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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위기의 최고 돌파구는 '특사외교'

[김동석의 뉴욕통신] 특사외교가 언제사 세계사 흐름 바꿔

1957년, 장제스(蔣介石)를 대만으로 내쫓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마오쩌둥(毛澤東)은 측근들을 데리고 소련의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볼셰비키혁명 40주년 기념식에 참가하기 위한 명목이지만 소련에 미국을 막아달라는 요청이 방문 목적이었다.

당시 미국은 대만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노골적으로 마오쩌둥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이 죽은 소련에서는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마오쩌둥은 도움을 요청하면서도 스탈린 격하운동의 부당함과 흐루쇼프의 평화공존론에 대해서 연일 비난 연설을 했다. 마오쩌둥은 아무런 호응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소련과의 단절 속에서 미국과 대결해야 하는 마오쩌둥의 처지는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홀로서기였다. 소련의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산업화를 이루어야 하겠다는 결심이 바로 그 유명한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이다. 1958년부터 시작된 대약진운동은 1966년까지 계속 되었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게다가 소련 지도부와의 불화는 흐루쇼프의 뒤를 이은 브레즈네프 시대에서 더한층 격화되었다. 국경지대에서는 수백만 명의 병력이 대치했고 군사적인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심지어 마오쩌둥은 소련과의 핵전쟁을 대비해서 베이징 지하에 방공호를 파라는 명령을 하달할 정도였다. 태평양 건너 원거리의 미국보다는 소련이 우선 문제였다.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에서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미국을 끌어들이려는 낌새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혁명의 의리로 뭉친 저우언라이(周恩來), 덩샤오핑(鄧小平), 주더(朱德) 등 기라성 같은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인민들의 실생활근대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특히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은 인민을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필수라고 여기고 마오쩌둥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인민들에게 미국 제국주의를 소련의 수정주의와 아울러 중국공산당 최대의 적이라고 매도하도록 부추겨 온 마오쩌둥의 급격한 변신은 소련의 군사위협 때문이었다. 1969년 소련과의 군사적 충돌은 모택동으로 하여금 ‘미국카드’를 갖게 했다.

1971년 3월 초, 일본 나고야에서 제31회 세계 탁구선수권 대회가 열렸다. 저우언라이 중국총리는 중국대표단을 파견했다. 문화대혁명 발발 이후 처음으로 국제무대에 중국대표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선수단의 목표는 승리가 아니었으며 중국의 최대 관심사는 미국과의 접촉이었다. 미국과의 접촉을 위해서 중국 선수단에게 저우언라이 총리는 미국관련 에티켓 교육까지 시켰다. 3월25일 나고야 탁구대회가 끝날 무렵 중국은 미국 선수단의 중국 초청을 발표했다.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가 들끓었다.

며칠 후 베이징 공항에 도착한 미국 선수단 15명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국 대륙을 공식 방문한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 스탈린이 죽은 직후에 생긴 소련과 마오쩌둥간의 틈새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을 숨죽이면서 감상하던 미국의 헨리 키신저가 쾌재를 불렀다. 밑 빠진 독에 물 붇기 식의 월남전의 탈출구를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던 닉슨과 키신저의 반응은 신속했다. 그야말로 ‘죽의 장막’으로 베일에 쌓여 있던 중국대륙이 서구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 일은 순식간이었다. 닉슨의 특사로 쥐도 새도 모르게 부지런히 베이징을 드나든 키신저는 탁구선수단의 베이징 방문 불과 일 년 만에 중국을 우방국으로 만들었다.

1972년 2월, 키신저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앞장세워서 베이징으로 날아가 마오쩌둥 주석과 만났다. 두 나라는 ‘소련견제’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친구가 되었다. 두 나라의 관계개선은 각 나라에 엄청난 정치.경제적인 실익을 안겨주었다. 특히 중국은 막연한 가능성의 나라에서 외교적 경제적인 잠재력을 대내외적으로 인정받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적의 적은 아군’이란 지극히 현실주의적 발상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다. 닉슨의 뒤편에 현실주의자 키신저가 있었다면 마오쩌둥의 뒤편에선 실용주의자인 덩샤오핑이 역할을 했다. 특사(밀사)외교의 가장 빛나는 성과인 ‘핑퐁외교(Ping Pong Diplomacy)’가 국제외교사에 전설로 기록되었다.

