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흑인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 기념관 건립
1945년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ML 데뷔. 야구계와 미국 사회에 상징적 사건
미국 메이저리그(MLB) 사상 첫 흑인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 뉴욕에 건립된다.
MLB 공식 사이트인 <MLB.com>은 5일(한국시간) "로빈슨의 사망 35주기를 맞아 뉴욕 맨하탄 허드슨 스퀘어 1번가에 기념관을 짓는다."고 보도했다.
재키 로빈슨 재단은 총 2천500만 달러(우리돈 약 225억원)가 소요되는 기념관의 건립비용을 뉴욕메츠, 뉴욕양키스, 나이키 등 7개의 단체에서 지원을 받아 충당할 예정이다.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메이저리그 데뷔
로빈슨의 본명은 잭 루즈벨트 로빈슨(Jack Roosevelt Robinson)으로 1947년 4월 15일 브루클린 다저스 선수로 출전하면서 20세기 첫 흑인 메이저리거로 기록됨과 동시에 MLB 무대에서 오랜동안 이어져 오던 인종의 벽을 허물어버렸다.
물론 MLB 초창기였던 1800년대 후반에도 흑인 선수가 활약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MLB 근대화 되고 프로의 모습을 갖춘 시기에 활약한 흑인 메이저리그는 로빈슨이 최초다.
로빈슨의 MLB 데뷔는 야구가 백인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져 왔던 미국 사회의 기존의 통념을 깬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당시 야구팬들과 언론들은 로빈슨에 집중했고, 로빈슨은 엄청난 압박감을 감수하며 활약해야 했다. 특히 그라운드에서 팬들이 던지는 노골적인 인종차별적 야유와 욕설에 평정심을 유지해야 했을 뿐 아니라 그 와중에 뛰어난 플레이를 펼쳐보여야 하는 이중부담을 안고 있었다.
각종 인종차별적 모욕 이겨내고 데뷔시즌 신인왕에 1949년 MVP 수상
그가 다저스와 계약하는 것을 반대했던 어떤 선수는 트레이드 되어 팀을 떠나야 했고, 어떤 선수는 그와 같은 호텔을 쓰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또한 KKK단은 로빈슨에게 살해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다저스 구단은 로빈슨에게 팬들의 조롱과 야유에 직접적인 대응을 하지 말것을 주문했고, 로빈슨은 구단의 방침에 무조건 따를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이런 엄청난 압박에도 불구하고 로빈슨은 데뷔시즌에 내셔널리그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했고, 1949년에는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그가 다저스에서 뛰는 동안 다저스는 무려 여섯 차례나 내셔널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월드시리즈도 한 차례 제패했다.
이후에도 로빈슨은 1957년 뉴욕 자이언츠에서 현역 선수생활을 마감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모범적인 자세와 훌륭한 기량으로 끝까지 메이저리거로서 살아남았고,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됐다.
1962년 MLB 명예의 전당 헌액. 로빈슨의 배번 42번은 MLB 전체 영구결번
로빈슨 이후 수많은 유색인종선수들이 MLB 무대에서 스타플레이어로 이름을 날렸다. '홈런왕' 행크 애런, 윌리 메이스, 앨버트 푸홀스, 새미 소사, 토니 그윈 등 수많은 유색인종 선수들이 로빈슨이 이뤄낸 업적의 수혜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코리언특급' 박찬호나 일본 출신의 '안타제조기' 이치로 스즈키도 마찬가지다.
MLB는 지난 1962년 로빈슨을 MLB 명예의 전당에 헌액했다. 그리고 1997년 로빈슨의 배번 42번은 MLB 사무국에 의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됐다. 로빈슨의 등번호였던 42번은 현재 MLB 모든 구단에서 영구 결번이 된 유일한 배번이다.
로빈슨은 단순히 최초의 흑인 선수라는 타이틀 외에 훌륭한 인격과 뛰어난 기량으로 오늘날 단순히 유색인종 선수들에게만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존재가 아닌 MLB 전체가 본받을만한 업적을 이뤄낸 선수로서 기억되고 있다.
