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앙 전쟁과 '성혜림 망명'
[정치부기자 23년의 기억들] <13> 조선-중앙 전쟁과 나
중앙은 95년 4월 조간으로 전환했다. 석간 신문으론 한계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문을 확장해야 했다. 기존 조간신문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결국 조선일보와 부딪혔다.
96년 7월이었다. 경기도 일산 지국에서 직원들끼리 싸움이 붙었다. 중앙일보 보급소 직원이 조선일보 보급소 직원을 사망케 하는 일이 발생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결국 공보처까지 나서 오인환장관이 신문 공동판매제도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지금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신문 공동판매제가 실은 그때부터 추진된 거다.
당시의 신문사간 확장 경쟁은 지금보다 훨씬 심했다. 지금은 규제 장치라도 있지만 그때는 그런 게 없었다. 무가지 살포, 경품 제공은 기본이었다. 정부도 말리기 어려웠다. 끼어들었다가 얻어맞을 까봐서였다. 하여간 대책이 없었다.
확장 경쟁은 결국 신문끼리의 전쟁으로 발전했다. 조선-중앙 전쟁이 그것이다. 그것은 앞서의 조선-동아 전쟁과는 성격이 달랐다. 명예전쟁이 아니었다. 때문에 더 치열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치열했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서로 간에 명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패의 의미도 별로 중요치 않다. 그저 기자들만 죽을 맛이었다.
나는 중간에서 참 난처했다. 중앙도 조선도 내겐 중요했다. 한쪽은 내게 월급을 주는 조직이었고 다른 한쪽은 나를 기자로 키워준 모교 같은 곳이었다.
특히 조선일보 간부들과의 개인적 의리도 걸렸다. 그들은 내가 조선일보를 떠나 중앙일보에 왔음에도 잘해주었다. 아니 있을 때보다 떠난 뒤에 더 잘해주었다. 그러기가 쉽지 않는 데도 말이다. 물론 모두가 그랬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조선의 문화였다. 난 중앙에 와서도 한동안 그걸 이상하게 여겼다. 심지어 “언제든 다시 오라”는 얘기를 서슴없이 해줬다. 물론 서로 농담으로 주고 받았지만 말이다. 그들은 이런 저런 모임까지 만들어 나를 끼어주었다. 떠났어도 소속감을 잃지 말라는 주문도 있었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조선과 중앙은 문화 자체가 다르다. 한 예로 정치부 문화를 들자.
조선의 정치부 기자는 철저히 프로임을 요구받는다. 정치 세력에 깊숙이 침투해 비밀스런 정보를 캐올 것을 주문받는다. 기자의 제일 임무는 정보 수집에 있다는 판단에서다. 때문에 침투 방법과 수단은 기자가 알아서 하는 거다. 그래서 특정 기자가 유력정치세력에 깊숙이 침투하면 그 기자는 거의 그 정치세력과 함께 움직인다. 출입처도 따라 다니다시피 한다. 그러다가 그 정치세력이 힘을 잃거나 거세되면 그 기자도 비슷한 운명에 처한다. 일본식 계파정치에 익숙한 일본식 정치부 기자 문화다. 단 글을 뛰어나게 잘 쓰는 기자는 아주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정치환경 변화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중앙은 다르다. 중앙 정치부의 문화는 특정 정치세력에 밀착하는 것을 경계한다. 조금 깊숙이 침투했다 싶으면 출입처를 바꿔 버리는 경우가 많다. 불편 부당을 강조한다. 일제시대 독립 신문 기자같은 유형을 요구한다. 그러다보니 깊숙한 정보에 약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나는 조선일보 정치부 문화 쪽에 가까운 기자였다. 그래서 모교처럼 느끼는 지도 모르겠다.
비단 정치부만이 아니다. 편집국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는 각자의 판단이 다를 것이다. 아무튼 그렇다. 양쪽 모두에 있어본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차이들이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는 모르겠다. 관중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일보 편집국은 월드컵 경기장 같고 중앙일보 편집국은 올림픽 경기장 같다.
