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주의 '영남후보론'과 2002년 盧風
[정치부기자 23년의 기억들] <12> 허주 김윤환과 나
허주야말로 진정한 프로였다.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자신만을 믿었다. 양김처럼 사람들을 몰고 다니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다룰 줄 알았다. 세력은 없지만 세력을 다뤘다.
물론 허주에 대해선 여러 평가가 있다. 극과 극의 평가다. 그를 욕하는 사람도 많다. 너무 세속적이란 이유에서다. 반대로 그를 극찬하는 사람도 많다. 그의 능력과 인간성을 평가해서다. 나 보고 한쪽을 택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후자다.
나는 평기자 시절 그와 깊은 인연을 맺진 못했다. 전두환 정권 당시 문공부 차관을 할 때 처음 알게 됐다. 당시 나는 총리실 출입기자였다. 심심하면 기자들은 그의 방을 찾았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갈 때마다 그는 잠을 자고 있었다. 일을 하는 건지 잠자러 오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저 노태우 친구라는 이유로 잘나가나 싶었다.
별로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우선 게을러 보였다. 그러나 그를 만날 때마다 인상이 바뀌어 갔다. 얘기를 하다보면 배우는 게 많았다. 정치를 보는 안목이었다. 어린 기자의 눈에는 참 신기하게 보였다.
그는 조선일보 기자를 했다. 그래서 그가 쓴 글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도 찾지 못했다. 온종일을 뒤졌는데 허사였다. 정치부 기자도 했고 워싱턴 특파원도 했는데 그의 글은 없었다. 그 정도로 기사를 쓰지 않은 기자였다.
기자를 하다가 국회의원 출마도 했고 낙선한 뒤 다시 기자로 돌아가기도 했다. 지금 같아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실패한 기자였다. 그럼에도 그가 그렇게 클 수 있었던 건 조선일보의 특별한 배려 때문 아닌가 싶다.
내가 그와 가까와 진 건 내가 조선일보 정치부에 있을 때였다. 노태우 정권 때다. 그가 YS를 대통령 만들겠다고 나설 때였다. 거의 매일 같이 그의 집을 찾아갔다. 그의 얘기가 듣고 싶었다.
밤만 되면 그의 서초동 집은 기자들로 붐볐다. 응접실 한복판에 술과 안주를 놔두고 오는 기자마다 마시게 했다. 술 한잔 마시며 12시가 넘도록 토론을 했다. 집 앞에는 음주단속을 하는 경찰이 있었다. 그러나 경찰들에게 허주 집에서 나오는 길이라고 하면 그냥 보내주었다. 물론 조금 더 가다가 걸리기 일쑤였다.
그는 한때 정말이지 잘나갔다. YS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으니 그럴 만 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YS의 견제도 많이 받았다. 늘 그는 그게 불만이었다. 더러는 나를 불러 “너 현철이랑 친하지? 조심하라고 해”라고 하기도 했다. 김현철씨와 허주는 관계가 좋지 않았다. 그러니 막판에는 YS와도 멀어졌다. 결국 YS뜻과는 달리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나서게 됐다. 그것이 그로서는 실수였다. 만들지도 못했고 얼마 뒤 이회창씨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
나와 절친해진 건 그때부터다. 나도 중앙일보에서 물먹고 있을 때였다. DJ정권 초창기 청와대 출입을 하다가 밀려났을 때다. 정치전문기자란 직함으로 ‘이연홍의 정치보기’란 고정 컬럼을 쓰고 있을 때였다. 겉보기엔 그럴 듯 했지만 실은 그렇지 못했다. 시간이 남아 돌았다. 그렇다고 회사에 우두커니 앉아 있기도 뭐했다. 그래서 자주 찾아 간 곳이 허주 사무실이었다. 그의 사무실은 시청앞 백남빌딩에 있었다. 프레지던트 호텔이 있는 곳이다.
당시 허주는 한나라당 공천 헌금 사건으로 재판이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그러니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을 때였다. 어쩌다 박희태 의원 정도가 마주쳤다.
나는 그와 어떨 땐 서너 시간씩 이야기를 나눴다. 허리가 아프다며 누워서 얘기했던 허주였다. 콩팥이 나빠서 허리가 아픈 걸 디스크로 착각했던 거다.
