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이회창 전략문건' 파동의 앞뒤
[정치부기자 23년의 기억들] <10> 이회창 전략 문건과 나
“이연홍씨, 미안한데 간단하게 적어서 좀 보내줄 게 있어.”
“...막 나가려던 참인데요...”
“이 사람아, 지금 시간이 몇 시야? 5시밖에 안됐는데 어디를 가려고 해?”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말씀하세요.”
“어.....당신이 이회창한테 하고 싶은 얘기 없나? 그 사람 문제가 뭐야?”
“무슨 말씀이세요? 문제야 많죠. 한 두 가지입니까? 그런데 왜요? 지금 그 기사를 쓰라고요? ”
“아니야. 기사가 아니고....당신이 느끼는 문제점들 좀 적어서 보내줘. 문제점이 있으면 고쳐야 할 점도 있을 것 아닌가. 그것도 아울러 적어줘. 기사가 아니야. 그냥 메모 형식이면 돼.”
“알았습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자세히는 못 적습니다.”
좀 찜찜했다. 속으론 이렇게 생각했다. 회사 누군가가 이회창씨와 만나기로 되어 있나 보다. 다만 정치판 사정을 모르니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싶어서 메모를 지시했던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그렇지 꼭 이 시간에 적어 보내랄 건 뭔가.....그러나 회사 누구인지는 몰랐다. 지금도 모른다. 다만 당시 상황에서 나로서는 그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 어느 신문사나 그런 일은 종종 있다. 말로 하느냐 메모로 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나는 좀 귀찮았다. 약간 심통도 났다. 부장 스스로가 뻔히 알 텐데 왜 시키나하는 생각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후배 기자가 보였다. 그를 불렀다.
나는 부장한테 들은 얘기를 그대로 했다. “그러니 니가 메모를 하면 내가 데스크를 봐서 보내겠다”고 했다. 그리곤 잠시 쇼파에 누웠다. 한 30분이 지났을까. 후배 기자가 나를 깨웠다.
“이 선배 시키는 대로 대강 적어봤습니다. 그런데 분량이 좀 모자라네요.”
“그래? 내가 좀 가필을 할께.”
그리곤 후배가 적어놓은 내용을 훑어 봤다. 그런대로 주문에 충족한듯 했다. 조목조목 잘 정리했다. 그래도 양이 좀 모자라는 거 같아 몇 자 더 적었다. 한 2,3백자 정도 가필했다. 그리곤 컴퓨터를 통해 회사로 보내려는 순간이었다. ENTER키만 누르면 들어가는 찰나였다.
그런데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회사 내의 누군가가 볼 지 모른다는 감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이 볼 땐 이상하다 여길 게 분명했다. 컴퓨터를 통해 보내는 기사는 다른 부의 기자들도 열람이 가능했다. 보안 등급을 높여도 나보다 보안등급이 높은 기자는 내 기사를 볼 수 있었다. ENTER키를 누르려다 멈췄다. 그리곤 보내는 메모에 박힌 내 이름을 지웠다. 이름은 자동 입력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보내는 사람이 지울 수 있었다. 메모는 보내되 누가 보더라도 누가 보냈는지 모르게 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메모를 보냈다.
바로 이 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차장 수고했어.”
“불성실하게 적어 보내서 죄송합니다. 시간이 없어서요......”
그리곤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한참을 지냈다.
얼마 뒤였다. 나는 갑자기 신한국당 출입에서 국민회의 출입으로 바뀌었다. 선거를 앞두고 기자들이 한쪽으로 치우칠까봐 출입처를 바꾼 거였다. 나는 졸지에 DJ 담당이 됐다. 국민회의 출입을 시작한지 며칠이나 됐을까....그날도 여느 때처럼 대변인 발표가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발표 내용을 듣고 있었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정치부장에게 보내준 바로 그 메모를 낭독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름도 거창했다. '이회창 전략문건'이라 했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툭하면 회자되는 그 전략문건 말이다. 그것을 중앙일보가 만들어 이회창에게 주었다는 주장이었다.
나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저 부장이 시킨 대로 했을 뿐인데....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그 문건이 이회창 주려고 만든 건가? 내가 들은 얘기는 그게 아니었는데....설사 그렇다 해도 그게 어떻게 국민회의 손에 들어갔단 말인가.
그런데 전략문건은 도대체 뭔가? 그걸 전략문건이라 이름 붙여도 되는 건가? 전략은 무슨 전략? 그저 상황을 정리한 메모인데.....지나간 순간순간들이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나 성급하게 대처할 문제는 아니었다. 우선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이수근 부장과 통화를 했다. 이 부장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현장에 있던 나보다 빨랐다.
역시 이 부장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가 중앙일보를 떠날 때가 나한텐 제일 멋있게 보였다. 사실 이부장과 함께 일했던 기자들은 이 부장을 최고의 부장으로 꼽는다. 의리의 사나이요 소신의 기자다.
나는 우선 내가 보낸 문건의 성격부터 확인했다.