당시 필자는 마오쩌둥으로 대변되는 중공이란 대륙 나라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하는 영원한 철천지원수로, 그리고 미국은 우리에게 하염없는 은혜를 베푼 하나님과도 같은 나라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학교에서 배웠다). 열 살을 갓 넘긴, 그야말로 지적인 호기심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필자에게 그러한 경천동지할 상황변화를 설명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핑퐁외교는 그 후 오랫동안 필자가 겪게 되는 지적인 혼란과 방황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키신저의 활약이 서방세계에 굳게 닫혀 있던 ‘죽의 장막’을 걷어 올렸듯 특사외교는 역사의 고비고비에서 늘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어 왔다. 조조군에 쫓겨서 최후의 보루였던 신야성마저 빼앗긴 유비는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다. 유비의 특사가 된 제갈량이 강남의 맹주인 오나라를 찾아 목숨을 건 외교전을 펼친 끝에 주유를 설득하고 손권을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1907년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려고 고종은 이준 이위종 이상설 등 3인을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했다. 영국의 방해로 만국평화박람회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이준 열사가 분사한 헤이그 특사 사건은 우리 역사에 길이 남는 일이 되었다. 1972년 박정희는 7.4남북공동성명을 끌어내기 위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평양에 밀사로 파견해 김일성에게 친서를 전달했다.

미국과 북한과의 관계는 사실상 전쟁 관계이다. 전쟁 중에 휴전을 합의했기 때문에 총알만 멈추었을 뿐이다. 양국가의 관계가 전쟁을 포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전까지는 전쟁 당사국인 셈이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쏴대고 있어서 주변 국가들에 불안과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지만 어쩌면 이것이 당연한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까지가 목표가 아니고, 전쟁당사국간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의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 목표일 것이다.

필자는 미국의 대외정책 핵심인 연방하원 외교위원장을 만났을 때에 바로 이것을 직접 물었다. "미국이 좀 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직접 평화의 길로 풀어낼 방도는 없는가? " 란 질문에 하워드 버맨(Howard Berman) 위원장은 오히려 주변국들의 반응은 어떻겠는가? 라고 되물었다. 그는 "중국과 일본, 심지어는 한국마저도 그것을 원하지 않고 있다" 라고 하면서, 동북아시아의 한반도 주변국들의 요구가 평화인지 아니면 제각각이 영향력 확대인지에 대해서 생각할 것을 제안했다. 러시아를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과 전쟁 직전의 순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스마트외교를 주장하고 강조하는 클린턴 국무장관의 입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북. 미간 직접외교의 방식에선 관계의 진전을 이루었다. 주변국들은 6자회담을 통해서 자국의 먹이거리를 찾기에 급급하다. 일본은 북한을 활용해서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 목표이고, 중국은 북한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해서 대미, 대일 관계에서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목표다. 북미관계의 안정 속에서 우리 민족끼리 교류.협력을 확대하는 일이 일본과 중국엔 현재로선 유쾌한 일이 아니다.

국가 간의 이익관계를 살펴보면 민족의 과제는 선명해진다. 전쟁 직전 위기에 카터가 클린턴 대통령의 명을 받아서 평양에 특사로 갔었고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로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했었다. 그래서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할 수 있었고 곧바로 미국대통령의 평양방문이란 역사적인 사건을 목전에 두기도 했었다. 이미 평양이 낯설지 않은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이나, 평양사람들에게 편안한 상대인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 같은 전문 외교관들을 평양에 특사로 파견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그렇게 황당한 일일까?

1972년 2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마오쩌둥(왼쪽) 주석과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핑퐁외교 ⓒ 위키피디아

김정일(왼쪽) 북한 국방위원장이 2000년 10월 방북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국 국무장관과 건배하고 있다. ⓒ 위키피디아


필자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겸 본지 편집위원은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한인들의 정치 참여를 통한 권리 찾기와 한인들의 정치적 위상 높이기를 목표로 93년 뉴욕 등 미 동부 대도시에 ‘한인유권자센터’를 만들어 15년째 활동해온 대표적인 정치 비정부기구(NGO) 운동가다.

한인들의 정치력을 높여온 김 소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93년 당시 7%에 불과하던 한인들의 평균 투표율은 2004년 25%로 뛰어올랐다. 최근에는 미하원의 '종군위안부 결의안' 통과와 한국국민 비자면제프로그램(VWP) 성사에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워싱턴 정가에서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한국인 출신 시민운동가로 꼽히고 있다. 2008년 미국 대선이 열리는 코커스와 프라이머리 현장을 모두 찾아 대선 현장을 생중계하고, 이를 한국과 한인들의 미국내 정치력을 높일 기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동석 미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댓글이 4 개 있습니다.

