을 논의할 시간은 채 넉 달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만든 헌법이니 아무래도 그 내용이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대통령 단임제로는 책임정치 어려워

그 중에서도 대통령 단임제는 당시의 특수한 사정으로 만들어진 제도로서 특별히 손질이 필요한 제도입니다.

대통령 단임제는 ’80년 신군부가 국민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이미 채택한 것으로 민주주의 제도로서는 합리적 근거가 미약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여러 차례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과 그를 통한 독재의 연장에 시달린 국민들은 단임제가 장기 집권을 예방할 수 있는 좋은 제도로 인식하고 있었고, 정권을 내놓아야 하는 사람들도, 정권을 잡아야 하는 사람들도 각기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단임제를 찬성하여 채택된 것입니다.

대통령 단임제는 결코 좋은 제도는 아닙니다. 오랜 기간 독재 정치에 시달린 나라, 아직도 민주주의에 자신이 없는 나라에서나 채택하고 있는 제도이지, 민주주의를 잘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채택하지 않고 있는 제도입니다.

단임으로는 책임정치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연임을 걸고 국정을 수행하고 국민의 평가를 받아 진퇴를 결정하는 것이 책임정치의 본질에 맞는 것입니다.

단임제는 미래를 내다보는 정치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멀리 내다보고 국정을 계획하고 추진하기 위해서는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단임제 아래서는 연임이 없으니 임기 3년이 지나면 당정관계에 레임덕이 옵니다. 당정 분리를 하지 않더라도 이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13대 대통령 이후 모든 대통령이 탈당을 해야 하는 사태는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도 매우 불행한 일일 뿐만 아니라 국정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정당이 책임정치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책임정치의 실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에도 ‘임기 6년차의 저주’라는 연구논문이 나와 있는 것을 보면, 대통령제 아래서는 레임덕 문제가 책임정치의 장애사유가 되는 것을 회피하기 어려운 일인 것으로 보입니다만, 우리의 경우는 미국의 경우와 비교하면 ‘임기 3년차의 저주’라고 해야 할 형편입니다.

책임 있는 국정수행, 멀리 내다보는 정치를 위해서 대통령 단임제는 이제 고쳐야 합니다.

여소야대에서는 정부가 제대로 일하기 어려워

대통령 단임제보다 더 국정을 어렵게 하는 것이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임기가 서로 다르니 선거가 너무 자주 돌아오고,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대통령에 대한 견제심리가 작용해서 여소야대의 국회가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이 두 가지 모두가 책임 있고 효율적인 국정운영을 어렵게 합니다.

먼저 여소야대의 문제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소야대의 국회 아래서는 정부가 일을 제대로 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리 창조적이고 상상력 있는 지도자도 적극적이고 자신있게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교육, 복지 등 획기적이고 과감한 정책이 꼭 필요한 경우에도 말조차 꺼내기 어려웠습니다.

개혁을 하는 데는 국회의 도움이 필수적입니다. 개혁은 국회의 입법이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당이 국회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여 국회를 지배하게 되면 원활한 국정 운영도 개혁도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야당은 책임을 지고 무슨 일을 하는 것보다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을 본분으로 생각하는 정당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사례를 보아도 이런 이치는 사실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13대 국회 이후, 정부입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데 걸린 시간이 여대야소 국회에서는 평균 2.6개월이 걸린 반면 여소야대 국회에서는 평균 4.1개월이 걸렸습니다.

미국의 경우에도 국회의원의 자유로운 표결이 일반적으로 허용되어 있어서 당론투표가 일상적인 우리와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여소야대 상황에서 야당이 예산안 처리를 지연시켜 정부의 일부가 폐쇄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으며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 도입, 조세제도 개혁 등이 좌절되기도 했습니다.

중남미의 경우를 보면 여소야대가 자주 나타나고, 그에 따라 대통령이 공약한 개혁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아서 국가 발전이 지체되고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선거를 동시에 실시하여 여소야대의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자는 것입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야당이 더 많아야 한다는 견해를 가진 국민이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견해는 원론적인 3권 분립의 정신에 충실한 생각일 수도 있고, 지난날 국회가 독재 정부의 권력 남용에 대해 아무런 견제도 하지 못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국민들이 지금도 정부를 불신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정치에는 맞지 않은 생각입니다.