그때 이 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차장, 모든 건 내 책임이야. 내가 필요해서 이차장에게 그걸 작성해서 보내라 했고 내가 사용했어.. 물론 내가 가필도 했지.. 회사 내의 누구와도 상관없는 일이야. 이차장한테 그런 일을 시킨 내가 잘못이지. 미안하오. 그러니 누가 물어보거든 모든 걸 나한테 떠넘겨......내가 이회창을 만났다고 말해도 상관없어. 정치부장 할 만큼 했지 뭐....그만 두면 되지......하하하. 그러나 회사를 위해서 한 가지는 알아내야겠어.. 그 문건을 프린팅해서 국민회의에 가져다 준 내부 사람을 찾아야겠어.”
나는 이부장에게 거의 아무 말도 못했다. 처음엔 항의도 해보려 했다. 왜 그런 일을 시켰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신문사엔 그런 사람이 드물다. 어느 조직이든 마찬가지지만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이 많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부장은 달랐다. 자기 책임이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이 부장 그만두면 나도 그만둔다 생각했다. 문제가 커지면 내가 사표를 내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전화를 끊고는 A4용지에 사표를 썼다. 그리곤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언제든 꺼낸다는 생각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사실 선거철만 되면 회사 정보가 정치권에 새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어느 언론사나 마찬가지다. 크고 작고를 불문하고다. 기자들 스스로가 지지하는 후보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회사내 주류세력이 그러는 건 죄가 아니지만 비주류가 그러는 건 역적 취급을 당한다. 불공평하다. 그러나 그게 현실이다.
다만 그 경우는 달랐다. 사건화 됐기 때문이다. 국민회의가 공식으로 문제를 삼아서다. 어떤 형태로든 매듭을 지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범인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마지막 임무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야 대처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나는 범인 색출작업에 들어갔다.
일단 회사로 들어왔다. 저녁 마감 시간이 끝나고 정치부 기자 거의 전원이 모였다. 그렇게 큰일이 있었으니 회사에 들어오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마침 이수근 정치 부장은 식사를 하러 출타 중이었다.
주변에는 다른 부 기자들도 모여들었다. 그날 국민회의 발표에 관심을 표하는 다른 부 기자들이었다. 편집국 소속이 아닌 사람들도 꽤나 모여 있었다. 많은 게 궁금했을 것이다. 국민회의 반장인 내게 물어보는 건 당연했다. 이것저것 물어봤다. 나는 자리에 앉아 아무 소리 안했다. 그저 그 속에 분명 국민회의에 메모를 넘겨준 범인(?)이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건 범죄 심리학의 ABC다. 현장을 찾아 가는 기분 말이다.
나는 전화를 들었다. 전화기 속에서는 ‘윙’소리만 들렸다. 그러나 나는 마치 이수근 정치부장과 전화하는 시늉을 했다.
“네, 네 이 부장, 아니 그건 아니구요. 그런데 이 부장...”
계속 ‘이 부장’을 외쳐댔다. 분명 범인은 그 소리 때문에 내 전화에 귀를 기울 일거라 생각했다. 한참 동안 통화를 하는 척했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 걸로 하라구요? 모든 걸 말입니까? ”
딱 그 정도만 말했다. 사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아무것도 아닌 얘기다. 무슨 얘기인줄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범인이 그 얘기를 듣는다면 다를 거라 생각했다. 분명 전략문건 얘기겠거니 생각할 거라 여긴 거다.
역정보를 흘려보내려 한 것이다. 분명 국민회의등을 통해 그에 따른 반응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주위에 모인 사람 중 하나가 범인이다 계산한 거다. 먹통 전화에 대고 그런 말을 하면서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누가 나를 보고 있는지를 말이다. 몇 명의 시선이 내 눈에 잡혔다. 어차피 범인도 그 문건의 작성자와 그 문건을 보낸 사람을 몰랐다. 내 이름을 지워서 보냈기 때문이다.
나는 전화에 대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알았습니다.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전화를 끊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다.
“왜 여기들 모여 있는 거야? 뭐가 궁금한데?”
그러자 누군가가 물었다.
“그 문건 누가 만든 겁니까?”
“응, 내가 만들었어.”
“.........”
내 예상은 적중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국민회의 기자실로 출근했다. 그랬는데 이미 국민회의는 전략문건의 작성자로 엉뚱한 기자를 지목하고 있었다. 어제 나의 전화 내용을 누군가가 듣고 벌써 얘기해준 거였다. 국민회의 부대변인 한사람이 내게 왔다.
“이 차장님, 그 문건 누가 만든 겁니까?”
“내가 만든 거야. 그러나 너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전략 문건 같은 게 아니야.”
“에이, 다 알고 있습니다. 이차장님이 안 만들었다는 거 다 알고 있어요. XXX가 만들었지요? 그런데 이차장님 보고 뒤집어쓰라고 했다면서요?”
“누가 그렇게 얘기하던? 아니야.”
나는 전날 저녁을 떠올렸다. 내 주변에 있던 얼굴 하나하나를 기억해 냈다. 몇 사람이 떠올랐다. 국민회의는 연일 성명을 발표하며 공격을 해댔다. 급기야 검찰에 고발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저녁에 회사에 들어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심신이 피곤했다. 하루종일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내 앞의 전화기로 누군가 전화를 걸어왔다.
