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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인종 정치인 배출붐...한국은

[김동석의 뉴욕통신] 100년만에 찾아온 기회 살려야

2005년 3월, 3박4일 동안 에이팩(AIPAC, 유태인공공정책위원회) 연례총회에 참가했다. 총회 마지막날에는 늘 현직 연방의원들이 회원들과 만남의 시간을 갖는다. 필자가 있는 테이블에 두 명의 의원이 찾아와 참석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한명은 플로리다의 ‘밥 웩슬러’ 의원이고 다른 한명은 일리노이의주 재선의 연방하원인 '램 이매뉴엘(Rahm Emanuel)'이었다. 바로 이 램 이매뉴엘이 현재 백악관 비서실장이다.

이매뉴엘은 1992년 유태계들의 정치자금이 ‘백악관 드림’을 꿈꾸던 클린턴 아칸소 주지사로 쏠리게 했고, 마침내 아칸소 사단과 함께 백악관으로 들어가서 8년동안 클린턴을 그림자처럼 수행했다. 클린턴의 스캔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그래서 영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과의 관계가 아직까지도 서먹서먹하다.

이매뉴엘은 클린턴이 백악관에서 대통령 임기를 마친 이후 고향인 시카고로 돌아갔다. 연방하원에 출마하여 2002년 마침내 하원의원이 된 그는 어린 시절 고학으로 공부를 했다.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다가 손가락을 잘려서 오른편 손의 손가락 하나의 길이가 반이다. 악수를 하다가 이상해서 다시 살펴보니까 거의 손가락 하나가 없는 정도였다.

그는 이스라엘 보호를 생명같이 여기는 유태인이다. 그는 이스라엘이 분쟁에 휩싸이면 지금도 전투요원으로 지원해서 이스라엘의 전쟁터를 다녀오고 있다. “유태인들은 시민으로서 너무나 모범이기 때문에 왕따의 경향이 있다”는 궤변에 가까운 주장을 그로부터 듣기도 했다. 유태인들의 지원으로 백악관에 갈수 있었고 그러한 힘에 의해서 연방의원이 되었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가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애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직도 그의 목소리가 귀에 생생하다. 유태계는 유태 젊은이 중 정치인으로 싹수만 보여도 그냥 낚아채서 키워내고 만다.

허리케인 구스타보의 영향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서 한 달이나 뒤인 작년 12월6일 선거가 열린 루이지애나 제 2지역의 연방하원 선거에서 미국 역사상 최초의 베트남계 의원이 탄생했다. 공화당 소속의 안 조지‘프 카오(Cao)씨이다. 9선 관록의 민주당의 윌리엄 제퍼슨 현역의원이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33년 전, 공산정권의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베트남에 남긴 채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미군 수송기편으로 태평양을 건넜던 8살 베트남 소년이 연방하원이 되었다. 1967년 사이공에서 태어났고 75년 사이공이 함락될 때 베트남을 도망쳐 나온 것이다. 베트남군 장교였던 아버지는 그가 탈출할 당시 체포됐다.

그는 포담대에서 문학을 전공했지만 로욜라대 로스쿨을 거쳐 이민전문 변호사가 되었다. 변호사 개업을 한 뒤 고문 피해자를 돕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가난한 소수계 주민들을 위한 사회 문화적 개발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등 인권변호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집과 변호사 사무실이 모두 파괴된 뒤 모두 다른 지역으로 떠날 때 지역에 정착했다. 그는 그때부터 위기에 놓인 베트남 지역사회를 복원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참여했고, 보험회사와 기성 정치권과 맞서면서 지도력을 인정받아 정치지도자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그는 현역인 제퍼슨의원이 뇌물 수뢰 혐의로 연방검찰에 기소되자 공화당 후보로 과감하게 도전했다. 루이지애나는 물론이고 전국의 베트남계들이 안 조지프 카오를 위해서 발벗고 나섰다. 두달 동안 70만 달러를 모아서 그에게 보냈다. 베트남계들이 루이지애나에 몰렸으며 그들은 지역 언론을 움직이려고 사력을 다해서 공을 들였다. 루이지애나 베트남계들을 상대로 신문구독하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들의 정성에 감동을 받은 지역언론들이 카오를 위해서 움직였다. 결국 카오는 49.6%의 득표율로 46.8%의 제퍼슨을 따돌렸다.