오늘날의 정치는 정당정치입니다. 권력에 대한 견제의 기능은 정당 간의 견제와 경쟁의 구조로 잘 작동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국회의 견제기능은 중요성이 낮아지고, 오히려 여소야대로 인한 지나친 견제가 국정운영을 어렵게 하는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국회는 견제만 하는 곳이 아니라 일하는 곳

그리고 국회의 본분이 견제에 중심이 있다는 생각도 옳은 것이 아닙니다. 국가의 발전을 위해 잘못된 제도를 바로잡고,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인 제도를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모두 법을 만들고 고쳐야 하는데, 이 일은 국회가 하는 일입니다. 이처럼 국회도 견제만 하는 곳이 아니라 일을 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국회도 책임은 없고 반대를 본분으로 생각하는 야당보다는 책임을 지고 일을 하는 여당이 더 많아야 국정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상 더 독재의 시대가 아닙니다. 견제가 필요하다고 국회를 여소야대로 만들 일이 아니라 다음 선거에서 책임을 묻고 정권을 바꾸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일을 할 수 있게 해놓고 책임을 물어야지 일을 할 수 없도록 발목을 잡아 놓고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올바른 견제가 아닙니다.

치열하게 경쟁하는 세계 속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요소는 변화의 속도입니다. 변화의 속도는 개혁의 속도에 달려 있습니다. 이기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혁의 속도를 더 높여야 합니다. 1년에 30조 원씩 잠재 적자가 쌓이는 국민연금 개혁을 국회에서 3년간이나 미루고 있을 일이 아닙니다. 사법개혁도 인권뿐만 아니라 국가 경쟁력이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합당한 이유 없이 1년 반이 다 되도록 지체시킬 일이 아닙니다.

물론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같이 한다고 여소야대 국회가 생기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두 가지 선거를 동시에 하더라도 여소야대가 될 수는 있습니다. 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가 비슷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확률은 현저히 줄어들 것입니다.

여소야대 폐해 극복의 현실적 대안은 임기 일치

그래도 여소야대가 되는 경우에는 정치문화로 이를 극복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는 대통령과 국회, 대통령과 야당 의원 간의 대화와 협력이 가능한 정치구조와 문화를 통해 여소야대로 인한 무책임과 비능률을 어느 정도 줄이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동거정부라는 정치관행을 개발했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폐해가 적지 않아서 대통령과 국회의 임기를 일치시키는 개헌을 했습니다. 그 밖의 일부 대통령제 국가는 연합정부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 어느 것도 되지 않아서 대결 정치를 해소하지 못하는 국가는 국정의 비효율로 국가발전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여소야대로 인한 국정의 비효율을 방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내각제를 하는 것입니다. 내각제에서는 국회의 다수가 아니고는 정부가 성립될 수조차 없으므로 여소야대로 인한 이원적 정통성 문제나 국정의 비효율 문제도 없고, 국정의 책임자가 물러나는 시기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선거에서 패배하는 그날이 물러나는 날이어서 레임덕 문제는 생기지 않습니다. 원래 이것이 저의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이를 개헌안으로 제기할 만한 상황이 아니므로 개헌안으로 내놓지는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지금 여소야대 국회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일치시키는 개헌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도 여소야대 국회가 되는 경우에는 동거정부, 연합정부, 대화와 협력의 정치문화 등의 관행을 만들어 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야당은 선거 때마다 ‘정권 심판’ 주장

다음으로는 선거가 너무 잦은 문제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대로 가면 선거가 너무 많습니다. 올해 대선을 비롯해서 2008년 총선, 2010년 지방선거, 2012년 총선과 대선 등 올해부터 2016년까지 10년 동안 전국단위 선거가 7번이나 있습니다. 재·보궐 선거까지 합친다면 그 수가 너무 많아 헤아리기 힘들 지경입니다.

단지 선거가 많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선거가 있을 때마다 정권의 심판을 주장하고, 일상적인 국정운영이 선거운동으로 시비가 걸려 정책 수행이 어려워지고 정책의 신뢰가 떨어지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4년 동안 재·보궐 선거를 포함해서 10번의 선거가 있었고, 그때마다 선거용 정책이라는 시비를 피하기 위해 정책발표를 뒤로 미룬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정부가 발표한 정책치고 선거용 선심정책이라는 시비가 걸리지 않은 정책은 거의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지역 살림을 말해야할 기초의회 선거에서조차 정권심판을 구호로 내세우는 형편이니 국정운영이 제대로 되기가 어렵습니다.

중간평가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있을 것입니다. 이 또한 지나친 것입니다. 그동안 참여정부에서 시행한 주요 정책 134건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정부가 어떤 정책을 과제로 삼아 연구하고 다듬어서 법안으로 만들어 국회에 제출하는 데 평균 21.8개월이 걸린 것으로 나왔습니다. 그 중 길게는 50개월 넘게 걸리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1년이 멀다하고 중간평가를 한다는 것은 결코 합리적인 일이 아닐 것입니다.