MLB 공식 사이트인 <MLB.com>은 5일(한국시간) "로빈슨의 사망 35주기를 맞아 뉴욕 맨하탄 허드슨 스퀘어 1번가에 기념관을 짓는다."고 보도했다.
재키 로빈슨 재단은 총 2천500만 달러(우리돈 약 225억원)가 소요되는 기념관의 건립비용을 뉴욕메츠, 뉴욕양키스, 나이키 등 7개의 단체에서 지원을 받아 충당할 예정이다.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메이저리그 데뷔
로빈슨의 본명은 잭 루즈벨트 로빈슨(Jack Roosevelt Robinson)으로 1947년 4월 15일 브루클린 다저스 선수로 출전하면서 20세기 첫 흑인 메이저리거로 기록됨과 동시에 MLB 무대에서 오랜동안 이어져 오던 인종의 벽을 허물어버렸다.
물론 MLB 초창기였던 1800년대 후반에도 흑인 선수가 활약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MLB 근대화 되고 프로의 모습을 갖춘 시기에 활약한 흑인 메이저리그는 로빈슨이 최초다.
로빈슨의 MLB 데뷔는 야구가 백인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져 왔던 미국 사회의 기존의 통념을 깬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당시 야구팬들과 언론들은 로빈슨에 집중했고, 로빈슨은 엄청난 압박감을 감수하며 활약해야 했다. 특히 그라운드에서 팬들이 던지는 노골적인 인종차별적 야유와 욕설에 평정심을 유지해야 했을 뿐 아니라 그 와중에 뛰어난 플레이를 펼쳐보여야 하는 이중부담을 안고 있었다.
각종 인종차별적 모욕 이겨내고 데뷔시즌 신인왕에 1949년 MVP 수상
그가 다저스와 계약하는 것을 반대했던 어떤 선수는 트레이드 되어 팀을 떠나야 했고, 어떤 선수는 그와 같은 호텔을 쓰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또한 KKK단은 로빈슨에게 살해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다저스 구단은 로빈슨에게 팬들의 조롱과 야유에 직접적인 대응을 하지 말것을 주문했고, 로빈슨은 구단의 방침에 무조건 따를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이런 엄청난 압박에도 불구하고 로빈슨은 데뷔시즌에 내셔널리그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했고, 1949년에는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그가 다저스에서 뛰는 동안 다저스는 무려 여섯 차례나 내셔널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월드시리즈도 한 차례 제패했다.
이후에도 로빈슨은 1957년 뉴욕 자이언츠에서 현역 선수생활을 마감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모범적인 자세와 훌륭한 기량으로 끝까지 메이저리거로서 살아남았고,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됐다.
1962년 MLB 명예의 전당 헌액. 로빈슨의 배번 42번은 MLB 전체 영구결번
로빈슨 이후 수많은 유색인종선수들이 MLB 무대에서 스타플레이어로 이름을 날렸다. '홈런왕' 행크 애런, 윌리 메이스, 앨버트 푸홀스, 새미 소사, 토니 그윈 등 수많은 유색인종 선수들이 로빈슨이 이뤄낸 업적의 수혜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코리언특급' 박찬호나 일본 출신의 '안타제조기' 이치로 스즈키도 마찬가지다.
MLB는 지난 1962년 로빈슨을 MLB 명예의 전당에 헌액했다. 그리고 1997년 로빈슨의 배번 42번은 MLB 사무국에 의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됐다. 로빈슨의 등번호였던 42번은 현재 MLB 모든 구단에서 영구 결번이 된 유일한 배번이다.
로빈슨은 단순히 최초의 흑인 선수라는 타이틀 외에 훌륭한 인격과 뛰어난 기량으로 오늘날 단순히 유색인종 선수들에게만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존재가 아닌 MLB 전체가 본받을만한 업적을 이뤄낸 선수로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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