베트남계들에겐 한인사회의 ‘한인회’같은 단체도 없다. 무슨 직능단체도 변변치 않다. 그러나 소문이 그들의 입과 입으로 전달되는 것으로만 그렇게 모금을 했고 사람이 모여든 것이다. 루이지애나 주지사인 ‘바비 진달’을 위해 인도계들이 결집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안 조지프 카오’가 출마를 위하여 공화당 문을 노크 했을 당시인 불과 수개월전 그에게 관심을 돌린 공화당 인사는 아무도 없었다. 당선이 된 직후 2008년 하원선거의 최대의 이변이라고 하면서 공화당의 존 뵈너 원내대표는 특별성명까지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한국계의 최준희씨가 재선의 시장선거를 앞두고 있다. 수년동안 힘겹게 전국을 돌면서 겨우겨우 기본금액 모금을 했고, 자력으로 구시대 정치세력을 물리쳐서 시장에 당선된지 만3년이 되었다. 지난 3년 동안 사력을 다해서 에디슨시의 고질적인 부정과 부패를 일소하는 데에 성공했다. 게다가 최준희시장은 일찌감치 오바마팀에 합류해서 이제는 당권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떠오르는 개혁의 정치신인 한국계의 최준희 시장이라고 정작 주류정치권에선 소문이 났는데 우리 한인동네에선 그냥 그대로다. 조금의 가능성만 엿보여도 어떻게 해서든지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유태계, 베트남계, 인도계 등 각각의 소수인종 그룹이 이처럼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데 대뉴욕지구한인회를 비롯해서 단체와 단체들로 겹겹이 쌓여있는 자랑스런 우리동네는 정녕 한국의 정치처럼 신인을 키우지 않는 ‘신인 정치인의 동토(凍土)’를 다시 반복할 것인가? 232년만에 노예로 취급됐던 흑인이 대통령을 배출한 ‘오바마 돌풍’이 미국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지금은 그야말로 소수계가 주류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100년만의 기회인 셈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있을 지 아무도 모른다.

램 이매뉴엘(왼쪽) 미 백악관 대통령 비서실장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대통령 취임식 이틀후인 지난 1월22일(현지시간) 백악관 집무실에서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 백악관

2005년 뉴저지주 에디슨시장으로 당선된 한국계의 최준희 시장이 오바마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하는 등 민주당의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1월 기자회견 모습 ⓒ 미 뉴저지주 에디슨시


필자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겸 본지 편집위원은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한인들의 정치 참여를 통한 권리 찾기와 한인들의 정치적 위상 높이기를 목표로 93년 뉴욕 등 미 동부 대도시에 ‘한인유권자센터’를 만들어 15년째 활동해온 대표적인 정치 비정부기구(NGO) 운동가다.

한인들의 정치력을 높여온 김 소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93년 당시 7%에 불과하던 한인들의 평균 투표율은 2004년 25%로 뛰어올랐다. 최근에는 미하원의 '종군위안부 결의안' 통과와 한국국민 비자면제프로그램(VWP) 성사에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워싱턴 정가에서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한국인 출신 시민운동가로 꼽히고 있다. 미국의 대선과 총선 및 워싱턴과 지역 정치권 현장에서 시민들의 정치력과 권리신장 운동에 나서면서, 이를 한국과 한인들의 미국내 정치력을 높일 기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댓글이 1 개 있습니다.

  • 13 12
    111

    미국중심에서 ..........
    한반도중심으로 바꿔봐......
    한반도중심이라면 남북한중심.....
    몹시 재미있을텐데........ 몹시 기대하겟지만.
    식민지 근성때문에..
    못벗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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