선거 횟수를 줄인다 하여 민주주의가 손상되는 일이 아니라면 선거는 가급적 모아서 치르는 것이 더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일일 것입니다. 법률로 줄일 수 있는 것은 법률로 줄이고, 헌법으로 줄여야 하는 것은 헌법을 개정하여 줄여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일치시키자는 것은 이런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개헌의 필요성은 오래 전부터 공론화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저의 생각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동안 각 당의 공약이나 그 당에 소속된 주요 정치인들의 발언과 활동을 모아보면, 어제 오늘 생긴 정당 말고는 개헌을 말하지 않은 정당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정당뿐만 아니라 학계, 언론 모두가 개헌을 말해 왔습니다. 그리고 국민 대다수도 개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 논의에서 개헌이 필요하다고 제기된 논점이 비단 대통령 단임과 임기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논의에도 대통령 단임과 임기에 관한 문제가 포함되지 않았던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대부분이 대통령 단임제와 임기에 관한 문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로 보면 대통령 단임제에 관한 개헌의 필요성은 오래 전부터 공론화 되고 논의도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공론을 실천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겠습니다. 불합리한 규범은 고쳐야 합니다. 더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 좋은 규범을 만들어야 합니다.

국민은 정치에 높은 책임과 신뢰를 요구

제가 개헌을 발의하는 두 번째 이유는 ‘정치의 신뢰’를 위해서입니다.

‘신뢰’는 규범 못지않은 사회적 가치입니다. 신뢰가 무너지면 사회는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신뢰가 낮은 사회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근래 경영학자들은 한 나라 경제의 승패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사회적 자본이고, 사회적 자본의 핵심 요소는 신뢰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국가경제의 성공을 위해서도 신뢰는 필수적입니다.

정치의 신뢰는 더욱 중요합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정치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유일한 권력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정치는 최종적인 결정을 하는 역할을 해왔고, 따라서 국민들은 아직도 정치를 최고의 권력으로 생각하고 최고로 높은 책임과 신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자주 하면 신뢰가 무너집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신뢰는 무너집니다. 고의로 약속을 어기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이행할 수 없는 약속을 해서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경우에도 신뢰는 무너집니다. 거짓말이나 약속은 아니라도 이해관계에 따라 말을 바꾸어도 신뢰가 무너집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사람들을 당장은 이해관계나 기분에 따라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기억하고 불신하게 됩니다.

한나라당이 말 바꾸자 다른 정당도 따라가

저는 후보시절 개헌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당선자 시절에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구체적인 일정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대선 이전부터 최근까지 많은 정치인들이 개헌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특히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분들은 현직에 있을 때 대부분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습니다. 개헌의 내용에 대해서는 4년 중임제가 가장 적합한 제도라고 이야기했으며, 심지어 개헌 시기는 2006~2007년이 최적기임을 강조했습니다. 언론의 질문에 답한 경우도 있고 스스로 주장하거나 연구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그 결과를 발표한 경우도 있습니다만, 어느 경우에나 개헌이 필요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언론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동안 언론들이 질문을 통해 정치인들의 입에서 개헌 이야기를 끌어내어 보도한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사설로써 주장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언론이 다 그랬습니다.

반대로, 그동안 저는 개헌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정치인이나 언론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대부분의 정치인들과 언론이 개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여 공론을 형성하려고 노력했거나 적어도 동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열린우리당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태도를 바꾸고 있습니다. 정치인도 언론도 모두 저의 개헌 발의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 대부분이 2006년이나 2007년이 개헌에 적절한 시기라고 말했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대통령 선거가 가까워지면서 말을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한나라당이 먼저 말을 바꾸고 다른 정당들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한나라당이 말을 바꾸기 시작한 것은 2006년부터입니다. 한나라당 소속 차기 대선 예비후보들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높이 올라가서 굳어져 버린 것처럼 보인 때부터입니다. 그때부터 한나라당은 대선구도가 흔들리면 안 된다는 이유로 개헌에 대한 말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안한다는 것은 아니고 다음으로 미루자는 것이었습니다.

