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하나의 오바마', 데이비드 플라프
[김동석의 뉴욕통신] "작은 조직으로 큰 그림을 채운다"
전략가인 엑슬로드는 오바마로부터 정치고문으로 임명돼 백악관으로 들어갔고, 데이비드 플라프는 오바마의 성공을 위해 변함없이 캠페인을 이어가고 있다. <버락오바마닷컴(barackobama.com)>을 <USA서비스닷컴(usaservice.com)>으로 바꾸며 오바마 캠프를 자원봉사 캠프로 바꾸었다. 온라인상으로 계속해서 자원봉사자를 양성시키고 있다. 오바마 정책을 지지하는 활동으로 지역사회를 위한 자원봉사활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선거자금 모금을 자선모금으로 바꾸었다.
그는 오바마가 추진하는 경기부양법안의 의회통과를 위해 여론을 만들었다. 오바마가 의회를 설득하는 동안 데이비드 플라프는 지역에서 유권자들의 여론을 만들었다. 전문 정치컨설턴트가 오바마란 걸출한 정치 지도자를 만나서 사회활동가로 변신한 것이다. 기존의 정치권력 밖에서 시민들의 요구를 힘으로 만들어서 정치세력화한 데이비드 플라프의 세상바꾸기는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백악관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엑슬로드와 시민사회에서 오바마의 지지세를 높여가는 플라프가 있는 한 오바마는 분명히 성공할 것이란 것이 '두 데이비드'를 아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오바마 캠프의 캠페인 매니저인 데이비드 플라프는 델라웨어 출신이다. 델라웨어대학(University of Delaware)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현실정치 감각을 익혔다. 1990년 아이오와에서 탐 하킨(Tom Harkin)을 상원에 당선시키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어 매샤츄세츠에서 존 올리버(John Olver)를 연방하원에 진출시켰다. 이러한 명성으로 플라프는 1995년 민주당 상원선거위원회에 사무총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이어서 1996년 뉴저지주의 브래들리의 자리에 밥 토리첼리를 상원의원으로 당선시키면서 캠페인 전문가로 자리를 굳혔다.
바로 이때 플라프는 뉴저지에서 아시안계를 만나게 되었고 당시 버겐카운티 후리홀더로 출마한 김석영후보의 선거를 돕던 한인유권자센타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토리첼리 선거에서 성공한 플라프는 민주당 하원원내대표인 딕 게파트의 비서실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1999년엔 민주당하원선거대책본부장으로 9천5백만 달러를 모금하는 기록을 세웠다. 2000년 플라프는 <시카고트리뷴>의 기자 출신인 데이비드 엑슬로드와 함께 “AKP&D 메시지 & 미디어(AKP&D Message and Media)"란 정치홍보회사를 설립했다.
플라프는 2004년 엑슬로드의 소개로 오바마를 소개 받았고 플라프, 엑슬로드는 그해 오바마를 연방상원에 당선시켰다. 그리고 곧바로 플라프의 제안으로 ‘오바마의 백악관행'을 설계했다. “작은 조직으로 큰 그림을 채운다”는 그림을 그린 게 플라프다. 플라프는 풀뿌리(Grass Root)조직의 힘을 철저하게 믿는다. 플라프는 한인들이 풀뿌리 운동으로 일본의 워싱턴 로비를 이긴 예(일본군위안부결의안 의회통과)를 오바마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2007년 7월 ’위안부결의안 하원통과‘는 오바마 캠프가 당의 중앙권력을 피해서 풀뿌리 전략을 결심하도록 하는 데 일조했다.
플라프는 시민들의 요구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능력이 있다. 반면에 시민의 요구를 간결하게 메시지로 만드는 역할은 엑슬로드 몫이었다. 풀뿌리 조직을 찾아내고 만들었다. 그것을 넷 워킹하고 온라인으로 모금에 성공을 했다. 플라프는 “온라인상으로 소액의 금액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데에 처음에는 믿어지지가 않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바마 캠페인을 끌고 가면서 스스로도 변했다고 한다. 정치컨설턴트라는 역할이 아니고 세상을 바꾸는 데에 신념이 생겼다고 했다. 서민들과 소외계층, 그리고 소수계들로부터의 정직한 반응에 정치적인 신념이 생겼다고 한다.
플라프는 정치컨설턴트로서 몸값이 비싸기로 소문난 전문가였다. 그러나 오바마 캠프에선 한 푼의 돈도 받질 않았다. 그것은 액슬로드도 마찬가지다. 서민들의 소액다수 헌금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바마 캠프에 전염병같이 번져서 오바마는 인건비가 안드는 (전액홍보비용) 캠페인을 가능케 했다. 데이비드 플라프는 좀처럼 언론에 나타나질 않는다. 그의 얼굴은 겨우겨우 온라인상에서만 볼 수가 있다. 오바마는 플라프를 가르켜 “그는 나에게 균형감각을 유지시키도록 하는 데 최고의 선생이다”라고 했다.
자기 일만 알고 욕심이 없는 플라프의 가장 특별한 특기는 집중력이다. 필자는 지난해 1월 사우스캐롤라이나 프라이머리에서 잠깐 플라프를 만났었다. 1996년 뉴저지 토리첼리의원의 선거이야기로 잠시 인사를 나누었고 그리고는 접촉이 불가능했다. 때때로 이메일로 접촉을 시도했지만 반응은 없었다. 다만 선거판의 내부 이야기를 메일로 보내주는 덕분에 끊임없이 오바마 이야기를 한국언론에 이어갈 수가 있었다. 그래서 오바마 당선을 그가 확신하는만큼 필자도 확신했다.
마침내 필자가 플라프를 만났다. 지난 2월12일,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데이비드 플라프가 등장하는 정치행사를 워싱턴서 개최했다. 미국정치권에서 언론이 가장 접근하기 힘들다고 소문난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인 ‘존 포데스터’와 ‘데이비드 플라프’를 비공개를 조건으로 내셔널 프레스 센타에 불러냈다. 필자도 폴리티코의 초청으로 참가를 했다.
오바마 당선후 처음으로 데이비드 플라프를 만났다. 오바마의 성공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하는 플라프는 여전히 풀뿌리 운동의 중요함을 강조했다. 2시간 동안의 “오바마캠페인” 관련 강연에서도 그는 풀뿌리조직(Grass Root Organization)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소수계들의 정치참여를 위한 오바마의 역할은 그야말로 역사를 바꾸었다고 하면서 아시안계의 투표율이 얼마나 올랐는가 물어오기도 했다. 가장 몸값이 비싼 그가 풀뿌리 운동에 헌신하겠다고 결심한 것을 보면 그도 역시 “또다른 오바마”란 생각이 들었다.
필자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겸 본지 편집위원은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한인들의 정치 참여를 통한 권리 찾기와 한인들의 정치적 위상 높이기를 목표로 93년 뉴욕 등 미 동부 대도시에 ‘한인유권자센터’를 만들어 16년째 활동해온 대표적인 정치 비정부기구(NGO) 운동가다.
한인들의 정치력을 높여온 김 소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93년 당시 7%에 불과하던 한인들의 평균 투표율은 2004년 25%로 뛰어올랐다. 최근에는 미하원의 '종군위안부 결의안' 통과와 한국국민 비자면제프로그램(VWP) 성사에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워싱턴 정가에서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한국인 출신 시민운동가로 꼽히고 있다. 2008년 미국 전역에서 열린 대선 현장을 모두 찾아 대선 현장을 생중계하고, 이를 한국과 한인들의 미국내 정치력을 높일 기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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