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와 '파파라치'
<뷰스 칼럼> 이재오, 에르메스, 이외수, 향음 국감...
1987년 대선이 끝나고 그 다음해초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이 있는 직후의 일이다. 벌써 근 20년 전 일이다.
종로에서 금은, 보석을 도매로 취급하는 친구와 술자리를 함께 했다. 당시 보석은 공업용 외에는 수입금수 품목이었다. 때문에 밀수로 들어오는 물건이 대부분이었고, 그러다보니 이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를 친구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이때 이 친구가 위험한 얘기를 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같은 사람들에게도 직업병이 있어. 사람을 만나도 무슨 시계를 차고 있나, 어떤 반지를 끼고 목거리를 하고 있나를 살피는 식이지. TV에서 행사를 중계하거나 뉴스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어느 고관대작 마나님이 어떤 보석을 차고 있나를 살피게 돼. 그런데 말이야, 며칠 전 대통령 취임식때 못볼 걸 보고야 말았어.
취임식장에 들어선 영부인 손가락에 큰 자수정이 박힌 반지가 끼어있는 게 아니겠어. 순간 눈을 의심했어. 그 보석은 몇달전 이곳에 들어온 물건이었기 때문이야. 대단한 물건이었어. 값도 엄청났지. 그런데 이 물건이 어디론가 팔려나간 거야. 누가 사갔는지는 당연히 모르지. 누가 사갔는지를 밝히지 않는 게 이 동네 불문률이야. 헌데 그 물건이 영부인 손에 끼어있으니 놀랄 수밖에.
뻔한 것 아니겠어. 누군가 바친 거겠지. 정권 앞날이 뻔해 보이더군. 이 얘기 어디 가서 하지마. 당연히 쓰지도 말고. 내 인생 종 치는 수 있으니까."
'세상에 비밀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로부터 근 20년이 흐른 지금,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얼마 전에는 이재오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뒤늦게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즉결재판에 넘겨지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명박 대운하' 홍보차 추석때 자전거 일주를 하던 중 올림픽 도로를 자전거로 달린 사진을 본 시민이 이 최고위원을 경찰서에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신고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 부인의 1천만원짜리 '에르메스' 핸드백이 도마위에 올랐다. 이 또한 문제의 핸드백을 들고 있는 이 후보 부인의 사진을 본 한 네티즌의 문제 제기에 따른 것이었다.
한나라당은 뒤늦게 이 후보 셋째 사위가 장모 환갑을 맞아 선물한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고 <조선일보> 같은 경우는 "이명박 후보 같은 재산가의 부인이라면 '에르메스'를 드는 건 죄가 아니다"라며 지원 사격을 했으나, '서민후보'임을 강조해온 이 후보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아픈 일격이었다. 앞으로 두고두고 따라다닐 '부자후보' 꼬리표가 달렸기 때문이다.
소설가 이외수씨가 이 후보의 맞춤법을 문제삼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의 사건이다. 이외수씨는 현충일날 이 후보의 현충원 방명록을 문제삼았다. 문제의 방명록은 언론에 일찌감치 공개됐던 것이다. 이 후보 전담기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후보 맞춤법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맞춤법까지 문제 삼기에는...', 이런 분위기가 있어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외수씨가 이를 정면으로 문제삼고 나서면서 세간의 화제가 되며 이 후보에게 타격을 가했다.
정치인들 입장에서 보면 요즘 세상은 시쳇말로 '정치 해먹기 힘든 세상'이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뭐 잘못된 게 없나 샅샅이 훑는 시민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세상이 달라져도 크게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투덜대는 건 어리석은 정치인의 대응이다. 현명한 정치인은 달라진 현실을 교묘히 활용하기도 한다. 그런 대표적 예가 클린턴 전 미대통령이다.