그는 나와 얘기하면 4분의 3은 이회창씨에 대한 얘기를 했다. 이회창씨가 자기한테 이럴 순 없다는 얘기였다. YS로부터 갖은 협박을 다 당하면서 이회창씨를 대통령 후보로 만들었는데 자기를 버릴 수 있느냐는 얘기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다음번 대통령선거에서 낙선시키고 말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민국당을 만들어 총선에 참여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그 분노가 정말이지 대단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것이 병을 불렀던 거 같다.
그는 내게 많은 얘기를 해주었다. 친구인 노태우를 대통령 만든 얘기, YS를 대통령 만든 얘기, 그리고 이회창을 후보로 만든 얘기 등등등. 그 뿐만이 아니다. 재벌들과의 관계까지도 말해주었다. 하나도 빠짐 없이 다 얘기해주었다. 그러나 그가 고인이 된 마당에 그 얘기를 여기에 옮기진 않겠다.
그는 나한테 자기가 해준 얘기를 자기의 회고록 형태로 써 달라 했다. 녹음기를 가져오라고 몇 번이고 재촉했다. 책으로 내면 베스트 셀러가 될 거라 했다. 그러나 내가 거절했다. 기자가 남의 회고록을 써줄 순 없다는 이유를 댔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급히 그가 나를 찾았다. 시간여유를 많이 가져오라 했다. 점심을 먹고 바로 그의 사무실로 갔다. 그가 먼저 물었다.
“니는 여당에서 누가 다음 대통령후보가 될 거 같노?”
“현재로선 이인제 아닌가요? 권노갑의 후원도 받고 있고 이렇다 할 다른 후보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니도 더 배워야겠다.....이인제가 나가면 이회창을 누를 수 있으리라고 보노?”
“글쎄요. DJ의 후원이 있으면 한번 해 볼 수도 있겠지요.”
“니 이인제가 경복고 선배라 그러는 기가?”
“그런 건 아닙니다. 저와는 선후배 사이지만 그리 친하지 않습니다. 제 스타일과는 잘 맞지도 않고요.”
“내 말 잘 들어라.누구에게도 말하면 안된다이”
그러면서 그는 차근차근 말했다. 우선 DJ가 대통령이 된 배경부터 얘기했다. YS가 이회창이 되는 걸 싫어했기에 가능했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이인제가 끝까지 후보로 남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권력의 힘이라 했다. 야당이 자력으로 정권교체를 이루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다음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DJ가 원하는 대로 정권은 창출될 거라는 논리였다. 문제는 누구를 내세우냐는 것으로 집약됐다. 그때 그가 한 얘기가 '영남후보론'이다.
“호남이 미는 영남후보인기라. DJ의 호남표에 절반의 영남표만 얹히면 무조건 당선인기라.”
나는 깜짝 놀랐다. 그때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발한 상상이었다.
“DJ가 어떻게 얻은 정권인데 그걸 영남한테 주겠습니까?”
“그 다음에 찾아오면 되지. 호남이 밀어준 영남후보인데 대통령이 된들 무슨 세력이 있겠노? 당을 나와 호남인맥이 장악하고 있다가 그 다음에 영남대통령이 밀어주는 호남후보로 나서면 되는 거지.....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된다 아이가. 어떻게 세상이 변할 줄 누가 아노?”
“DJ가 밀어줄만한 영남후보가 누가 있습니까?”
“몽준(정몽준)이도 있고.....”
“정몽준씨는 안되지요. DJ가 평생을 서민을 위해 살아왔다고 하면서 재벌을 밀어줄 수는 없잖습니까?”
“박근혜는 어떻노? 3김 연합 공천도 가능하지 않을까? 김영삼이나 김종필이도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노.”
“박근혜씨는 본인이 거부할 겁니다. 그런 식으로 정치 하는 걸 체질적으로 싫어할 사람입니다.”
“노무현이도 있지.....”
“에이, 무슨 말씀을.....인지도가 너무 떨어지잖습니까. 사람들이 웃습니다.”
“그래서 니가 정치 공부를 더 해야 된다는 기다. 어쨌든 영남후보여야 한다.”
나는 그의 사무실을 나와 건물 1층 로비 커피숍에 갔다. 들은 얘기를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지나면 잊어 버릴까봐서였다. 내 습관이다. 지금 그때 얘기를 쓰는 것도 메모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때 기억해둔 내용들이다.
나는 그 다음 주 컬럼에 ‘영남후보론’을 썼다. 여권이 구상중인 다음 후보는 '호남이 미는 영남후보'라고 소개했다. 사실상 특종인 셈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당시로선 좀 웃기는 얘기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영남후보론은 힘을 받기 시작했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허주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랬는데 박지원씨를 먼 발치서 봤다. 당시 박지원씨는 청와대 공보수석에서 밀려나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허주에게 물었다.
