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퇴출시킬 건설-조선사 1개도 없다"?
<뷰스칼럼> 불길한 '1997년 전철' 되밟나. 집단 자살행위
전직 은행 관계자가 지난해말에 한 단언이다.
은행들 "우리 사전에 퇴출은 없다"
그러나 그의 전망은 틀렸다. 그는 그래도 피래미 몇개 정도는 퇴출시킬 줄 알았다. 그러나 채권은행들은 16일 "퇴출시킬 건설-조선사가 단 한곳도 없다"는 최종결론에 도달했다. 초기에 수십군데 운운하던 당당한 기세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좀 워크아웃만 하면 다 살아날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당국조차 멋쩍었는지, 은행들에게 몇개는 퇴출시키라고 추가 주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퇴출? 해당기업주나 종사자들에겐 당연히 끔찍한 일이다. 안 할 수 있으면 안하는 게 기업에게도, 은행에게도 최선이다. 정부나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부실기업들을 퇴출시키면 실업자가 급증하고 지역경제가 마비된다. 되도록이면 하고 싶지 않은 게 정부-정치권의 솔직한 속내다.
하지만 다음이 문제다. 퇴출 안한다고 살아날 수 있는가이다. 길은 하나 있다. 은행들이 계속 퍼붓는 거다. 월급도 은행이 대신 주고, 운영비도 주고, 달라는대로 다 주면 된다.
그러나 그게 가능한 일인가. 한 예로 C&그룹만 해도 지금 채권단들은 서로 추가 신규대출을 안해주려고 난리다. 해줘 봤자 부실만 늘어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에 살생부에서 벗어난 모든 건설, 조선사들에겐 은행들이 흔쾌히 신규대출을 해줄까. 두고 보면 알 일이다.
은행들은 제2의 길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건설사 등에게 정부 돈을 무한대로 퍼주는 거다. 실제로 정부는 엄청난 규모의 토목 경기부양책을 추진중이다. 하지만 윤전기를 부지런히 돌려 문제가 풀린다고 생각한다면 엄청난 착각이다. 윤전기를 돌리면 돌릴수록 국가신용등급은 벼랑끝에 몰리게 되기 때문이다. 윤전기는 어디까지나 '한시적 처방'일뿐이다.
선제적 기업구조조정? IMF때도 한 적 없다
어찌 보면, 은행들이 '선제적으로' 기업구조조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IMF때도 그랬다. IMF사태 발발 직전인 1997년초부터 대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지자 정부는 세칭 부도유예협약이란 것을 만들어 옥석을 가려 살릴 기업은 살리겠다고 했다. 지금 은행들이 하고 있는 '대주단협약'의 원조다. 하지만 당시 정부의 실제 속내는 기업들을 쓰러트리지 않겠다는 거였다. 은행들은 일단 부도유예협약에 참여, 쓰러질 기업들의 채무 만기 등을 연장해줬다. 그러나 신규대출은 필사적으로 기피, 결국 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IMF의 관리아래 들어간 1998년, 정부는 IMF 지시에 따라 5대 그룹에 대한 선제적 구조조정을 하겠다고 했다. 그해 6월18일, 5대 그룹은 도합 20개의 퇴출 계열사를 발표했다. 한결같이 피래미기업들이었다. 한 예로 현대가 퇴출시킨 선일상선의 경우 종업원 숫자가 겨우 4명이었다. 이헌재 당시 금감위원장은 그러나 "이번 퇴출조치로 늘어날 부실채권 규모만 17조원에 달한다"며 은행과 정부가 큰 결단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실제 퇴출기업들 총여신은 5조원이었다. 기자들이 부풀리기가 아니냐고 항의하자 정부는 "착각했다"고 해명했다.
그후 대우가 쓰러지고, 현대도 사실상 해체됐다. 하지만 시장이 그렇게 만든 거였지, 은행이나 정부가 선제적으로 정리한 건 결코 아니었다.
은행 이미 위태위태하거늘...
"100달러를 빚지면 채무자는 은행 손에서 놀아나지만, 100억달러를 빚지면 은행이 채무자 손에서 놀아난다."
국제금융계 격언이다. '대마불사'가 통하기란 월가도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실제로 씨티, BOA 등이 지금 대마불사 법칙 때문에 살아남고 있다.
"월가도 그런데, 우리도 그래도 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문제의 심각성은 그러나 우리는 미국도, 월가도 아니라는 데 있다. 한 예로 신용평가만 해도 그렇다. 무디스 등 국제신용사들은 미국이 '국가파산'이나 여전히 AAA를 주고 있다. 씨티 등의 등급을 좀 낮추긴 했으나 여전히 '우량'이다.
하지만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무디스는 10개 한국 은행들의 신용등급을 낮추겠다고 통고했다. 피치는 이미 현대차-기아차 신용등급을 투기등급으로 낮췄고, S&P도 곧 낮추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S&P까지 현대차-기아차를 투기등급으로 낮추면 2조3천여원의 외채를 당장 갚으라는 벼랑끝 위기에 몰리게 된다. 당연히 환율 등 금융시장도 요동칠 것이고, 이같은 상황은 미국과 비교하면 엄청 '불평등'하다. 하지만 이게 약소국 한국의 냉엄한 현실이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리고 '약점' 잡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약점을 잡히면 또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한국 은행들은 아직도 외채 만기연장이 거의 안될 정도로 여전히 위태위태한 상황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사전에 '퇴출'이란 없다"는 식의 결론은 더없이 우려되는 상황전개다. 부실기업들을 모두 끌어안고 가다간 금융시스템이 벼랑끝에 몰리는 것은 물론이고, 천문학적 국민혈세만 밑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소진될 게 불을 보듯 훤하다. 국가 전체가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국가 자살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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