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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그러운 뱀이라도 그리지 않고는..."

[박영택 교수의 '화가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보다']

담배를 피우고 있는 여자의 초상이다. 가늘고 긴 손가락 사이로 역시 기다란 담배를 끼고 있다. 입술에 살짝 낀 담배가 뱀처럼 길다. 다소 마르고 괭한 얼굴에 안광이 반짝이고 가슴으로부터 밀어 올려진 목 사이에 장미가 끼워져 있다. 꽃을 회임하고 이를 출산하는 모습인가? 허공에 떠있는 장미꽃 한 송이는 연기와 함께 어디론가 떠나간다. 우측 상단의 연기는 영락없이 뱀의 형상을 닮았다. 한스럽고 서글플 때마다 그 징그러운 뱀을 그렸다는 천경자(1924~)의 자화상이다.

“징그러운 뱀이라도 무더기로 그리지 않고는 목숨을 이을 수 없었다.”

사실 그녀의 모든 그림 속 여자는 작가 자신의 분신이다. 딱히 어느 것이 자화상이다 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 그림은 1978년, 그러니까 그녀 나이 54세 때의 모습이다. 이제 조금씩 저물어가는 인생의 여정을 되돌아볼 만한 시간 때에 그려진 것이다. 어느 정도 고생도 면하고 생활이 비교적 안정되어 가던 당시의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조금은 여유로워 보이고 차분하다는 느낌이 든다. 약간 위쪽을 쳐다보는 듯한 눈망울은 지난 시간의 여러 회환을 삭히고 담배 한 모금으로 토해내 연기처럼 사라지게 하는 중인 듯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한국의 미술인 중 가장 글을 잘 쓴 이의 하나가 바로 천경자다. 근원 김용준은 별도로 치고 말이다. 나는 그녀의 수필에 늘 감탄한다. 특히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는 여러 번 숙독했다. 구수하고 감칠맛 나는 전라도 사투리에 비상한 기억력으로 지난 시간을 풀어내는 문장은 압권이다. 그리고 무척이나 진솔하고 적나라하다. 이 솔직함, 자기 생애가 고스란히 글과 그림으로 풀려나오는 힘이 천경자만의 매력이자 한국 현대미술, 동양화에서 보기 드문 높은 성과다.

자기 생애 안에서 그림의 소재를 길어 올리고 생의 환멸, 상처, 욕망, 환상과 여성적 정체성 모두를 화면에 버무려 놓은 이가 그녀다. 해방 이후 집안의 몰락, 한량이던 아버지, 한국전쟁과 지독한 가난 속에서 아끼던 친 여동생의 병고와 죽음, 일찍한 결혼과 출산, 이혼의 소용돌이, 그리고 괴로운 사랑의 경험이라든가 하는 신변상의 사건이나 주위환경의 변화에 대해 이 작가는 예민하고 솔직하게 반영하면서 그 모든 고통의 흔적을 ‘고독과 애조’를 띤 내적 감정의 투영으로 그려내고 있다. 기억과 연상, 상상과 환상이 낳는 그림의 세계가 그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분신을, 환상적인 여인들을 무수히 그렸다. 그 얼굴은 속악하고 비루한 현실 속에서 벗어난, 씻겨진 얼굴들이다. 화장을 하고 단정히 머리를 틀어 올리거나 정돈을 한 모습들이 대개 정면이나 측면상으로 보여진다. 끊임없는 붓의 중첩에 의한 중간색의 미묘한 색감으로 모호하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는 그림이다.

여자들은 한결같이 꽃과 하나가 되어 등장한다. 꽃을 머리에 얹거나 가슴에 품고 있다. 정신 나간 여자들, 미친년들이다. 동시에 한이 너무 많은 여자들이다. 그녀는 말하기를 그 꽃은 여성들이 간직한 한이라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그 한을 품은 꽃들은 화려하다. 너무 슬프고 슬픈 것들이 지독한 화려함이 되었다. 환상이 되었다. 그녀는 아예 꽃 그 자체다 되었다. 자기 몸에서 꽃들을 잉태하고 길러낸다. 눈물이 꽃들을 키우고 슬픔이 꽃망울을 개화시켰다.