“박지원씨가 오늘 여기 다녀갔나요?”
“응.....박지원이 내 사무실 옆방에 지 사무실 냈다.”
“옆방에요?”
“지 아는 사람 사무실이라나 뭐라나....당분간 지가 쓰기로 했다고 인사왔더구먼.”
“두 분이서 합작으로 영남후보를 만드시려나 보군요...”
“어디서 그런 소리하면 안된다이....될 일도 안돼...박지원이도 나한테 신신당부하더라.”
내 예상이 맞았다. 나중에 허주한테 들은 얘기지만 영남후보론은 두 사람에 의해 추진됐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허주는 소외됐다. 영남후보라는 컨셉만 심어놓고 밀려났다. 후보를 누구로 하느냐는 문제는 DJ진영 내부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박지원씨는 보안을 문제 삼았다 한다. 허주가 나와 친한 것까지도 문제제기를 했다는 것이다.자꾸 기사화된다는 얘기였다. 허주가 나한테 직접 해준 얘기다. 그래서 나중에는 허주도 누가 후보로 되는지는 감만 있었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노무현이 되는 거 아니겠노? 나는 그렇게 본데이. 영남후보는 확실한데 박근혜는 본인한테 말도 꺼내기 어렵고...몽준이는 여러 가지로 DJ와는 상충하고.....노무현이밖에 더 있겠노.....영남후보는 누가 나와도 이기는 논리니까 인지도야 지금 좀 떨어진 들 어떻겠노....”
“DJ가 시키려해도 당내 경선이 있잖습니까. 이인제가 지금까지 얼마나 대의원들한테 공을 들였는데요. 권노갑씨는 아직도 이인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는데요.....”
“권노갑이야 이인제 안심시킬려고 괜히 그러는 걸 테고.....경선? 야 그거 하나 움직이지 못하면 그게 권력이가? 대의원들 그게 누구 꺼고? DJ 꺼지.......”
모든 건 허주의 예상대로 착착 진행됐다. 결국 대통령까지 노무현이 먹게 됐다. 다시 한번 최고의 킹메이커임을 확인시켜 준 허주였다.
다시 한번 그에게 놀랐다. 선거가 끝나고 얼마 뒤였던 거 같다. 하루는 허주가 자기 집에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했다.
나는 서초동 그 집인줄 알았다. 청구빌라다. 그런데 이사를 했다며 집들이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어디로 갔냐고 물으니 방배동이라고 했다.
풍수지리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허주였다.그래서 정치하는 사람은 절대로 평창동쪽으로 가서는 안된다는 그였다. 최형우도 평창동으로 이사한 뒤 쓰러졌고 현철이도 평창동으로 이사한 뒤 구속됐다던 그였다. 심지어 이회창씨도 그쪽으로 이사한 뒤 낙선했다며 정치인은 평창동쪽으로 가면 안된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방배동도 비슷했다. 김우중씨도 방배동으로 이사한 뒤 망했다. 정치권에 돌아다니는 몇몇 선례들이 있었다. 풍수하는 사람들은 지세가 세서 그렇다고들 했다. 그런 곳엔 검사 의사 판사등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기 센 직업의 사람들이 가야한다고 말한다. 정치인이나 장사하는 사람들과는 안맞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걸 그렇게 따지는 허주가 그리로 이사갔다는 게 이상했다.
그래서 집에 들어서자마자 물었다.
“왜 이곳으로 이사하셨나요?”
“어쩔 수 없어서 왔다. 사위가 이 집을 샀는데 너무 크다고 해서 내 집이랑 바꿨다.”
그러나 얼마 뒤부터 허주는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을 찾아가도 언제나 부재중이었다. 몸이 불편하시다는 비서의 대답이었다.
나도 처음엔 그냥 몸이 좀 불편한 정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 게 아니었다. 암이었다. 허리가 아프다며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까지 했던 그다. 그러나 허리엔 이상없다고 퇴원시켰다. 그런데 실은 종양이 있었던 거다. 허주는 미국까지 가서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허사였다. 일산 암병원에도 한동안 입원했었다. 그러나 치료에 실패했다. 모든 시도가 허사가 된 뒤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있을 때 내가 그를 찾아갔다. 정말이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그를 문안하고 나온 나는 그를 문병했던 상황을 글로 남겼다. 중앙일보에 ‘노트북을 열며’라는 컬럼을 통해서였다. 이렇게 썼다.