얘기를 다시 조선-중앙 전쟁으로 옮기자. 나는 중간에서 참으로 난처했다. 양다리를 걸칠 수도, 한쪽을 선택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문제에서 빠지려 했다. 그러나 회사가 나를 놔둘 리 없었다. 전쟁을 치르는 판에 차장급 간부 기자가 팔짱을 끼고 있게 놔두는 조직은 없다. 조선에 있었으니 뭔가 알 것이고 뭔가 써야 할 거 아니냐는 압력이 가해졌다. 그럼에도 나는 모른 척 할 수 있을 때까지 모른 척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세종로 코리아나 호텔 커피숍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주차장에서 차를 빼려던 참이었다. 코리아나 호텔은 조선일보 계열이다.
그런데 주차장 관리인이 내 차 앞 유리창에 붙어있는 중앙일보 스티커를 보고는 유리창을 내리라며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유리를 내렸다.
그랬더니 주차 관리인이 나를 향해 “중앙일보 직원이 조선일보 직원을 칼로 찔러 죽였다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슈?”하며 묻는 거였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호텔 주차관리인이 손님한테 이래도 되는 건가. 내가 중앙일보 기자임을 알고 묻는 거였다. 순간 너무 화가 치밀었다. 정말이지 끼어들기 싫어 모른척하고 있는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니 평소 나한테 가해졌던 중앙의 압력까지 모든 게 떠올랐다. 나는 차에서 내려 주차관리인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주차관리나 잘해.”
기분이 더러웠다. 차를 몰고 회사로 돌아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걸 생각했다. 조직끼리의 전쟁이라는 게 이런 건가. 호텔 주차관리인까지 나서서 아무 명분도 없는 전쟁에 앞잡이가 되야 하는 걸까. 본분을 잊으면서 과연 그래야 하는 걸까. 회사에 들어오자 화사 간부가 날 불렀다.
“당신도 알겠지만 요즘 들어 조선과의 전쟁에서 좀 밀리고 있네. 회사가 전쟁을 치르는데 당신도 뭔가 역할을 해야 할 것 아닌가. 당신, YS정권과는 얘기가 통하지 않는가. YS와 조선일보는 지금 원수 관계잖아. 그러니 자네가 YS쪽에 얘기해서 조선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자료 같은 것을 취재해 가져오게. YS도 조선을 죽이지 못해 안달 아닌가? 거 뭐야 파일 같은 거 있잖나....”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YS쪽에서 그렇게 해줄지는 모르겠습니다. 시키시는 일이니 얘기는 해보겠지만 기대는 마십시요.”
그렇게 대답했지만 YS쪽에는 아무 말을 안했다. 며칠이 지났다. 그랬더니 다른 간부가 불렀다. 같은 얘기를 하는 거였다. 전번에 시킨 일 어떻게 추진되어 가고 있느냐는 얘기였다. 약간 신경질적이었다.
“얘기를 아직 안했는데요......”
“빨리 얘기하고 그 반응을 알려줘.”
“예.”
나는 다음날 YS쪽 한 인사에게 얘기를 전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반응은 의외였다.
“우리가 조선과 사이가 나쁜 건 세상이 다 알지. 그러니까 오히려 끼어들기가 곤란해. 더군다나 그런 문제를 자네 같은 일개 기자를 통해 얘기할 순 없어. 무슨 얘기인지는 알겠네만 곤란하다고 전하게.”
“알았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러나 전하지 않았다. 다시 회사 간부가 나를 찾아 재촉하면 그때 얘기할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회사 간부들이 그 문제만으로는 나를 다시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내 짐작으론 직거래를 시작했나 싶었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 뭔지는 모르지만 뭔가를 받았는데 신통한 게 하나도 없었다는 거였다.
중앙과 조선과의 전쟁은 계속됐다. 그러나 점점 중앙이 밀리는 분위기였다. 조선이 특종이 많아서였다. 그러니 중앙의 사기가 약간 저하되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었다. 회사 간부가 나를 불렀다. 이번에는 다른 주문을 했다. 조선일보 코를 납작하게 만들 만한 특종 기사를 물어오라는 거였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럴만한 특종거리가 있으면 썼어도 벌써 썼지 그걸 안찾고 있을 기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서 대충 대답하고 자리를 일어났다.
