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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청년-백인노인, 팽팽했던 '맞짱 토론'

[미 대선 대통령후보 1차토론회] 오바마 우세승

1960년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밑에서 8년간 부통령을 지낸 인물로서 백악관의 주인이 될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유명한 아이젠하워는 그 매력적인 미소로 재선의 임기까지 미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리처드 닉슨이 그러한 인기 절정의 대통령 밑에서 8년동안 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의회에서 한동안 공산분자와 스파이들을 추적하는 활동을 벌인 공로를 공화당 보스들이 크게 인정을 했기 때문이었다.

1952년 닉슨은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선정되었다. 아이젠하워와 닉슨은 정치 지도자로서 아주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었다. 아이젠하워는 노년이었고 닉슨은 40대의 젊은이었다. 닉슨은 서부 캘리포니아 출신이고 아이젠하워는 동부 펜실베이니아에서 거주했다. 닉슨은 보수 성향이고 아이젠하워는 온건 중도노선을 따랐다. 닉슨은 상당기간 정당활동을 벌인 노련한 정치가이지만 장군 출신인 아이젠하워는 정치에 있어서는 천진난만한 소년이었다. 1960년, 당시의 여론에 따르면 닉슨은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할 수 없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1952년 상원에 출마한 케네디는 최초로 TV광고를 선거운동에 활용했다. 케네디는 딸랑딸랑 울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사람들과 악수하고 공장을 둘러보며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TV로 내보내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1956년 케네디는 당 대변인을 맡아서 전당대회장에서 대통령 후보인 스티븐슨을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이때의 짤막한 연설이 국민에게 소개되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이때의 케네디 모습을 뉴욕타임스는 ‘영화스타’로 기사화 하기도 했다. 그 이후 젊은 상원의원 케네디는 JFK라는 이니셜로 불리기 시작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에 따라 민주당을 대표하는 장래 대통령감이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대통령을 염두에 둔 케네디는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서 미국역사상 정치적 용기를 발휘한 특별한 사례를 다룬 <용기있는 사람들(Profiles in Courage)>란 책을 펴냈다. 케네디는 TV 광고를 통해서 이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케네디는 전국의 국민들에게 TV를 통해서 점차 편안하고 친숙한 인물이 되어갔다. 1960년 대통령 후보로 출마선언을 하고 본격적으로 TV에 매달렸다. 이름이나 얼굴을 알리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유권자의 가슴속에 각인을 시켰다. 프랭크 시내트라가 빅히트를 시켰던 ‘드높은 희망’에 맞춰 국민의 멜로디를 만들기도 했다. 당시 케네디 진영의 TV전문가로는 찰스 구겐하임, 토니 슈워츠, 데이비드 소이어 등이다. 이들 세 명은 지금까지도 가장 뛰어난 TV전문가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민주당의 케네디, 공화당의 닉슨이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맞붙었다. 두 사람은 다 같은 40대의 나이에 2차 대전에 참가했고 똑 같이 14년간의 공직생활을 했다. 닉슨은 이미 8년간의 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국민의 영웅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더구나 수개월 전 소련의 지도자인 후르시쵸프와 대담하게 맞서서 토론으로 넉 아웃을 시킨 인기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닉슨도 TV연설을 통해서 국민들과 공감대를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케네디의 백악관행에 가장 큰 걸림돌은 그가 가톨릭 신자라는 것이었다. 당시 남부지역과 남부의 인접지역에서는 가톨릭에 대한 배척이 아주 심했다. 이러한 이유로 케네디의 당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게 점쳐지고 있었다.

케네디는 TV를 통해서 결판을 내겠다고 결심했다. 케네디는 TV가 자신의 매력과 카리스마, 위트와 지적인 면모를 한껏 돋보이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케네디는 닉슨에게 TV토론을 제안했고 닉슨도 이를 기꺼이 받아 들였다. 대통령후보 TV토론회의 시초이다. 케네디는 TV토론회에서 지지율을 높인 후 그것을 유지해서 결국엔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 대선후보 TV토론회가 1960년에 선을 보인 후 잠시 멈추었다가 1976년에 다시 시작되어 지금까지 매번 실시되고 있다. 부통령후보 1회 대선후보 3회에 걸쳐서 실시를 해오고 있다.

오바마, 매케인 두 대선후보는 지난 26일(현지시간) 미시시피대학에서 첫 대선토론회를 갖고 구제금융안과 북한 핵 등 외교정책에 대해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CNN를 통해 생방송된 이날 토론회에서 오바마는 월가 금융위기는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매케인 후보의 정책에 대한 '최종 평결'이라며 "우리는 신속히 그리고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반면 매케인은 "국방비와 사회보장연금, 고령자들의 의료보험 비용 등을 제외하고 모든 연방정부의 프로그램에서 지출을 동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오바마는 "외과의사가 환자인 미국경제 수술을 위해 외과용 메스가 필요한 때에 도끼를 사용하는 양상"이라고 공격하는 등 시종 치열한 논리대결이 펼쳐졌고, 북한 핵과 이라크 전쟁, 러시아의 그루지야 공격 등에 대해서도 한치의 양보없는 공방을 벌였다.