그 잘 생긴 얼굴은 어디로 갔는가. 그 훤칠한 키는 어디에 감췄는가. 그 당당하던 기세는 어디로 숨었는가.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두꺼운 이불 밑에 잠겨 있었다. 말라버린 얼굴은 해골이었다. 눈은 천장만을 응시했다. 얼음장 같은 손 위엔 거미줄 같은 핏줄이 솟아 있었다. 간간이 고통을 호소하는 "아" 하는 소리만이 그의 영혼이 남아 있음을 알리는 듯했다.
별세하기 얼마 전, 허주(虛舟) 김윤환의 모습이다. 두 명의 대통령과 한 명의 대통령 후보를 만든 그다. 노태우.김영삼.이회창씨가 그의 손을 거쳐 갔다. 한 시대를 호령하고 풍미했던 허주였다. 한국 정치의 또다른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모습에서 어떤 한 순간의 역사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그 모든 영욕을 품고 떠나려는 듯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사람의 손에 거세당했다. 바로 이회창씨다. 그는 허주를 공천에서 탈락시켰다. 4년 전이다. 나름의 정치적 당위성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허주는 배신의 아픔에만 빨려들었다. 아마도 그 미움이 스스로의 생을 재촉했는지 모른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에게 물었다.
"이회창씨가 사과를 하던가요?"
감은 듯 뜨고 있던 그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드러났다. 그의 대답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의 비서에게 물었다. 얼마 전 이회창씨가 찾았을 때의 상황을 들었다. 이회창씨는 허주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한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허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천장만 바라보며 듣기만 했다고 한다. 그날 따라 허주는 아침부터 이상했다. 기력이 돌아왔다. 면도도 하고 세수도 했다. 그리고 이회창씨를 맞았다. 그러나 허주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의미였을까. 그토록 기다리던 사과였는데 말이다. 떠난 허주만이 그 의미를 알리라. 허주의 방을 나선 이회창씨 부부는 차 한잔을 마셨다. 허주 부인 이절자씨가 차를 내왔다. 그 자리에서 한인옥씨가 말했다. 이절자씨를 향해서다.
"용서해 주세요."
그러나 이절자씨는 아무 말을 못했다. 용서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허주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회창씨와 허주의 관계는 그렇게 끝났다. 사과는 있었지만 용서는 없었다. 공교롭게도 이회창씨의 검찰 출두 10분 뒤에 허주는 숨을 거뒀다. 두 사람은 살아서는 다시 만날 수 없게 됐다. 용서의 기회마저 영원히 사라졌다.
두 사람의 관계는 오늘의 우리를 생각케 한다. 무엇이 우리를 살리는가를. 무엇이 우리를 죽이는 것인가를. 함께 살고 함께 죽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이다. 한 사람의 증오가 상대를 이길 수는 있다. 그러나 스스로를 이기지는 못했다. 증오는 본인의 아픔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증오를 키우면 그만큼 스스로는 허물어져 갔다. 허주가 지었던 미소의 의미도 그것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증오를 심었다면 거둬야 한다. 아픔을 주었다면 풀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스스로를 살리는 길이다. 동시에 상대도 살린다. 이회창씨가 일찍이 허주에게 사과를 했다고 치자. 용서를 빌었다 가정하자. 그랬어도 허주는 세상과 등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을 것이다. 그보다는 그를 보내는 이회창씨 마음이 더 가벼웠을 것이다. 그를 지켜보는 우리 모두의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감정은 두 사람 모두에게 불행이었다. 그것이 우리를 안타깝게 만든다. (이하생략)
나는 그가 사망한 뒤 조문을 갔다. 허주의 영정앞엔 십자가가 있었다. 사망하기 며칠 전까지도 신부님이 그를 찾아갔지만 믿기를 거부했던 그였다. 일산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침대옆에 놔둔 성경책을 보곤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소스라치게 놀라며 “저거 치워라”고 소리치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사망 몇시간 전 소식을 듣고 달려온 후농 김상현씨와 신부님앞에서 아무 말없이 주루룩 눈물을 흘리며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아마도 모두를 용서하고 모두로부터 용서받고 싶은 심정이었던 거 같다.
그러나 내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씁쓸했다. 여기 누워있는 그가 바로 허주 김윤환 아닌가. 당대 최고의 킹메이커 말이다. 옛 말이 생각났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사람이 넘쳐도 정승이 죽으면 사람이 없다’ 그의 마지막은 그런 모습이었다. 정말이지 세상은 잔인하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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