“이 선배?”
“응, 누구냐?”
“제 목소리 모르실 겁니다. 그냥 듣기만 하십시요. 지금의 사태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선배의 마음고생을 알고도 남습니다. 저는 그 문건을 프린팅해서 국민회의에 넘겨준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이선배가 너무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 말씀을 드리려구요. 그 문건을 넘겨준 사람은 OOO입니다.”
“뭐?”
나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OOO은 내가 거짓 전화를 할 때 바로 내옆에 있던 그 사람이었다. 전화 속 후배는 계속 말했다.
“OOO 혼자만 아닙니다. 저도 상당 부분 가담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 선배를 힘들게 하려고 그랬던 건 아닙니다. 이선배가 조금이라도 개입되어 있는 줄 알았다면 안 그랬을 겁니다. 저희는 그 문건이 XXX 가 만든 걸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랬던 겁니다. 이 선배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요. 저는 지금 회사 로비 2층의 공중전화입니다. 내려오실 수 있으면 내려와 주십시요. 경위를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나는 순간 그를 만나볼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참았다. 그리고 차분하게 이렇게 말했다.
“우선 이 얘기부터 하지. XXX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 문건은 내 책임 하에 만들어져서 내가 부장한테 보냈어. 그러니 모든 게 내 책임이야. 부장은 자기 책임이라고 하더구먼. 그러나 그렇지 않아. 나는 자네가 누군지 모르네. 목소리 들으니 알만도 하네만 난 자네가 누군지 알고 싶지도 않아. 알려하지도 않을 거야. 자네가 내게 그렇게 얘기해주니 고맙네. OOO과 자네가 그 문건을 국민회의에 주었다는 것이 잘 한 일은 분명 아니야. 조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그런 식으로 조직을 어렵게 해선 안 되지. 문제를 삼으려면 안에서 삼아야지.
안에서 문제 삼아봐야 자네들만 희생당하고 말 거라 생각해서 그렇게 했다고 여기네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에서 문제를 삼아야 했어. 그러나 난 자네들의 기자정신을 높이 사네. 그 고발정신을 존중하네. 자네들이야말로 나보다 훨씬 나은 기자일세. 그걸 만들어 보낸 나와 그걸 고발한 자네들과 둘 중의 누가 진정한 기자일까. 자네들이야. 자네들 같은 기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나는 자네들이 국민회의 끄나풀이라고 생각진 않네. 자네한테 들은 얘기 모두를 묻을 생각이야. 자네 같은 기자야말로 마지막까지 조직 속에 살아남아야 할 기자라는 생각도 들어. 자네 앞에 내가 부끄럽네. 다만 다시 그런 일이 있다면 그때는 어렵더라도 안에서 문제를 삼기 바래. 그래야 더 훌륭한 기자로 클 수 있을 거야. 나한테 한 얘기는 자네도 묻어두길 바래.”
그건 나의 진정이었다. 그가 내게 한 몇 마디 말속에서 그의 진정성을 읽을 수 있었기에 나도 그렇게 말했다.
전화를 끊었다. 순간 그가 전화를 걸고 있다는 로비 층의 공중전화로 뛰어가 볼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끝까지 꾹 참았다.
얼마 뒤 검찰의 조사가 시작됐다. 조평 사태이후 두 번째 출두였다. 서울지검 공안부였다. 그때 그 곳이었다. 난 있는 그대로를 얘기했다. 검찰이 궁금해 했던 건 문건의 성격이었다. 나는 초지일관 일상적 정보보고라고 했다. 아마 이수근 부장도 갔을 거다. 이부장도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말했던 거 같다. 그 문제는 그냥 그럭저럭 그렇게 넘어갔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회사의 관심은 문제의 문건을 국민회의에 넘긴 사람을 찾는 거였다. 회사차원의 색출작업이 벌어졌다. 나는 누구인지 알고 있었으나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얼마 뒤 회사가 범인이 누군지 안다는 소문이 들렸다. 나로서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전화를 걸었던 그 후배가 걸렸나 생각했다. 나로선 내가 덮기로 한 이상 그 후배가 안 걸렸으면 했다. 그래서 이 부장한테 물어봤다. 누구냐고. 이부장도 혼자만 알라며 은밀히 내게 얘기해주었다. 그런데 엉뚱한 사람이었다. 물론 회사로서도 공식으로 문제 삼지는 않았다. 너그럽게 대처했다. 다만 그는 보직에서 밀려났다. 그러다가 어느 날 회사를 떠났다. 본인 발로 나갔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아닌데도 말이다. 그래서 언젠간 내손으로 그걸 해명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글로 남긴다. 항상 그의 행운을 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아니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 내가 내입으로 실제론 누구라고 말할 순 없었다.
정작 그 문건을 국민회의에 넘겨준 인물은 지금까지도 본인과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도 언론인이다. 언제나 그를 주목하고 있다. 언젠간 큰일을 하리라 믿으면서 말이다.
<저작권자ⓒ뷰스앤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