그림 속 여자의 시선은 모호하다. 조금은 섬뜩하고 더러는 평화롭다. 마르고 광대뼈가 돌출한 얼굴과 평면적인 몸체는 이 세상 사람 같지 않다. 영화 속 배우 같기도 하고 화사하게 차려입은 고고한 여인의 자태를 떠올린다. 그림 속에서 작가는 이런 인물로 환생한다.

갸름한 얼굴에 숱이 적은 눈썹을 달고 있다. 볼터치와 눈화장이 강렬하다. 숱이 적은 눈썹에 대한 어떤 열등감을 갖고 있었던 작가는 항상 크레용으로 눈썹을 그리고 다녔다고 한다. 맨얼굴, 눈썹을 안 그린 얼굴을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었던 그녀다. 어느 관상가가 그녀에게 “눈썹이 약하니 형제 선이 없고 고독하겠다.”고 예언을 했단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생애는 내내 고독하고 힘겨운 편이었다.

“화가의 일생이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젊은 시절에는 가정과 인간의 애정이 캔버스에 물감을 분지르는 고통과 황홀감과 공존하다가도, 깊이 외길로 빠져들다 보면 가정도 사랑도 혈육마저도 떨쳐 버리게 되고 한평생 고독과 정면으로 마주 보며 싸우게 되는 것이다.”

이 그림 속 얼굴도 적조하고 더없이 고독해 보인다. 그리고 그 얼굴은 결국 자신이 꿈꾸는 이상향의 여인상이다. 그녀는 자신의 초라한 현실에 대해 역설적으로 화려하고 고고하며 우아한 여인상으로 대체시킨다.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여성이라는 성적 특성에 기대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 만난 얼굴을 그리고 있다. 그 얼굴은 진한 여성애와 강한 자의식으로 마구 응축되어 있다.

자아의 실현을 포함한 인격적 욕구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을 때 곧잘 환상의 세계로 나아간다고들 한다. 그것은 현실의 위해로부터 자신의 자아를 지키려는 일종의 방어적 행동이라는 설명이다. 그래서일까, 천경자의 환상은 그의 자의식과 예술혼을 지키고 강화하려는 일종의 방어기제 같은 것이라고 평가된다. 그러니까 환상의 힘을 빌어 자신의 현실을 화려하게 극복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지독하게 그림을 그렸고 그림 안에서만 위안을 받았던 이다. 하루 종일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릴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하던 그녀는 작업실에서 남도 판소리를 들으며 옛날 일을 아련히 떠올리고는 그 한과 슬픔을 그림으로 풀어냈다. 판소리를 들으며 울면서 작업하는 게 자신만의 건강법이라고도 말했다. 그러는 틈틈이 담배를 피웠다. “내가 밥 먹는 줄 아세요, 내 끼는 커피와 담배뿐이요. 그래도 이렇게 기운 있지”라고 말하는가 하면 “나를 달래준 것은 오로지 한 편의 슬픈 영화요, 한 개비의 담배였다.”고 단언한다.

그녀와 친했던 소설가 박경리는 <천경자>란 제목의 시에서 그녀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꿈은 화폭에 있고 시름은 담배에 있고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 정직한 생애 그러나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다.”
박영택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댓글이 2 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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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번만 봐주세요

    https://youtu.be/4lNHfcy4jU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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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rite1001

    좋은 글 고맙습니다.
    또한, 호소하는 마음담아 전합니다!!
    요즘 수도권 시내버스에도 광고되고 있는 유투브 컨텐츠에요.
    감상하시고 옳은 판단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https://youtu.be/2QjJS1CnrT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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