  • 4 7
    특사외교오케이

    끝내 위기를 돌파할려고 하면 상호 소통할수 있는 특사외교가 적격이라고 생각한다.
    얼마전 신문에서 증오의 역설에 대해서 나오던데...정말 좋은 논리라고 본다. 정치안보외교적 상대를 고립시키고 배제시키면 북핵문제를 더욱더 풀기 어렵고 핵개발과 중장거리 미사일기술개발에 북한은 더욱더 혈안이 될것이다. 중국정부도 전혀 북한을 완전 고립을 시킬 의사가 없는것 같고..미국도 금융경제위기로 중국을 옛날처럼 심하게 압박할 분위기는 아니고..최선의 방법은 구동존이전략으로 6자회담 당사국들이 북한을 적극적으로 설득하는 북미특사외교와 북중특사외교를 통해서 교착상태에 빠진 북핵문제해결을 위한 6자회담 돌파구를 빨리 뚫어야 한다고 본다. 위기해결에 가장 안좋은 것은 되는것도 없고 안되는것도 없이 불안한 교착상태가 장기화 되는것이다. 핵문제라는 악은 그사이 더욱더 자랄것이다. 북핵 비핵화라는 6자회담 큰 틀속에서 북한 핵문제와 미사일 문제를 풀기로 했으면 6자회딤 당사자국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참가국의 배제는 안되고 6자회담 당사자국들이 전원참가하는 대화와 협상의 큰틀속에서 끈질긴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신속해결해야 한다고 본다.이번에 북한을 제외한 6자회담 당사자국들이 북핵실험이나 하고 중장단거리 미사일이나 발사한다고 북한에 고개 숙일 국가들은 아니고 유엔이나 북핵회담 이해당사자국들이 제재압박카드로 북한의 정치경제사회 발전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고 하는것을 이번에 북한당국도 절실하게 느꼈을것이다. 북핵문제는 6자회담 큰 틀속에서 서로 원하는것을 유무상통의 원칙속에서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최상이고 최선이라는것을 북한당국도 명심해야 한다. 그외 6자회담 당사국들도 마찬가지고...어떤 정치안보외교위기던지..위기를 해결하는데 교착상태에 빠지면 뭔가 획기적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서 상호교감된 특사파견은 멋진 가뭄에 단비카드라고 본다.선군정책을 추진한 북한김정일체제의 특성상 북핵선군정책을 포기하겠냐는 것인데..본인이 보기에 북한이 중국처럼 북한 경제사회굴기를 하기 위해서는 북핵은 반드시 포기해야 한다고 본다.박정희대통령이 왜 죽었는가...핵개발이 결정적으로 박전대통령을 사지로 내몰았다고 본다. 김재규씨나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한반도에서 한국이던 북한이던 핵무장은 주변 강대국들인 미국,중국,러시아,일본 등 4강들이 전혀 동의를 안한다.왜냐고 그것은 한반도는 물론이고 동북아지역의 핵개발및 핵무장 경쟁을 촉발해서 이지역을 굉장한 안보불안지역으로 내몰것이고..미국과 중국,러시아의 정치외교안보적 발언권과 영향력 감소에 결정타가 될것이기때문이지...한국이나 북한이 미국과 중국,러시아,일본의 정치경제안보적 고립시키는 견제를 극복할 자신이 있으면 핵개발과 핵무장 된다...그런 자신이 없으면 선군정책이던 중군정책이던 핵개발과 핵무장하는 정권은 결국 파국적인 종말을 맞을것이다. 박정희씨와 김일성 남북한 양정치권력자들은 서로 반대의 길을 가다가 졸지에 사망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씨는 핵개발과 핵무장을 할려고 하다가..김일성씨는 핵개발및 핵무장을 포기할려고 했다가...그래서 김정일이 핵개발및 핵무장을 핵심으로 하는 선군정책을 들고 나온것이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중단거리 미사일개발및 보유는 곁가지 양념이고...그래서 김정일정권의 핵개발및 핵무장 선군정책포기는 풀기 어려운 딜레마적 성격의 과제를 안고 있는것이다.그러나 현재의 북한 경제사회적 위기상황을 생각하면 핵개발및 핵무기를 포기하는 용기있는 과감한 결단만이 북한정권과 북한사회에 큰 희망이 될것으로 확신한다. 