두 후보간 TV 토론 결과 오바마가 매케인보다 우세했으나, 대통령이 될 준비에 대해서는 매케인 후보가 앞서는 등 치열한 접전이 진행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 CNN이 오피니언 리서치사와 공동으로 ‘TV토론을 누가 덜 잘했는냐’를 놓고 실시한 조사에서 오바마는 51%의 지지로 매케인의 38%를 앞섰다. 오바마는 매케인보다 더 지적이고 국민들의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는 후보라는 평가를 받았고, 강력한 지도자와 진지한 지도자라는 인상에서도 매케인을 앞섰다. 반면 매케인은 토론 시간의 대부분을 오바마에 대한 공격에 치중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10명 중 6명은 두 후보가 모두 예상보다 토론을 잘 했다고 답했으며 10명 가운데 7명은 두 후보 모두 미 대통령이 될 능력을 갖추었다고 대답했다. 두 후보 가운데 누구를 지지할 것인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한 CBS의 여론조사에서도 39%가 오바마가 매케인에 비해 우세했다고 답해 매케인이 더 잘했다는 24%에 크게 앞섰다.

그러나 대통령이 될 준비가 돼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선 매케인이 78%로 60%에 그친 오바마를 앞섰다. 하지만 매케인의 경우 TV 토론 전에 실시된 같은 질문에 대한 응답 비율과 거의 차이가 없었던 반면 오바마의 경우에는 토론 전의 44%에 비해 16%포인트나 대통령이 될 준비가 돼 있다는 응답이 높아졌다. 또 토론 후 오바마에 대한 이미지가 토론 전보다 좋아졌다는 대답이 나빠졌다는 대답보다 훨씬 많았던 반면 매케인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졌다는 응답은 더 나빠졌다는 대답보다 많기는 했지만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CNN의 여론조사는 524명의 미 성인들을 대상으로 전화 인터뷰를 통해 이뤄졌으며 오차범위는 ±4.5%이다. CBS의 여론조사는 지지 후보를 결정하지 못한 483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인터뷰를 통해 이뤄졌으며 오차범위는 ±4%였다. 두 조사 모두 첫 대선후보 TV 토론이 이뤄진 26일 밤(현지시간) 실시됐다.

두번째 토론회는 10월7일 테네시주 내슈빌의 벨몬트대학에서, 마지막 세번째 토론회는 10월15일 뉴욕주 헴스테드의 호프스트라대학에서 각각 열린다. 또 부통령후보인 새라 페일린 공화당 부통령 후보와 조 바이든 민주당 부통령 후보간 토론회는 10월2일 미주리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대학에서 열린다.

대통령선거가 이제 한달여밖에 남지 않았다. 흑인 대통령, 아니면 여자 부통령?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다. 더구나 TV토론이 흑인청년과 백인노년간 설전 형식의 맞짱 토론을 벌이면서 대선 열기가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이번 TV토론에 전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고, 이미 진행된 첫 토론회에 이어 남은 토론회에도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릴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의 케네디, 공화당의 닉슨 간 펼쳐진 1960년 대통령 선거 당시 첫 TV토론 ⓒ 위키피디아


오바마와 매케인 후보가 뜨거워진 대선후보전의 기선을 잡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진은 후보들이 도박에 가까운 승부수를 던질 정도로 선거전이 뜨거워지고 있다는 ABC TV의 보도내용. ⓒABC


필자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겸 본지 편집위원은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한인들의 정치 참여를 통한 권리 찾기와 한인들의 정치적 위상 높이기를 목표로 93년 뉴욕 등 미 동부 대도시에 ‘한인유권자센터’를 만들어 15년째 활동해온 대표적인 정치 비정부기구(NGO) 운동가다.

한인들의 정치력을 높여온 김 소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93년 당시 7%에 불과하던 한인들의 평균 투표율은 2004년 25%로 뛰어올랐다. 최근에는 미하원의 '종군위안부 결의안' 통과와 한국국민 비자면제프로그램(VWP) 성사에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워싱턴 정가에서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한국인 출신 시민운동가로 꼽히고 있다. 2008년 미국 대선이 열리는 코커스와 프라이머리 현장을 모두 찾아 대선 현장을 생중계하고, 이를 한국과 한인들의 미국내 정치력을 높일 기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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