그러나 나 나름대로는 뭔가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쪽 편을 들지 못해 고민할 게 아니라 기자라면 기사를 발굴해 쓰면 될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조선과의 전쟁이 아니더라도 기자가 특종을 찾는 건 본연의 임무니 말이다.
이틀인가 사흘에 걸쳐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취재원들과 접촉을 가졌다. 뭔가 냄새를 맡고 취재하는 것과 달리 이것은 완전히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다.
“뭐 큰 거 좀 없나요?”
모두 그런 식이었다. 사회부 경찰기자들이 경찰서 형사계 문을 열며 외치는 말이 “뭐 없어요?”다. 나는 당시 거의 사회부 경찰 기자처럼 기사를 찾아다녔다.
결국 내 손에 큰 게 걸렸다.
당시 조선일보는 대형특종을 했었다. 북한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이가 러시아에서 서방국가로 망명했다는 기사였다. 월간조선 우종창 기자의 특종이었다. 조선은 그 특종을 CF로 만들어 연일 TV에 내보냈다. 타이틀은 ‘특종신문 조선일보’였다.
그런데 내가 만난 정부 고위 인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한때는 성혜림이가 망명한 줄 알고 있었거든....그런데 확인을 해보니 성혜림이는 망명을 안했데...러시아에 그대로 있데.....언니 성혜랑이만 망명을 한 거래....조선이 결과적으로 오보를 한 거야. 성혜림이가 망명을 안했다고 쓰면 큰 특종도 될뿐더러 조선일보 코를 납작하게 하는 걸 거야.”
그러나 그 얘기를 듣는 나는 좀 찜찜했다.
“성혜림 망명도 조선에 정부가 흘려준 거 아닙니까. 그렇게 대대적으로 보도를 하게 해놓고 공개적 검증을 하려했던 건 아닌가요? 북한 반응도 보고, 러시아에 확인도 해보고, 미국한테 물어도 보고 그러려고 그런 거 아닌가요? 그래놓고 이제 와서 아니니까 중앙에 흘려주는 겁니까? 좀 듣고 보니 그렇네요.”
“그런 건 아니야.....어쨌든 내 얘기가 팩트야.”
“어쨌든 감사합니다. 그런데 내가 ‘성혜림 망명 안했다’고 기사를 쓰면 그건 누가 사실이라고 뒷받침 해주나요. 성혜림이가 ‘나 여기 있소’하며 확인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확인이 안되면 내가 바보되는 건 아닌가요?”
나는 아무리 정부 고위 인사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냥 기사화할 순 없다고 봤다. 정반대의 정보를 전쟁 중인 양 신문에 흘려주고 있으니 그럴만 했다. 자칫하다간 누가 오보의 오명을 뒤집어 쓸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나는 내가 취재한 내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런 고급정보를 도대체 누가 안단 말인가.
결국 내가 찾아간 곳은 러시아 전문가였다. 러시아 특파원을 마치고 중앙일보 국제부에서 근무하던 김모 기자다. 내가 알기론 러시아 정보에 관한 한 그가 최고였다.
“야, 내가 취재한 내용인데...성혜림이가 망명을 안했데....”
“누가 그러던?”
“ooo이가 그러던데....니가 러시아쪽 정보통한테 확인을 해볼 수 없겠냐?”
“그럴 필요도 없어. 니가 취재한 내용이 맞아....나는 이미 그 기사를 써놓고 내달라고 하는중 이었는데 데스크가 기사에 대한 자신이 없어서인지 내주질 않고 있어.”
“그래? 맞아? 니 소스는 어디야? ”
“나야 러시아 소식통이지.”
“크렘린?”
“그런 셈이지....”
“그런데 왜 기사가 안나갔냐? 지금처럼 특종 찾아오라고 난리를 치는 판에...”
“확인이 안되니까 그런가 본데...그게 확인이 되는 얘기냐? 결국은 러시아가 확인해 주어야 하는데 러시아가 공식으로 그걸 확인해 줄 수 있겠냐?”
“내가 정부 고위인사한테 확인했잖아. 그럼 기사화하자. 내가 쓸 테니 니가 한번 봐서 고치든가 해.”
