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지 않은 '서경원 사건의 진실'
[정치부 기자 23년의 기억들] <1> 서경원 밀입북 사건과 나
만약 백을 다 써버린다고 하자. 그것으로 끝이다. 밑천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사회부 기자와 다른 점이다. 정치부 기자의 핵심은 정보 장사다. 줘야 받는다. 주지 않고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정치부 기자는 많이 알아야 한다. 정확한 정보를 말이다.
아는 게 전부는 아니다. 알면서도 모른 척 해야 한다. 장사를 위해서다. 때문에 더러는 취재원을 안 밝힌다. 익명으로 처리한다. 그러다보니 특종을 해도 특종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혹은 정치적 희생물이 되기도 한다. 알고 있는 모두를 쓰지 않아서다. 그러나 그래야 진정한 정치부 기자로 클 수 있다.
1.서경원 밀입북 사건과 나
1989년 7월이었다. 서경원 사건이 터졌다. 평민당 소속 서 의원이 밀입북한 사건이다. 김일성도 만났고 돈도 받았다. 뒤늦게 안기부의 조사로 사건화 됐다. 평민당 총재는 DJ였다.
첫 보도는 한국일보였다. 특종이었다. 저녁에 나오는 다음날 자 가판 신문이었다.
나는 중앙일보 평민당 출입기자였다. 당시 중앙일보는 석간이었다. 그러다보니 오후엔 좀 한가했다. 긴장도도 한참 떨어진다. 그날 난 한국일보 가판을 안보고 퇴근했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선배를 만났다. 12시가 넘도록 술을 마셨다. 1시쯤 돼서 귀가했다. 집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마누라가 호통을 쳤다. 고흥길 정치부장한테서 수 십번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호출기가 귀할 때다. 정치부에 고작 서너개 였다. 입사 6년차인 내겐 차례가 안 왔다. 그러니 찾을 길이 없었던 거다. 고 부장에게 전화를 했다.
“야 임마 뉴스도 안 봤냐?”
“안 봤는데요”
“마 서경원이 이북 갔다 왔데. 내일 신문 그걸로 떡을 쳐야 되는데 어쩔 거야”
난감했다. 전화를 끊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아침 10시 30분까지 기사를 넘겨야 한다. 정말이지 대책이 안 섰다.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집을 나섰다. 새벽 2시쯤 이었다. 무작정 동교동을 향했다. 김대중 총재 집을 갔다.
문이 잠겨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 였다. 현관문을 열자 응접실 소파에 5명이 앉아 있었다. 김옥두 남궁진 등이었다. 모두 침통한 표정이었다. 그 중 한사람에게 다가가 물었다.
“서경원이 북한 간 거 언제부터 알았어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
“서경원이가 언제 북한에 간 건데요?”
“작년”
“그럼 1년만에 안기부가 밝혀낸 건가요?”
“응”
“평민당 의원들 얼마나 알고 있었는데요?”
“시차는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알고 있었어”
특종이었다. 나에게 친절히 대답해준 그 사람은 국가보안법상의 불고지죄를 미처 생각지 못했던 거다. 법으로 따지면 평민당 의원 전원이 불고지죄로 구속될 판이었다. 그 순간 나의 판단은 평민당의 소멸이었다. 더 이상의 취재가 필요 없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조간보다 앞선 뉴스로 석간을 만들 수 있었다. 굳이 그에게 불고지죄를 설명해줄 필요가 없었다. 말을 바꿀 테니 말이다. 정치부 기자들은 이같은 상황을 종종 당한다. 그럴 땐 딴 얘기로 돌리는 게 상책이다.
아침이 됐다. DJ는 보통 때보다 늦게 안방을 나섰다. 아무 말 없이 차를 타고 출근했다. 당사에선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길지 않았다. 곧바로 대변인 발표가 이어졌다. 요지인 즉 “우리는 몰랐다” 였다. 신문을 보고서야 서 의원 밀입북 사실을 알았다는 얘기였다. 나는 내게 특종을 준 그 사람을 찾아갔다. 예나 지금이나 동교동 핵심이다.
