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검색 바로가기

미테랑, 30살 청년에게 대선 맡기다!

[아탈리가 말하는 미테랑] <1> 1973년의 역사적 조우

"사람들은 프랑스가 강했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미테랑은 프랑스의 마지막 왕이었다."

올해로 타계한 지 10년이 된 고 프랑스아 미테랑(1916~1996) 전대통령를 향해 '미테랑 신드럼'이라 불릴 정도로 남다른 프랑스인들의 향수에 대해 유럽의 지성 자크 아탈리가 내린 원인분석이다. 자크 아탈리는 서른살이 되던 1973년부터 17년간 미테랑의 최지근거리에서 그를 보좌하며 영욕을 같이 했던 산 증인. 그가 미테랑 10주기를 맞아 <이것이 프랑수아 미테랑이었다(C'&eacute;tait Fran&ccedil;ois Mitterrand)>라는 두터운 회고록을 펴냈다. 프랑스 현대사상 최강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노(老)정객 미테랑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귀중한 기록이자, 세계적 지성과 정치거목간의 정신적 교유사이기도 하다.

미테랑은 1981년 대통령선거에서 6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사상최초의 사회당 출신 대통령에 당선된 이래 1996년 여든살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프랑스는 물론 세계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목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가 생전에 탄생시킨 유럽연합은 세계역학을 바꾼 일대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그러나 국내적으론 끊임없이 정치적 도전에 직면해야 했고 이를 '좌우 연정'이란 탁월한 협상과 타협으로 풀어가, 세계 정치학자들의 부단한 벤치마킹 대상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이제 본격적 정치시즌을 맞고 있다. 작금의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감안할 때 '2007 선택'의 중차대함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시점에 미테랑의 파란만장한 정치 여정을 세계적 경제-정치-철학지성인 자크 아탈리의 기록을 통해 접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벤치마킹이 될 것이다. <이것이 프랑수아 미테랑이었다>의 국내 출간을 준비중인 도서출판 에디터의 협조로 주요 내용을 향후 7, 8회에 걸쳐 소개토록 한다. <편집자주>


미테랑과의 역사적 조우, 길고긴 17년 여정의 시작

1973년 좌파는 총선에서 276석을 획득한 우파에 대해 175석을 차지하며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1967년에 당선되었다가 1968년에 낙선한 많은 의원이 직무를 되찾았다. 조르주 다얀은 나에게 사회당 제1서기장, 즉 미테랑을 만나라고 권유하며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경제에 관한 한 그는 정말 형편없어요.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아무에게도 귀를 기울이지 않아요. 그는 경제학자들을 유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그에게 꾸밈없이 말하도록 해 보시오. 아마도 당신에게 퇴짜를 놓지는 않을 거요.”

이리하여 나는 1973년 11월 미테랑을 회의석상에서 소개받았다. 욤 키푸르전쟁(제4차 중동전쟁)이 막 끝나고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난 때였다. 석유파동은 세계의 지정학적 균형을 뒤흔들었고, 부가적으로 좌파 공동강령의 관대하고 너그러운 조항들이 더욱 문제의 소지가 됐다. 3주가 지난 후 미테랑은 자신의 여비서 마리-클레르 파프게를 통해 “텔레비전 방송을 준비하기 위해, 더 이상은 안 되고 15분의 시간이 있으니” 내게 약속을 잡도록 했다.

1973년 12월 초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파리의 비에브르가(街) 22번지의 초인종을 울렸다. 얼마 전 이사한 그의 집이었다. 나는 포장석이 덮인 작은 뜰을 지나 좁은 계단을 걸어 4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끝에는 마리-클레르의 작은 부속실이 있었는데, 미테랑의 사무실이 있는 고미 다락방으로 들어가려면 이 방을 지나야 했다. 우선 보이는 것은 곳곳에, 심지어 바닥에까지 쌓아 둔 책들뿐이었다. 그리고 2개의 사각대 위에 유리판을 얹은 탁자와 3개의 소파가 보였다. 하나는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둘은 방문자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바빠 보였고, 다음날 있을 방송 이야기를 했다. 그는 에너지 위기에 대해 질문을 받으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가 인식하는 에너지 위기는 석유회사들의 이윤증가와 봉급인하로 요약되었다. 막 시작된 변화의 심층적 결과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히 드러나 보였다. 나는 3쪽의 종이를 가지고 갔다. 종이쪽마다 각각 한 줄로 된 세 문장을 썼다. 그가 방송에서 방어할 3가지 주제, 즉 경제&#8231;사회 그리고 국제문제에 관한 생각을 적은 것이었다.

그는 주의를 기울이며 종이쪽들을 받아들면서 조급한 듯 그것들에 관해 보충설명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귀를 기울여 듣고, 질문을 하더니 마침내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 마침내 뭔가 이해가 되는군!”

우리는 1시간 반이 넘도록 함께 있었다. 일종의 지적(知的) 상통을 체험하고 직접적인 공모가 이뤄진 것이었다. 이후로 이 상통과 공모는 결코 흔들림이 없었다. 다음날 텔레비전에서 그는 내가 말했던 것들 중 아주 긴 구절들을 그대로 반복했다. 메모한 것도,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듣는 것 같지도 않았던 것들이었다.