시점이 중요했다. 우리는 언제 그 기사를 쓸 건가를 논의했다. 마침 국회 정보위가 이틀 뒤에 소집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날을 D데이로 잡았다. 그날 정보위에 안기부장이 출석토록 되어 있었다. 당 일자 아침에 그 기사를 내면 의원들이 진위 여부를 물어볼 게 분명했다. 그러면 안기부장이 ‘중앙일보 보도가 맞다’고 할 거고, 그러면 다음날 자 다른 조간 신문들도 중앙일보를 베끼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 중앙일보의 조간 화 전환 후 최대의 특종이 되는 거였다.
나는 기사를 썼다. 그러나 소스를 밝히진 않았다. 그저 러시아 소식통으로 했다. 나에게 얘기를 해준 취재원의 요청이기도 했다. 드러날 경우 조선일보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게 걸렸던 것 같다. 그래서 기자 이름에도 내 이름을 넣지 않았다. 제일 먼저 취재한 국제부 김 모 기자의 특종이었으니 그의 이름으로 기사화했다.
정치부장에겐 "내 이름으로 기사를 쓸 경우 소스가 밝혀질지 모르고 그럴 경우 취재원이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이유를 둘러댔다.그러나 실은 조선일보에 미안해서 도저히 내이름으로 기사를 내보내기가 어려웠다.
모든 예상이 착착 들어맞았다. 기사는 대문짝만하게 중앙일보 1면을 장식했다. ‘성혜림 망명 안했다“였다.
그러나 국회 정보위가 열리는 오후까지 어느 언론도 사실 확인을 하지 못했다. 통신까지도 말이다. 거의 오보로 판명 나는 분위기로 기우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정보위가 열리고 의원들의 질문에 안기부장은 ”중앙일보 보도 내용이 맞다“고 답변했다.
대특종이었다. 이상하게 상복이 없던 나였지만 그 기사만큼은 최고의 특종상을 받았다. 물론 국제부 김기자와 공동수상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기사에는 내 이름이 없었다. 상만 받은 것이다.
며칠 뒤 조선일보는 ‘특종신문 조선일보’의 TV CF를 내려야 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 중앙-조선 전쟁은 끝났다. 시작과는 달리 끝은 싱거웠다. 우리의 특종 기사가 전쟁을 끝내는 데 영향을 미친 건 전혀 없다. 그저 양쪽이 끝내기로 해서 끝낸 거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가 무모한 전쟁이었다. 물론 거기에 딸린 많은 얘기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밝히겠다.
여기에서 <23년의 기억들>1부를 대강 마칠까 한다. 정말이지 많은 분들의 성원과 격려가 있었다. 감사드린다.
두가지 이유에서 내게 시간이 필요하다. 1부를 위해 준비한 목차는 25개였다. 그중 12개를 소화했다. 겹치는 것도 있었고 아직은 쓸 때가 아니라고 판단되는 것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잠시 생각을 정리해 새로운 목차를 만들고자 한다. 새로운 주제들을 설정해 2부에서 선보이겠다. 1부에 쓰지 못한 내용들은 언젠가 책에서 나올 것이다. 2부 연재분과 함께 말이다. 몇 군데 출판사에서 출판제의가 있었다. 아직 출판 시기는 정하지 못했다. 책에 나오는 내용들은 훨씬 리얼할 것이다. 전혀 새로운 내용들도 많이 담을 것을 약속드린다.
시간이 필요한 두 번째 이유는 작금의 정치 상황 때문이다. 5.31 지방선거후 정치판은 요동을 칠 것으로 예상된다. 많은 전문가들은 12월쯤에나 있을 상황이 7월로 앞당겨지고 있다고 말한다. 나도 비슷한 생각이다. 그래서 밀도 있는 정치 분석 기사를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정치상황을 분석하는 <이연홍의 정치보기>시리즈는 지금보다 더 활발히 쓸 생각이다.
다만 23년의 기억들 시리즈는 언제라도 써야겠다 싶을 땐 조용히 띄워 놓겠다. 그것은 1부의 연장일 뿐 2부의 시작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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