“당에서 몰랐다고 발표했는데 어떻게 기사를 써야 되는지 어리둥절 하네요.”
“몰랐었다고 써 줘.”
“그럴 순 없어요. 내가 사실을 몰랐으면 모를까 알았다는 사실을 알고 어떻게 몰랐다고 쓸 수가 있어요?”
“그럼 내 이름은 쓰지 말아줘.”
“그 약속은 지킬 게요. 누구에게도 얘기 안할 게요.”
난 그 약속 이상을 지켜줬다. 익명 처리는 물론이다. 나아가 “알고 있었다”는 직접화법으로 기사를 쓰지 않았다. 간접화법을 동원하며 분석기사로 썼다. 그러니 기사 제목도 ‘알고 있었다고 봐야한다’로 나왔다.
문제는 그 이후다. 특종의 함정에 빠진 거다. 어느 신문도 나의 기사를 따라와 주지 않았다. 전 신문이 시커멓게 “몰랐다”로 보도했다. 알았다는 사실이 확인이 안 된 거다. 특히 조선일보도 ‘몰랐다’를 제목으로 뽑았다. 평민당과 가장 적대적인 신문까지도 말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일보는 평민당과 화해 분위기였다. 부지영 기자 사건에 대한 소송을 평민당이 취하한 뒤였다. 87억2천만원짜리 소송이었다. 이름하여 조평 사태였다. 그 얘기는 따로 할 기회가 있을 거다.
어쨌든 고립무원이 됐다. 진실을 보도하고서도 말이다. 정치부 기자들은 그런 경우를 많이 당한다. 정말이지 황당하다. 그렇다고 까발릴 수도 없다. 정치부 기자는 그럴 때 조심해야 한다. 까발리고픈 충동을 느낄 때가 많다. 세상이 특종을 몰라줄 때 말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 충동을 이겨내야 한다. 그래야 더 큰 정보가 들어온다. 선수들의 세계라서 그렇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
당장 내게 압력이 들어왔다. 평민당 지지당원들이 기자실을 찾아왔다. 내 이름을 부르며 “나오라”고 외쳤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협박 전화도 걸려왔다. 당시 정치판에서 흔히 써먹던 수법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오기가 생겼다.
다음날인가 그 다음날쯤 아침이었다. 새벽 5시에 평민당 기자실로 갔다. 밤새 들어온 연합통신을 보고 기사 계획을 짜려 했다. 기자실 문을 열고 불을 켜려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한쪽 구석에서 후레쉬 불빛이 보였다. 누군가가 연합통신 기계 앞에서 밤새 들어온 기사를 보고 있었다. 당시 만해도 기계를 통해 통신 뉴스를 받을 때다. 바로 이철용 의원이었다. <꼬방 동네 사람들>이란 책의 저자다. 서 의원과는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였다.
“이 의원 여기 왠 일 입니까?”
“아니....”
이의원은 서둘러 기자실을 빠져 나갔다. 아마도 서 의원이 안기부에서 자기 이름을 분 게 아닌가 하는 마음에서 밤새 들어온 뉴스를 챙긴 듯 했다.
나는 그날 자 석간신문에 이 의원의 아침 모습을 생생히 보도했다. 석간 신문이 나온 시간은 낮12시. 이 의원은 오후 3시쯤 안기부에 전격 연행됐다.
그 일이 있자 나에 대한 압력은 보다 심해졌다. 기자실을 나가기가 어려웠다. 문밖에 평민당 지지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자 선배들이 화장실을 함께 가 줄 정도였다. 조선일보 하원 차장, 연합통신 한동윤 선배, 경향신문 김현섭 선배였던 걸로 기억된다.
며칠 뒤였다. 여느때 처럼 아침 일찍 동교동을 갔다. 출근 코스였다. 아침 6시쯤이나 됐을까. 동교문 대문 앞에 섰는데 이철 의원이 나왔다. 당시 이 의원은 무소속이었다.
