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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줄 타는 엄마와 아이

[박영택 교수의 '화가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보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성병희의 근작을 만났다. 느닷없는 조우처럼 그림들이 다가왔다. 어렴풋하게 옛그림들이 떠올랐고 이내 그 기억이 좀 더 강렬해졌다. 내용은 다르지만 그녀의 손맛은 여전하다. 그림에서 풍기는 눅눅한 비애감이 그렇고 두툼한 촉각성의 질감이 그렇다.

그림에서 그 사람의 체취가 묻어난다. 그 사이 그녀는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으며 이런저런 사연과 우여곡절을 겪었던 모양이다. 삶은 우리에게 늘 상처를 안겨주고 모멸감을 심어주지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 삶은 여전히 지속된다. 그러니 살 수 밖에 없다.

살았던 삶에 대한 미련과 애환은 지속해서 산 자의 기억을 가득 채워 이제 그녀의 그림은 자신이 겪었던 특정한 생의 한 순간을 지속해서 불러내 심리적 정화의 수단으로 삼는 듯 하다. 철저하게 자신의 내상을 쓰다듬고 있었다. 아니 절규하고 있다고나 할까 아니면 너무 깊고 쓰린 상처를 토로하고 있는 듯 하다.

그녀는 화폭 앞에서 자기 내면의 상처를 불러낸다. 주술사나 심령술사처럼 혹은 정신과 의사 마냥 자기 안에 고인 것들을 끄집어낸다. 그림은 폭발할 것 같은 응어리를, 말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들을 외화시키는 일이다. 트라우마를 대면시킨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기억하고 재생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그것들을 유출시킴으로써 일정한 거리에서 이를 대상화하고 객관화해서 다시 보게 한다. 자신에게 과도하게 함몰되어있었던 순간에서 잠시 벗어나 있으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그리기는 치유적인 편이다.

오랜만에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 것 역시 자기치유적인 필요성 때문인 듯 하다. 그녀의 근작은 지난 고통스러운 기억과 삶의 경험에 대한 비극적 서사화다. 그런 인상이다. 사실 그 그림들은 너무 직접적으로, 강렬하고 노골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벗겨놓았다. 그 날 것의 상처를 목도하는 일은 불편하고 힘겨운 편이다.

외줄을 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다. 아들은 자신의 등에 꼭 매달려있다. 아슬아슬한 생의 찰나들이다. 그 줄 아래에는 무수한 자신의 분신들이 자욱하다. 하늘에는 검은 까마귀가 날고 있다. 음산하고 불길한 풍경이다. 아마도 결혼 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서 그로 인해 불거진 어떤 상처가 아물어가는 중이거나 조금씩 자신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 같다. 자기를 슬픔으로 고통으로 몰고 간 대상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는 조금씩 수그러들고 대신 그렇게 남은 자신과 아이에 대한 여러 단상들이 꿈처럼 출현한다.

자신과 아들이 동시에 등장하는 그림이 대부분이다. '나'는 단독으로 설정되기 보다는 대부분 아들과 일체가 되어 출현한다. 아이와 나는 분리되지 못한다. 나는 아들이자 동시에 아들은 곧 나이기도 하다. 내 삶의 근거는 아이이고 나는 아이의 유일한 보호자다. 모든 부모, 특히 엄마의 마음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 둘만이 남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 역시 크다. 앞으로 닥칠 불안과 공포도 스며있다.

그간에 이 모자가 겪었던 슬픔과 비애의 흔적들이 거대하고 장엄한 서사의 형식을 띠고 출몰한다. 이른바 알레고리로 읽힌 그림이다. 여러 이야기들이 서로 연결되어 출몰하고 장면과 장면이 영상적으로 얽혀있다. 단편적 장면이 콜라주되어 이야기 구조를 만들고 그 주변으로 상징적인 도상들이 뿌려져있다. 다분히 어둡고 음울하며 비극적이다. 직접적인 표현에서 오는 소박성, 익숙한 상황연출과 도상의 상투형으로 인한, 진부한 비극성과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이 관습적인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철저한 개인성의 생에서 오는 힘으로 인해 이 그림은 사뭇 뜨겁다. 섬뜩한 부분이 있다.

한 개인이 겪은 생의 비극을 그림은 어떻게 형상화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걸까? 화가는 진정 그 자신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을까? 자신이 스스로를 베드카우치에 앉힐 수 있을까? 어쨌든 지난 기억과 상처를 호명하고 이를 대상화하는 일이 현재 그녀의 일이고 생이다. 따라서 그녀의 근작은 상당히 복합적인 자화상인 셈이다. 무표정하거나 다소 슬픈 눈에 눈물이 흐르거나 눈 화장이 번진 모습이다. 자신을 외줄을 타는 광대로 분했다. 나는 그렇게 위태한 삶을 살고 그런 내 몸에 아들의 몸이 의지하고 있다. 아마도 결혼이 실패한 후 그렇게 남겨진 본인과 자식의 초상인 듯 하다.

중후하고 빛바랜 색채와 가라앉은 톤, 끈끈한 터치와 두터운 부조적 처리가 돋보인다. 그리기보다 손으로 직접 떠내고 만지는 촉각적 체험이 강렬하다. 상처의 외화나 잠재된 기억의 표출에서는 강한 촉각성이 요구되었나 보다. 슬픔과 비애를 감촉하도록 권유하는 듯 하다. 감정을 질료화 시키는 이 배려는 단지 표면적인 회화로 머물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메시지, 내용을 서술하는데 회화로는 부족함이 있었나 보다.

성병희의 근작은 슬프다. 그 슬픔의 근원이야말로 개인적인 것이겠지만 사실 우리네 삶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 타인과 만나 이룬 삶은 다분히 희극적이기보다는 늘 비극적인 편이다. 그 비극적 삶을 피하기는 어렵다. 성병희는 자신이 겪었던, 겪고 있는 생의 비극을 진솔하고 꾸밈없이 그렸다. 회화의 맛과 형상화의 매력을 동반하고 있는 근작에서 우리는 한 개인의 삶과 그 삶으로부터 파생하는 인간이 피하기 어려운, 누구나 보편적으로 겪는 고통과 절망, 아픔을 시각적으로 만나고 있다.
박영택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댓글이 2 개 있습니다.

  • 0 0
    sprite1001

    좋은 글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보시는 님께 호소합니다!!
    요즘 수도권 시내 버스에서도 광고하고 있는 유투브 컨텐츠에요.  
    부디 짬을 내셔서 확인하시고 바른 판단하시길 간절히 원합니다(눅17:26~30). 
    https://youtu.be/2QjJS1CnrT8

  • 4 0
    늘 감사 합니다.

    이 삭막환 정치현장의 글이 주류인데 이런 따뜻한 글을 보니 마음이 따뜻해져 옵니다. 늘 좋은글 잘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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