겨울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연설이나 라디오&#8231;텔레비전 방송을 준비하기 위해 여러 번 만났다. 그는 몇 번이고 나에게 방송에 동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기자들은 야당 당수에게 귓속말을 전하는 젊은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공식적인 보좌관도 그의 당 출신도 아니었다. 나는 어떤 조직 편성표에도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 이런 조신함이 나에게 어울렸다. 참사원이 내게 가져다주는 자유가 나에게 무한한 기쁨을 주었다. 그것 덕분에 유엔을 위한 나의 초기 자문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고, 프랑스의 그랑제콜(Grandes Ecoles)에서 가르칠 수 있었으며, 미국대학에 강의하러 갈 수 있었다. 1974년 1월, 나는 세 번째 책을 출판했다. 우리 교육에 대한 비판서로, 폴리테크닉의 또 다른 젊은 교수인 마크 기욤과 함께 쓴 것이었다. 프랑수아즈 지루(프랑스의 유명 여류 언론인)는 <렉스프레스>지의 사설을 통해 이 책의 성공을 확신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미테랑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책들은 근사해 보여요.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 혼자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기술용어와 수학적 설명을 지나치게 좋아해요. 그래도 이상한 것은, 당신 입으로 직접 설명하는 것은 모두 이해되거든. 책을 수정하는 것이 좋을 듯해….”

1993년 한국을 방문했던 생존 당시의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대통령. ⓒ연합뉴스


미테랑의 파격적인 1974년 대통령선거운동 총참모 발령

국회 개원이 1974년 4월3일이라고 공지되었다. 미테랑은 그날 아침 11시 나에게 만나자는 약속을 해왔다. 그가 피에르 메스메르(퐁피두 대통령 정부의 총리로 드골파의 지도자) 정부에 맞서 발표하려고 하는 정치일반에 관한 연설문 작성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그의 정치적 개학을 의미하며, 석유위기 이후 처음으로 행하는 중요한 의정활동이었다.

4월 2일 21시58분, 엘리제궁(대통령 관저)에서 간략한 코뮈니케를 발표했다.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이 1974년 4월2일 21시에 서거하셨습니다.”

다음날 아침 9시경, 나는 우리의 약속이 취소되겠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미테랑이 내게 전화를 했다:

“소식 들었겠지요? 오늘은 약간 바쁠지도 모르겠소. 차라리 이틀 뒤에 와 주겠소? 비에브르가에서 10시경으로 정합시다.”

이리하여 나는 이미 모든 언론이 언급한 내용, 즉 미테랑이 대통령선거에 후보로 나서리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번 선거에 약간은 관여하게 되리라고 짐작했다.

48시간 뒤, 비에브르가의 안마당으로 들어서니 1층 식당으로 난 창을 통해 공산당을 제외한 좌파의 모든 정치지도자들이 보였다. 대부분의 얼굴은 지금까지 텔레비전에서만 보았을 뿐이었다. 거기에는 특히 피에르 모루아, 가스통 데페르, 클로드 에스티에, 조르주 다얀, 피에르 베레고부아, 피에르 족스 등이 있었다.

미테랑의 여비서인 마리-클레르 파프게가 4층에서 내려와 나에게 그들과 합류하라고 말했다. 실내로 막 들어서는 순간 미테랑이 공지하는 말이 들렸다:

“그래서 나는 선거운동 재정담당을 앙드레 루슬레에게, 선전과 홍보를 클로드 페르드리엘에게, 공약은 자크 아탈리에게 맡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탈리는 내 참모진을 지휘할 것입니다.”

이 순간부터 17년 동안 토요일과 일요일을 포함해 우리가 만나거나 적어도 통화하지 않고 지나는 날이 단 하루도 없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네댓 번 만나는 것은 보통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 가스통 데페르가 “아탈리가 누구야?” 하며 불평하는 소리를 겨우 들었다. 순간 나는 고위 공직자로서 나의 의무와, 원칙상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비밀 준수 의무,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위해 내가 가져야 할 가명을 생각했다.

모임이 끝나자 미테랑은 나에게 남아달라고 청했다. 우리는 함께 그의 작은 저택의 좁은 정원을 걸었다. 그는 왜 나를 신임하는지 설명했고, 약간은 우울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퐁피두는 너무 일찍 죽었어요. 전국적으로 좌파가 상승세이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아요. 드골파들은 거짓말하고 속임수를 쓸 거요. 그들은 해외영토의 표와 부재자의 표를 훔쳐갈 거요. 샤방-델마스(드골이 아낀 반 나치저항운동 동반자이자 드골파 후계자)는 1차 투표를 통과하지 못할 거요. 2차 투표에서 나는 1,300만 표를 얻을 것이고, 지스카르(우파 프랑스민주연맹 당수)는 나보다 25만 표를 더 얻을 것이오. 중도파의 표를 차지할 것이거든.”

