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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선생 "사람이 뿌리"

고별강연에서 "사람을 길러내는 숲을 만드는 일 중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주인공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18년 간의 교수생활을 마감하는 고별강의를 가졌다. 마지막 강의에서 그가 내세운 것은 바로 '사람'이었다.

통혁당 사건으로 20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감옥에서 바로 나온 지난 89년, 신영복 교수는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18년의 시간이 지난 2006년, 그는 이제 강단에서의 마지막 강의를 하고 있었다.

신 교수는 8일 성공회대 대학성당에서 가진 고별 강의에서 유난히 '사람'을 강조했다. 이 세상에서 희망을 갖고 살 수 있는 것은 결국 사람이란 것을 강조한 것이다.

신 교수는 '희망의 언어 석과불식'이란 주제의 강의를 통해 절망으로부터 희망을 읽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석과불식'이란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란 뜻으로 주역 박괘의 효사에 있는 구절이다.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희망의 언어 석과불식'이란 주제의 고별강연을 하고 있다. ©뷰스앤뉴스


신 교수가 강조한 절망을 희망으로 만드는 단계는 우선 입사귀를 뜯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엽락(葉落)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사회 경제적 구조의 거품을 떨고 정치적 주체성을 냉정히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단계로 신 교수가 제시한 것은 분본(糞本)이다. 여기서 우리 사회의 토대인 본이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다.

신 교수는 "우리 사회의 뿌리, 토대는 바로 사람(人)이다"며 "절망의 괘를 희망의 괘로 바꾸는 것이 바로 사람을 기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 교수는 이어 "사람은 차가운 머리만 갖고는 안 되고 따뜻한 가슴까지 가야 한다"며 "한 그루의 나무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가장 먼 여행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완성된 나무가 숲으로 완성된다는 것이 신 교수가 강조한 것이다.

특히 신 교수는 '숲'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숲은 나무의 완성이고 나무를 길러내는 시스템"이라며 "가장 어려운 상황을 희망의 상황으로 만드는 것이 사람을 아름답게 길러낼 수 있는 숲을 만드는 것"이라는 신 교수의 말이 '숲'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메시지인 것이다.

이 같은 숲의 기능을 학교와 사회가 해야 한다는 점도 신 교수가 강조한 사항 중 하나이다. 신 교수는 "숲은 수많은 나무를 길러내는 시스템이고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이 학교, 사회의 과제"라며 "저는 적어도 성공회대가 작은 숲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8년 간 강의를 했던 성공회대학교에 대한 감회도 남달랐다. 신 교수는 "나는 성공회대라는 작은 숲에 있었지만 숲을 만드는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한 복판에 있었다는 사실이 대단히 감사드리고 싶은 일"이라고 심경을 밝혔다.

신 교수는 강의를 마친 후에도 학교 생활과 비슷한 생활을 할 것으로 예상했다. 신 교수는 자신의 삶에 대해 "감옥에 가기 전 20년과 감옥생활 20년, 감옥에서 나온 후 20년으로 나뉜다"며 "어떤 사람들은 감옥생활도 학교로 쳐주기 때문에 나는 계속 학교에서 생활해 왔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신 교수는 '정년'이라는 말을 사용하긴 했지만 자신의 마지막 일생도 학교와 함께할 것임을 강조했다.

신영복 교수의 마지막 강의를 듣기 위해 성공회대 학생들과 일반인, 취재진들이 몰려들었다. ©뷰스앤뉴스


신 교수는 "정년이 끝이라는 개념은 관념적으로 상정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며 "어디에 있든 여러분과 함게 곳곳에 씨를 묻는 일을 하기를 여러분에게도 당부드리고 저도 그렇게 할 것으로 약속드린다"고 향후 계획에 대해 밝혔다.

신영복 교수는 통일혁명당 간첩사건으로 20년 간 수감생활을 한 뒤 지난 1988년 출소, 이듬해인 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해 왔다

다음은 신영복 교수의 마지막 강의에 사용된 사전원고 전문이다. 신 교수는 이 전문을 바탕으로 강의에서 구체적 설명을 곁들였다.

