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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안에 빠져 있는 내 얼굴

[박영택 교수의 '화가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보다']

밥상에 달랑 국그릇, 혹은 죽이 담긴 그릇 하나가 놓여있다. 그 안에 여자가 빠져있다. 바로 작가 자신이다. 마치 정화수를 놓고 신께 치성을 드리는 주술적 행위가 연상되는 이 장면은 자기 자신을 흡사 희생양이나 공물처럼 제공하는 듯도 하다. 그릇 안에 동동 떠있는 자신이 국의 건더기 마냥 담겨있다.

음식에 잠겨있는 내 모습, 국 안에 빠져있는 내 얼굴이다. 그렇게 일상의 맹목적인 의지나 욕망에 저당 잡혀있는 내 얼굴이란 무엇일까? 작가는 아마도 어느 날 식사를 하기 위해 밥상에 앉아 국그릇을 내려다보다 문득 그 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까? 새삼 밥 먹고 산다는 일의 고단함에 대해 생각해보았을까? 아님 그렇게 매일 세 끼를 먹어야 사는 운명의 지루함이나 밥 먹고 살겠다고 바둥대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졌을까?

사실 혼자서 밥 먹고 있을 때면 간혹 좀 처량하고 궁상맞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혼자서 밥 먹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분명 먹고 산다는 사실은 슬프다. 소설가 김훈의 글처럼 자기 스스로 먹을 것을 해결하는 식물과 달리 동물성의 육체를 지닌 이들, 입 달린 존재들은 매끼마다 자기 목구멍으로 다른 생명체를 밀어 넣어야 사는 이들이다.

사는 날은 배고픈 날이기에 그렇게 사는 날까지 배고픔을 지워야 한다. 그래야 산다. 사는 일은 어찌 보면 너무 단순하다. 배고픔을 지우면 지속된다. 입이 없었다면 삶의 치욕도 없을 것이다. 입을 지운다면 욕망도 불안도 죄다 잦아들까? 우리는 끊임없이 정확한 주기로 찾아오는 배고픔을 생의 한 단락으로 받아들여 이를 가까스로 넘어서는 이들이다. 매 한 끼, 한 끼가 절박한 생의 고비며 다음 한 끼까지만 버티는 간당거리는 삶의 초라함이 목숨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 끼와 다음 한 끼까지의 거리와 시간이 결국 한 생(生)이다. 배가 고프다는 절대적인 실존 앞에서, 치명적인 본능 앞에서 마냥 누추한 생의 주름은 어떻게 펴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산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은 결국 지속해서 먹어야 가능한 일이고 그래서 다들 열심히, 잘 먹겠다고 끼니마다 부산을 떠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런데 그 정도가 너무 쌔면 어딘지 서글프고 추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먹고 살자고 하는 것이 인생의 모든 일이고 더구나 이 각박하고 치열한 삶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모든 것도 결국 먹는 일로 귀결된다 해도 그리고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이 ‘세상의 이치’라 해도 그게 전부라고 말해지면 왠지 헛헛하다.

그것은 인간이란 결국 혓바닥에서 항문까지라고만 말하는 것과 같다. 인간이 원생생물과 하등의 차이가 없이 식도와 항문까지의 그 일직선상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은 그 길을 덮고 있는 다른 생의 길들을 외면하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먹는 본능이 모든 것을 압도하고 일직선상의 그 단순한 길로 모든 생의 욕망이 수렴되는 가파른 현실 속에 산다. 그 욕망의 비등점은 점점 뜨겁게 달궈지고 부풀어 오른다.


백진숙은 그렇게 밥 한 끼를 먹을 때마다 이런저런 생각에 부침했던 모양이다. 기이한 낯섦이 부스스하게 일어나며 환상과 현실이 뒤섞여 있는 백진숙의 이 그림은 흥미로운 상상력과 유희가 얽혀 하나의 문장을 이룬다. 채색화로 그려진 이 동양화는 거울에 비친 자화상이 아니라 국그릇에, 죽 그릇에 빠진 자신의 몸을 위에서 내려다 본 구도 아래 조망한다. 그 모습이 더없이 처량하고 궁상스럽다. 작가는 밥을 먹다가, 밥상을 내려다보다 문득 이 장면을 상상했고 이를 빌어 환상적인 세계를 그려 보였다. 작가의 그림은 꿈꾸기, 몽상과 상상의 유희 아래 서식한다. 그렇게 그녀는 현실과 환상 사이를 번갈아 미끄러진다.

보통 우리는 세계를 정신적/내적 세계와 육체적/외적 세계로 양분한다. 그러나 우리의 통념 속에서 양분된 이러한 영역 외에 또 다른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흔히 간과되어 왔다. 그 영역은 무의식의 이론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이른바 신비스런 세계이다. 물리적 현실과 무의식적 사고의 중간쯤에서 존재하는 현실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이 현실은 실제 현실과의 긴밀한 관련성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그림은 다소 환상적이다.

환상미술의 상상적 세계는 ‘실재적인 것’과 ‘비실재적인 것’ 사이에서 비결정적으로 자리 매김된 ‘틈새 공간’이자 ‘주체/반주체’,‘내적/외적’.‘과거/현재/미래’사이의 경제적 영토 혹은 사이공간이라고 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실재적인 것도 비실재적인 것도 아니며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자리한다. 죽은 것도 살아있는 것도 아닌 유령처럼 환상미술은 실재적인 것을 취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깨뜨린다. 사실주의적 관습에 의존하여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다음에 비실재적인 것을 통해 이러한 사실적인 전제들을 부정하는 것이다. 백진숙은 그러한 재배치, 변신을 이용해 자신의 무의식에 깃들어 있는 욕망과 본능에 주목한다.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감정에 주의를 기울인다.

밥상에 앉아 문득 국그릇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자신을 본 작가는 그 환상을 그림으로 그려냈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자조적 반성이기도 하고 맹목적인 생의 욕망에 무력한 실존의 고백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매일 밥을 먹으며 산다. 그렇게 살면서 도대체 밥이란 무엇인가, 그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나는 누구일까 하고 질문할 것이다. 이 그림은 그런 의문과 여러 상념 속에서 나온 자화상이다.
박영택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댓글이 1 개 있습니다.

  • 0 0
    sprite1001

    좋은 글 고맙습니다.
    또한, 호소하는 마음담아 전합니다!!
    요즘 수도권 시내버스에도 광고되고 있는 유투브 컨텐츠에요.
    감상하시고 옳은 판단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https://youtu.be/2QjJS1CnrT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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