2002년에도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한나라당 후보의 지지도가 높을 때는 개헌이 필요 없다고 말을 했다가 소위 ‘대세론’이 무너지자 개헌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입장으로 선회했습니다. 그러다가 본선에 들어가서 백중세가 되자 자신의 임기를 단축하는 한이 있어도 개헌을 하겠다고 공약했습니다. 당시는 개헌을 하기에 적절한 시기도 아니었는데 왜 개헌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떻든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개헌이 왜 한나라당에 불리한지 알 수 없어

개헌을 하면 어떻게 되어서 대선 구도가 흔들리게 되는 것인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나, 어떻든 말 바꾸기는 이렇게 정략적인 계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통령의 개헌 발의가 정략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이어서 개헌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다음 정권으로 미루자고 합니다.

대통령의 개헌 발의가 정략이라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개헌이 대통령에게 유리하거나 반대편 사람에게 불리한 사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개헌이 어떻게 해서 저나 저와 가까운 편에게 유리한 일이 되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여론조사를 보면, 대통령이 지지기반의 붕괴를 무릅쓰고 결단하여 천신만고 끝에 타결한 한미 FTA조차 한나라당 대선주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결과가 나오고 있는 형편인데, 개헌이 어떻게 해서 한나라당에게 불리한 결과가 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근시안적인 지도자여서는 안 돼

개헌으로 유리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사람일 것입니다. 개헌이 되면 다음 대통령은 8년까지의 임기를 내다보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4년 후에도 국회가 여소야대가 될 가능성이 줄어들어서 안정되고 효율적인 국정운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책임 있는 국정운영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서 국민들이 이익을 보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차기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분들이 개헌을 반대하는 것을 보면, 이 분들은 당장 대통령이 되는 데만 급급할 뿐, 당선된 다음에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데는 관심이 없는 분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라가 잘 되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 당장의 유리한 상황을 지키는 데 급급한 나머지, 상황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만으로 무엇이 유리한지 아닌지도 판단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라의 먼 장래를 위해서는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여 1년 앞의 유리함도 내다보지 못하는 그런 근시안적인 지도자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해관계와 야합하는 정치는 역사를 퇴행시켜

한나라당은 개헌을 다음 정부로 미루자고 합니다.

다음 정권에서 개헌을 하자면 대통령의 임기를 1년이나 단축해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사정이 이러하니 다음 정부에서 개헌을 하겠다면 이런 장애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구체적인 방안을 밝혀달라고 요청했는데도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과연 다음 정부에서는 개헌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두 번이나 말을 바꾸었으니 또 다시 말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런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말을 바꾸는 것이나, 당장 눈앞에 닥친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되지도 않을 일을 약속하는 일이야말로 정략입니다. 그리고 이런 정략적인 행동이 정치 불신을 만듭니다.

저는 저의 개헌 제안이 정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정략이 있을 수 있는지를 설명해달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요청했으나, 지금까지 그 누구도 아무런 설명을 해 준 일이 없습니다. 저의 개헌 제안이 정략이라는 주장이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정략이 있을 수 없는 데도 정략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야말로 정략입니다. 이 또한 정치 불신을 조장하는 일입니다.

문제는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만 불신을 받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 모두가 불신을 받게 된다는 점입니다. 정치가 끊임없이 이해관계와 야합하면 역사를 퇴행시킬 수 있습니다. 도덕적 가치가 없는 정치는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모두가 망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언론도 말 바꿔... 장기집권 음모라는 비난까지

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인들은 이해관계가 있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이해관계도 없는 언론들조차 일제히 말을 바꾼 이유를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언론들도 정치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역사적 책무나 도덕적 가치에 대한 판단도 없이, 단지 ‘소수이면서 왜 개헌을 제기하느냐, 그래서 개헌이 되겠느냐.’는 식으로 본질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언론의 신뢰도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는 것입니다. 훗날 참으로 부끄러운 기록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정도를 넘은 일도 있습니다.

한나라당은 저의 개헌 제안을 ‘정권연장의 음모’라거나 ‘장기집권을 위한 음모’라고 비난하고 일부 신문은 이를 주먹만 한 글씨로 받아썼습니다. 지난 날 우리나라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이 말은 제가 대통령 선거에 한 번 더 출마하려는 의도라는 뜻으로 읽힐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런 주장과 보도의 결과인지 아닌지는 증명할 수가 없으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제가 대통령으로 다시 출마할 수 있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20%나 되었습니다.