북한군부와 김정일도 김일성주석사망때처럼 그런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만약에 김일성주석 주장대로 북한 군부와 북한당국이 1994년 핵개발및 핵무장이라는 선군정책을 포기하는 동시에 한국과 미국,중국,일본,러시아,유럽 등 국제사회의 다양한 경제적 집중지원과 경제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했다면 15년이 흘러간 현재 북한사회의 경제적 발전과 북한주민들의 생활향상은 베트남을 뛰어넘는 중국발전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괄목상대 해졌을것이다.북한은 그런 호조건의 발전 기회를 놓쳤다고 본다.이제 북한 당국과 북한사회는 다시한번 용기가 필요한 가운데 어려운 큰 결단을 해야 하는 전환기적 시대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이 스스로 경제적 자립이 가능하고 한반도 주변 4강들의 견제를 뚫고 국제사회와 자유로운 금융자본거래와 경제무역투자거래가 가능하면 핵개발및 핵무장을 해도 관계없다. 중장거리 미사일개발및 다량의 보유도 괜찮다.그러나 이 모든것이 미국+중국+러시아+일본+한국+유엔 등 국제사회의 고립 압박 견제로 사면초가의 정치경제사회적 위기상황에 지금처럼 봉착한다면 과감하게 핵개발및 핵무장이라는 선군정책은 용기있게 과감하게 포기해야 한다고 본다. 북한보다 정치경제적 국가실력이 월등한 일본도 동북아지역에서 핵개발및 핵무장을 못하고 있다. 그것이 한반도주변 동북아지역에서 정치안보외교적 힘의 지배적 균형이 존재하는 냉엄한 현실이다. 북한군부와 김정일위원장에게 다시 한번 간곡하게 부탁하겠다. 김일성주석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본다. 그당시 김일성주석이 이상한 졸지에 사망하지않고 북한군부와 김정일위원장의 적극적인 동의하에 북한 핵개발및 핵무장을 과감하게 포기했더라면 15년이 흘러간 현재 북한사회는 경제사회적으로 경제발전속도가 중국을 능가하는 발빠른 경제성장속도속에 고성장을 구가하고 있을것이고 국제사회 발언권과 영향력도 지금보다 엄청 강력해 졌을 것이다. 그리고 북한주민들의 생활향상도 지금보다 수십배 향상 되었을것이고,지금쯤 생활향상에 가속도가 붙고 있을것이다. 보통 북한같은 후진국형 개도국이 국제사회에 경제개방을 하면 동포국가인 경제력이 세계에서 13-15위권에 드는 한국처럼 옆에서 강력하게 서포트해줄 경제강소국이 존재한다면 북한정도의 인구와 영토를 가진 후진국형 개도국을 중진 개도국으로 만드는데는 한 20년이면 중국의 30년 경제개발성장신화를 능가할것으로 예상할수 있다. 한반도 주변 4강들과 국제사회가 원하는 선도정책을 내놓아야 북한당국과 북한사회는 지속가능한 발전이 보장된다고 본다. 선군정책은 북한정권빼고 한반도 주변 4강과 유엔 등 국제사회가 전혀 찬성 안하고 고립압박레드카드만 내던져 버린다.북한군부와 김정일위원장은 박정희전대통령 죽음과 김일성전주석 죽음이라는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본다. 핵개발및 핵무장을 과감하게 용기있게 포기하는 결단을 내릴때...북한당국과 북한주민들에게 6자회담 당사자국들과 국제사회는 북한이 원하는 경제적 지원과 경제산업 투자를 마음껏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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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적으로 대화로 해결된다고 생각지 마세요--- 시간낭비 입니다 -- 지금은 힘의 대결.......
    미제가의 공식적으로 항복선언을 선언했을때나 대화로 전환되지 그외는 기대하지 마세요..예 주한미군완전철수 한미동맹해체 주일미군완전철수..등.행동이나오기전까지

  • 4 6
    허드슨

    뉴욕대신 신의주에서 1년만 살아봐
    김정일에 대한 존경심이 10배로 늘겠지?

  • 3 5
    111

    유엔안보리 사과한마디 이면 되는데.
    은행자본가들 세계를 지배하게 하면 무슨일이 벌어질까요. ....은행자본가들이 유엔을 장악하면 무슨일이 벌어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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