1992년 미국 대선때 일이다. 클린턴 민주당 대선후보는 기차를 이용해 전국유세를 했다. 당연히 내리는 역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그런데 클린턴은 지지자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며 한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당연히 세계의 관심은 클린턴이 들고 있는 책이 뭔가에 쏠렸다. 미국의 차기 유력대선주자가 읽는 책이라면 그가 집권시 어떤 정책을 펼 것인가를 감지할 수 있는 중요단서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세간에 알려진 책이 당시만 해도 무명에 가깝던 로버트 라이시 교수의 <Works of Nations(국가가 할 일)>이다. 양극화가 극심해지는 약육강식의 세계화시대에 공동체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는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한 책이었다. 한 손에 들고 있던 라이시 교수의 책을 통해 클린턴은 '서민-중산층'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심을 하고 있는 후보인가라는 포지티브 이미지를 얻는 데 성공했고, 클린턴은 대통령이 된 후 라이시 교수를 초대 노동부장관으로 기용해 그의 소신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했다.
국내에서도 클린턴이 당선되자마자 외교부가 문제의 라이시 교수 책을 긴급입수해 열댓명이 쪼개 맡아 긴급번역해 정책분석자료로 삼는 등 클린턴의 '책 전술'은 국내외적으로 보기좋게 적중했다.
정치는 '대세'를 따르는 것이지, 거역하는 게 아니다. 지금 대세는 '민(民)'이며, 지금 '민'은 파파라치 수준이다.
지금 한나라당을 당혹케 하고 있는 '대전 국감 향응' 파문만 해도, 문제의 술집주인이 "17년산 윈저 3병에 맥주 10여병만 마셨고 술값은 68만원이 나왔다"고 해명하자, 인터넷상에는 즉각 "안주는 공짜로 줬냐. 그리고 여성접대부 3명 팁은 안줬냐. 어디, 그렇게 인심 좋은 술집에 한번 놀러가 보자"며 허구성을 질타하는 글들이 빗발치고 있다.
이제는 몇몇 언론을 컨트롤한다고 여론이 조작되는 시대가 아니다. '민'이 여론을 만드는 시대다. '민'에 거역하지 말고 '민'을 무서워할 때만 정치도 생존가능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종로에서 금은, 보석을 도매로 취급하는 친구와 술자리를 함께 했다. 당시 보석은 공업용 외에는 수입금수 품목이었다. 때문에 밀수로 들어오는 물건이 대부분이었고, 그러다보니 이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를 친구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이때 이 친구가 위험한 얘기를 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같은 사람들에게도 직업병이 있어. 사람을 만나도 무슨 시계를 차고 있나, 어떤 반지를 끼고 목거리를 하고 있나를 살피는 식이지. TV에서 행사를 중계하거나 뉴스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어느 고관대작 마나님이 어떤 보석을 차고 있나를 살피게 돼. 그런데 말이야, 며칠 전 대통령 취임식때 못볼 걸 보고야 말았어.
취임식장에 들어선 영부인 손가락에 큰 자수정이 박힌 반지가 끼어있는 게 아니겠어. 순간 눈을 의심했어. 그 보석은 몇달전 이곳에 들어온 물건이었기 때문이야. 대단한 물건이었어. 값도 엄청났지. 그런데 이 물건이 어디론가 팔려나간 거야. 누가 사갔는지는 당연히 모르지. 누가 사갔는지를 밝히지 않는 게 이 동네 불문률이야. 헌데 그 물건이 영부인 손에 끼어있으니 놀랄 수밖에.
뻔한 것 아니겠어. 누군가 바친 거겠지. 정권 앞날이 뻔해 보이더군. 이 얘기 어디 가서 하지마. 당연히 쓰지도 말고. 내 인생 종 치는 수 있으니까."