프랑스에 2,600만 명의 유권자라는 것이 있다는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1주일이 지나 공산당과 사회당은 각각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미테랑을 좌파 단일후보로 지명했다. 같은 날 지스카르는 샤말리에르에서 출마를 선언했다.

여섯달간의 선거전, 그리고 억울한 패배

대통령 선거전이 벌어져 여섯 달 동안 계속되었다. 완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몽파르나스타워 5층에 선거지휘부를 설치했다. 여기서 나는 분명 내 인생에서 정치에 입문한 후 가장 아름다운 시절 중 하나를 체험했다. 모든 것을 새로 발견하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후보를 포함해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매체&#8231;광고&#8231;인터뷰&#8231;토론&#8231;우편물, 분야별 공약.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통령 선거운동의 요소들을 모두 갖춘 최초의 현대적 대통령선거운동이 바로 이때 시작되었다. 나는 이 모험에 함께 일할 친구들을 끌어들였다. 에릭 오르세나, 이브 스투르제, 프랑수아 스타스, 장-클로드 불라르, 알랭 부블릴, 장-루이 비앙코 등.

프랑수아 미테랑은 선거운동본부에 거의 오지 않았다. 그는 항상 집회에 가 있었다. 내가 그를 만나는 것은 중요한 방문, 중요한 인터뷰, 분야별 공약 텍스트, 기자회견 또는 라디오 방송을 준비할 때에 불과했다.

1차 투표 직전의 여론조사는 여전히 매우 불확실했다. 라디오 토론은 시끌시끌했다. 샤방 델마스와 두 번 독대하고 지스카르와 두 번 독대했다. 여당 성향의 기자들이 사회를 보며 한쪽으로 기운 질문을 던졌고, 엄격히 선발한 방청객은 적대적이고 시끄러웠다. 미테랑은 꽤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경제 분야에서도 그의 공약에 필요한 비용문제가 중심이 되었다. 졌다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드골 지지자들은 지스카르에게 권력을 맡길 수 없어요. 지스카르는 나보다 오히려 드골 지지자들에게 치명적이오. 따라서 그들은 1차 투표에서 선두가 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거요. 하지만 시라크와 같은 일부 드골 지지자는 1차 투표에서 지스카르를 밀기 위해 배반할 것이오. 내가 당선될 가능성이 조금은 있어요. 2차 투표에서 그 밖의 드골 지지자들은 지스카르가 낙선되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오.”

5월5일, 1차 투표일 저녁, 시라크의 지지를 받은 지스카르가 샤방을 훌쩍 앞섰다. 미테랑은 43.24%라는 예상치 않은 득표를 했다. 승리도 가능하다고 모든 전문가가 입을 모았다. 하지만 미테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부 드골 지지자들이 나를 도울 것이지만, 대부분은 선거기간 지스카르에게 매달리는 건달 같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해외영토의 표와 부재자 표를 조작할 것입니다. 이번 선거는 가면무도회입니다. 이런 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르다니!”

결국 미테랑은 프랑스 본토에서는 당선되고 해외영토와 부재자투표에 의해 낙선했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1038만2,000표를 얻은 데 비해 그는 1273만8,000표를 얻었는데, 몇 천 표를 제외하면 조르주 퐁피두가 서거하고 불과 이틀이 지나 그가 예고했던 것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수치였다. 그는 이 도둑맞은 승리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이 악몽이 그 뒤에 치른 선거전 때 두고두고 그를 따라다녔다. 14년 뒤인 1988년 3월16일, 그의 네 번째 대통령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직전, 그는 내게 이 말을 되풀이했다.

“1974년 해외영토와 부재자투표 그리고 외국 거주 프랑스인의 투표가 없었다면 내가 당선됐을 거요. 그때 이기지 못한 것을 늘 아쉽게 생각했소. 좋은 기회였어요. 나는 젊었고, 모든 것이 달라졌을 거요.”

1974년의 패배 다음 월요일, 선거운동 요원들을 모두 불러 식사하는 자리였다. 그는 싸움은 계속될 것이고 좌파가 언젠가는 승리하겠지만 그것은 분명 자신이 죽고 난 다음이 될 것이라고 말해 우리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와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서른 살 장관들을 이번에는 볼 수 없겠군요.”

그 나이는 바로 제4공화국 초기 그의 나이였고, 당시 내 나이였다. 그가 당선되고 내게 그런 요청을 했더라면, 그 뒤에도 그랬던 것처럼 나는 장관이 되는 것을 거절했을 것이다. 장관 자리는 공직활동 가운데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이 아니었다. <계속>

이달 한국을 방문한 자크 아탈리.
에디터

댓글이 3 개 있습니다.

  • 0 0
    sprite1001

    이 글을 보시는 님께 호소합니다!!
    요즘 수도권 시내 버스에서도 광고하고 있는 유투브 컨텐츠에요.
    부디 짬을 내셔서 확인하시고 바른 판단하시길 간절히 원합니다(눅17:26~30).
    https://youtu.be/2QjJS1CnrT8

  • 0 0
    누군

    누군가는 걸어온 길♡

  • 0 0
    봄향기

    https://youtu.be/n1LyKzTAhfg

    확인 또 확인!!!

↑ 맨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