정권연장, 장기집권이라는 단어를 골라 쓴 사람이나 받아 쓴 사람은 이런 결과를 기대하고 그 말을 골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흡족해 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대통령이 다시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지하고 여론조사를 하면 절반이 넘는 국민이 참여정부 내 개헌을 찬성하는 결과가 나오는 상황을 고려하면 정략치고는 매우 성공한 정략이 된 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악의적인 왜곡입니다. 그야말로 부도덕한 정략입니다. 한국정치의 슬픈 현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보 같은 해명이지만 다시 한 번 진실을 말합니다. 우리 헌법상 어떤 개헌을 하더라도 저는 다시 대통령에 출마할 수가 없습니다. 출마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출마하지 ‘못한다.’입니다. ‘않는다.’는 말은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헌 발의는 우리 사회의 신뢰를 바로 세우는 일

되지도 않을 개헌을 왜 발의하느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입니다. 개헌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신뢰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참여정부 최고의 목표는 ‘원칙과 신뢰’입니다. 후보시절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고, 참여정부가 출범할 때부터 첫 번째 국정원리로 천명했습니다. 어린 시절, 어른들이 정치하는 것을 보고 느낌으로 기억하고 있던 것을, 훗날 스스로 정치를 경험하면서 다시 확인하고 다짐한 것입니다.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소신입니다. 저는 이 소신을 위해 여러 번 정치생명을 걸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신뢰를 세우기 위해서는 제 모든 정치적 자산을 바쳐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 사회의 신뢰를 바로 세우기 위해 개헌을 발의하는 것입니다.

개헌이 이루어지면 저의 신뢰만이 아니라 우리 정치 모두의 신뢰가 함께 회복될 것입니다. 대통령을 반대하는 것이 무조건 선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개헌을 반대하고 있는 분들이라도 함께 힘을 합해 개헌을 이루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저는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역사의 진보를 믿습니다. 나라의 미래를 믿습니다. 한나라당이 대북 정책에 관해 입장을 바꾸었듯이 개헌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변화와 개혁은 제 때 이루어져야

중요한 것은 ‘기회’입니다. 이것이 지금 개헌을 발의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날 서구 문명이 문을 두드릴 때 우리는 기회를 외면했습니다. 그 결과는 망국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수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잘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6월항쟁과 그에 이은 헌법개정, 하나회 척결, 정권교체, 투명한 정치, 북방외교, 남북정상회담, 한미동맹 재조정, 금융실명제, WTO 가입, 4대 부문 개혁, 과학기술 혁신, 정부혁신, 국방개혁, 그 밖에 대부분의 국가적 과제들이 크게 기회를 지체하지 않고 잘 가고 있습니다.

물론 기회를 놓쳐서 부담이 많은 분야도 있습니다. 균형발전, 양극화 해소, 저출산·고령화 대비 등이 그것입니다. 교육 분야의 혁신, 사법개혁도 좀 더 속도를 내야 할 분야입니다.

변화와 개혁은 제 때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 인천공항을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우리가 어찌 동북아 허브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6월항쟁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어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북방외교, 금융실명제, 4대 부문 개혁, 정권교체, 일일이 말을 하자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올해가 헌법 개정의 최적기

헌법 개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 발전을 위해 꼭 해야 할 일입니다. 할 수 있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해야 합니다.

개혁과제 중에서도 헌법 개정은 기회가 특별히 까다롭습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에 관한 헌법 조항을 고치는 일은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가 일치되는 시기가 아니면 하기 어렵습니다. 헌법 개정을 위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의 임기를 단축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그런 일이 몇 번 있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모두 쿠데타 아니면 혁명적 상황에서 한 것입니다.

현행 헌법 아래서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가 비슷해지는 시기는 20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옵니다. 올해가 바로 그 해입니다. 올해에 헌법을 고치지 못하면 다시 20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개헌의 기회가 영영 물 건너 갈 수도 있습니다. 그로 인해 장기간 국가 발전이 지체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왜 이처럼 중요한 기회를 떠내려 보내야 합니까? 그래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헌법에는 위의 두 가지 말고도 고쳐야 할 부분이 더 있을 것입니다. 내각제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모든 문제를 포함하여 개헌을 논의하기 위해 다음으로 미루자는 주장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런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럴수록 이번 개헌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이번에 임기를 일치시키는 개헌을 해두지 않으면, 이후에는 임기의 불일치 때문에 개헌 논의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충분합니다. 20년 전, ’87년에는 6·29 선언이 있고 난 다음에 개헌도 하고 선거도 치렀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시간은 아직도 넉넉합니다. 고치자는 내용도 간단합니다.

나라 장래 위해 기회 놓치지 말아야

그 누구도 손해 볼 일이 없는 일입니다.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보다 나은 규범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아울러 정치의 신뢰가 무너지는 것을 막자는 것입니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 기회를 놓치지 말자는 것입니다.

결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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