'세상에 비밀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로부터 근 20년이 흐른 지금,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얼마 전에는 이재오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뒤늦게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즉결재판에 넘겨지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명박 대운하' 홍보차 추석때 자전거 일주를 하던 중 올림픽 도로를 자전거로 달린 사진을 본 시민이 이 최고위원을 경찰서에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신고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 부인의 1천만원짜리 '에르메스' 핸드백이 도마위에 올랐다. 이 또한 문제의 핸드백을 들고 있는 이 후보 부인의 사진을 본 한 네티즌의 문제 제기에 따른 것이었다.
한나라당은 뒤늦게 이 후보 셋째 사위가 장모 환갑을 맞아 선물한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고 <조선일보> 같은 경우는 "이명박 후보 같은 재산가의 부인이라면 '에르메스'를 드는 건 죄가 아니다"라며 지원 사격을 했으나, '서민후보'임을 강조해온 이 후보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아픈 일격이었다. 앞으로 두고두고 따라다닐 '부자후보' 꼬리표가 달렸기 때문이다.
소설가 이외수씨가 이 후보의 맞춤법을 문제삼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의 사건이다. 이외수씨는 현충일날 이 후보의 현충원 방명록을 문제삼았다. 문제의 방명록은 언론에 일찌감치 공개됐던 것이다. 이 후보 전담기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후보 맞춤법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맞춤법까지 문제 삼기에는...', 이런 분위기가 있어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외수씨가 이를 정면으로 문제삼고 나서면서 세간의 화제가 되며 이 후보에게 타격을 가했다.
정치인들 입장에서 보면 요즘 세상은 시쳇말로 '정치 해먹기 힘든 세상'이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뭐 잘못된 게 없나 샅샅이 훑는 시민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세상이 달라져도 크게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투덜대는 건 어리석은 정치인의 대응이다. 현명한 정치인은 달라진 현실을 교묘히 활용하기도 한다. 그런 대표적 예가 클린턴 전 미대통령이다.
1992년 미국 대선때 일이다. 클린턴 민주당 대선후보는 기차를 이용해 전국유세를 했다. 당연히 내리는 역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그런데 클린턴은 지지자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며 한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당연히 세계의 관심은 클린턴이 들고 있는 책이 뭔가에 쏠렸다. 미국의 차기 유력대선주자가 읽는 책이라면 그가 집권시 어떤 정책을 펼 것인가를 감지할 수 있는 중요단서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세간에 알려진 책이 당시만 해도 무명에 가깝던 로버트 라이시 교수의 <Works of Nations(국가가 할 일)>이다. 양극화가 극심해지는 약육강식의 세계화시대에 공동체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는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한 책이었다. 한 손에 들고 있던 라이시 교수의 책을 통해 클린턴은 '서민-중산층'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심을 하고 있는 후보인가라는 포지티브 이미지를 얻는 데 성공했고, 클린턴은 대통령이 된 후 라이시 교수를 초대 노동부장관으로 기용해 그의 소신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했다.
국내에서도 클린턴이 당선되자마자 외교부가 문제의 라이시 교수 책을 긴급입수해 열댓명이 쪼개 맡아 긴급번역해 정책분석자료로 삼는 등 클린턴의 '책 전술'은 국내외적으로 보기좋게 적중했다.
정치는 '대세'를 따르는 것이지, 거역하는 게 아니다. 지금 대세는 '민(民)'이며, 지금 '민'은 파파라치 수준이다.
지금 한나라당을 당혹케 하고 있는 '대전 국감 향응' 파문만 해도, 문제의 술집주인이 "17년산 윈저 3병에 맥주 10여병만 마셨고 술값은 68만원이 나왔다"고 해명하자, 인터넷상에는 즉각 "안주는 공짜로 줬냐. 그리고 여성접대부 3명 팁은 안줬냐. 어디, 그렇게 인심 좋은 술집에 한번 놀러가 보자"며 허구성을 질타하는 글들이 빗발치고 있다.
이제는 몇몇 언론을 컨트롤한다고 여론이 조작되는 시대가 아니다. '민'이 여론을 만드는 시대다. '민'에 거역하지 말고 '민'을 무서워할 때만 정치도 생존가능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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