“무소속 의원께서 여기 왠일 이세요?”
“아, 그냥 위로를 해드리려고요.”
그런데 이상했다. 마치 들켰다는 표정이었다. 하루 종일 그 표정이 떠올랐다.
다음날 오후였다. 무소속의 이철 의원이 기자회견을 했다. 내용인즉 당시 여권 실세였던 박철언 씨도 몰래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서 의원의 밀입북과 다를 게 뭐가 있느냐는 뉘앙스였던 걸로 기억된다. 평민당에게는 큰 힘이 되는 회견이었다. 이 의원의 회견이 끝나자 평민당이 “거봐라”하는 식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상했다. 그렇다면 이철 의원은 왜 동교동을 갔을까. 굳이 동교동에 가서 그 얘기를 미리 할 필요가 있었을까. 무소속 의원이 말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아니다’였다. 더군다나 이철 의원은 그런 비밀을 알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무소속 의원이 무슨 정보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반대로 박철언씨의 방북사실을 동교동에서 들은 거라 생각했다. 그것은 평민당이 직접 발표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무소속 의원으로 하여금 폭로케 한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동교동은 박철언씨의 방북을 어떻게 알았을까. 혹시 박철언씨가 일부러 동교동에 흘려준 건 아닐까. 향후 DJ와의 정치적 거래를 위해서 말이다.
그때부터 취재에 들어갔다. 내 짐작이 맞는 듯했다. 누군가가 박철언씨와 동교동간 접촉이 있었다는 얘기를 해줬다. 그러나 확인이 안됐다. 끝끝내 말이다. 기사화 할 수 없었다.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 중 하나다.
대신 나는 막연히 내가 희생물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여권 최고 실세가 DJ를 살리려 든다면 “서경원 방북을 평민당 의원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고 우기는 나를 없애버리는 게 사태 수습의 첫 단추일 거란 생각을 하게 된 거다. 정치부 기자 세계엔 그런 일이 종종 있다. 죽을 듯이 싸우던 당사자가 손을 잡으면 중간에 낀 기자들이 희생된다.
아니나 다를까. 물론 우연인지도 모른다. 다음날 인가 회사에서 들어오란 전화가 왔다. 기사 쓸 시간에 들어오라는 건 인사 발령 때나 있는 일이다. 3시쯤 회사에 들어갔다.
인사발령이 나 있었다. “이연홍 명 특집부”.
당시 특집부의 주된 업무는 동정기사를 챙기는 거였다. 아무 소리 안했다. 애써 밝은 표정으로 발령장을 받았다. 그러나 기분은 더러웠다. 회사를 나섰다. 마침 현관에서 당시 중앙일보 이종기 사장을 우연히 만났다.
“어 연홍이, 야 정치판은 더러운 거야. 그런데 있을 필요가 없어. 잠시 특집부에 있어.”
뒤따라가는 이 사장의 운전기사가 내게 손짓을 하며 오라고 했다.
“왜 형?”
“야 어제 내가 사장 모시면서 다 들었어. 모 인사가 술이 거나하게 취해 차 속에서 이사장에게 얘기하더구먼. 너를 정치부에서 빼달라고.”
모 인사가 누군 인지도 내게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 밝히진 않겠다. 하기야 ‘넣어 달라’ ‘빼 달라’하는 인사 민원이 수없이 많은 데가 정치부다. 나는 지금도 우연의 일치였을 거라고 믿고 싶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평민당이 서 의원 밀입북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주장은 없어졌다. 평민당 의원들의 불고지죄 혐의가 소멸된 거다.
며칠 뒤였다. 특집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데 회사 간부가 나를 불렀다.
“야 특집부 석 달만 있으래. 그 뒤에 정치부에 보내준데. 그리 알고 있어. ”
“네.”
얼마 뒤 조선일보의 스카웃 제의가 있었다. 그런 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따로 있었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그런데 약속했던 석 달이 6개월이 됐다. 6개월이 1년이 됐다. 그리고 인사발령이 났다.
“이연홍 명 경제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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