희망의 언어 석과불식(碩果不食)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언어가 바로 희망이라고 생각된다. 아마 그 다음이 인내일 것이다. 현재의 상황을 무작정 견디는 것이라고 한다면 희망은 견디기는 견디되 곤경의 건너편을 바라보는 것이다. 무작정 인내하기보다 희망을 잃지 않고 있는 경우가 훨씬 수월하다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수시로 확인된다. 절망이란 의미가 희망이 없다느 뜻이고 보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희망이란 참으로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희망도 희망 나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희망이 단지 소망이나 위안에 불과한 적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다"는 시구를 비롯하여 희망의 언어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수많은 담론 중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희망의 언어는 '석과불식'이다. 이 말은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욱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기도 한다. 주역 박괘의 효사에 있는 구절이다. 씨 과실은 결코 먹히지 않는 법이며 씨 과실은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 이 말에서 나는 옛 사람의 지혜를 읽게 된다. 수많은 세월을 면면히 겪어오면서 터득한 옛사람들의 유장함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이 괘를 읽을 때마다 고향의 감나무를 생각한다. 장독대와 우물 옆에 서 있는 큰 감나무다. 무성한 낙엽을 죄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로만 서 있는 초결울의 감나무는 들판의 전신주와 함께 겨울바람이 가장 먼저 달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겨울의 입구에서 그 앙상한 가지로 서 있는 나무는 비극의 표성이며 절망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앙상한 가지 끝에 달려 있는 빨간 감 한 개는 글자 그대로 희망이다. 그것은 먹는 것이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씨를 남기는 것이다. 나목의 가지 끝에서 빛나는 가장 크고 탐스런 씨 과실은 그것이 단 한 개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희망이다. 그 속에 박혀있는 씨는 이듬해 봄에 새싹이 되어 땅을 밟고 일어서기 때문이다.

석과불식이 표상하는 이러한 정경이 더 없이 아름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희망의 언어를 이처럼 낭만적 그림으로 갖는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낭만은 흔히 또 하나의 환상이라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곤경에서 갖는 우리들의 희망이 단지 소망이나 위안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의미로 이 정경을 읽어야 할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희망은 우리들 스스로가 키워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밭을 일구고 씨를 심는 경작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WTO, IMF, FTA 라는 일련의 힘겨운 상황에서 나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잇는 박(剝)괘를 연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진정한 희망을 갖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환상이나 소망이 아닌 진정한 희망을 키워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당면한 과제라고 생각된다.

나는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앙상하게 드러난 나무의 뼈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성한 잎이 떨어지고 한파 속에 팔 벌리고 서있는 나목의 뼈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거품이 걷히고 난 후의 우리 경제의 모습을 직시하는 일이다. 비단 경제구조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틀어 돌이켜 보는 일이다. 그러한 역사를 살아온 우리들 스스로의자화상을 대면하는 일이다. 남의 돈을 빌려 살림을 꾸리고 자녀들을 내몰아 오로지 돈 벌어 오기만을 호령해 온 어른들의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이 아니었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하든 이 겨울을 넘기고 나면 다시 봄이 오겠지. 이것은 안이한 답습의 낡은 언어이며 결코 희망의 언어가 아니다. 희망은 새로운 땅에 싹트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희망은 새로운 땅을 일구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돼야 할 것이다. 동토에 쟁기를 박아 넣는 견고한 의지에서부터 시작돼야 할 것이다. 더 이상 패배할 수 없는 천근의 땅에 씨앗을 심는 각오여야 하기 때문이다.

산지박괘의 다음 괘는 '지뢰복' 괘다. 다섯 개의 음효가 위로 쌓여 있고 제일 밑바닥에 한개의 양효가 싹트고 있는 모양이 복 괘의 형상이다. 글자 그대로 광복이다. 씨 과실 속에 있던 씨앗이 땅 속에서 싹 트는 모습이다. 우리 사회의 가능성을 키워내는 것 이것이 절망의 괘에서 희망을 읽는 진정한 독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곤경을 견뎌야 할 지 모른다. 그럴수록 더욱 간절해지는 것이 희망의 언어다. 희망을 키워내는 실천의 방법이다.
이영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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