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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진실' 쓰고 중정 끌려간 기자 이영석

[정치부 기자 23년의 기억들] <7> 나의 스승 이영석 선배

안 써야 할 걸 쓰는 걸까. 내 글을 향한 나의 끊임없는 물음이다. 그때는 왜 안 썼을까. 그 때는 왜 못 썼을까.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써야 할까. 아니면 말아야 할까. 어느 것이 기자일까.

혼자만 알고 가야 하나. 모두가 알고 가야 할까. 어느 것이 모두를 위함일까. 그렇다면 어디까지 써야 하나.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기자일까. 나는 매일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며 글을 쓴다.

나의 스승 이영석 선배

나에겐 정말 소중한 선배 한 분이 계시다. 내가 먼저 글에서 언급했던 분이다. 이영석 선배다. 올해 70이 넘으셨다.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를 거다. 두어 세대 전의 기자다. 유명한 정치부 기자였다. 최고의 야당 기자였다. 그러나 불운의 기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영원한 기자다.

그는 중앙일보 출신이다. 나처럼 한 번 중앙일보를 떠났다가 다시 왔다. 중앙일보에 다시 온 건 1983년이었다. 내가 수습20기로 입사한 바로 그 해였다.

나는 입사하자마자 그분과 일했다. 내가 원한 건 아니었다. 입사 동기 대부분은 사회부로 갔다. 나도 원했다. 그러나 유독 나만 이상한 곳으로 발령이 났다. 기획 특집팀 이었다. 말이 팀이지 딱 한명 있었다. 이영석 국장이다. 그 밑에 내가 간 거다. 수습 딱지를 단 채 말이다.

당시 중앙일보는 구 동양방송 사옥에 있었다. 편집국은 2층이었다. 그런데 기획특집팀은 편집국옆 다른 방에 있었다. 방은 넓었지만 창고를 겸해서 썼다.

나는 왜 그곳에 발령 났는지 알 수 없었다. 설명도 없었다. 좀 화도 났다. 동기들은 경찰서 출입을 한다며 바삐 움직이는 데 나는 하루 종일 그 방에 쳐박혀 있어야 했다. 종일 담배만 펴댔다. 회사를 나가라는 것인가? 그렇다고 이 국장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3일인가 4일인가 한마디 말도 없이 지냈다. 5일째 될 무렵이었다. 이 국장이 저녁이나 하자고 했다. 서소문 인근의 한 조그만 고기 집이었다. 소주를 댓 병정도 마셨을 때였다. 이 국장은 안주를 거의 들지 않았다. 고기는 두어 점 집다가 말았다. 원래 그렇게 술을 드신다.

“자네, 왜 내 밑으로 발령이 났나?”
“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곳이 무슨 일을 하는 덴지도 모릅니다.”
“얘기를 못 들었나?”
“예.”
“......제 3공화국 시리즈를 할 거야. 그것을 준비하는 걸세. 요즘 더러 잡지에서는 3공화국 비화를 쓰기도 하지. 그러나 신문은 아직 전두환 정권의 눈치를 보며 못쓰고 있네. 우리가 그걸 할 걸세.”
“저는 수습기자이고 아무 것도 모르는데 무슨 취재를 하겠습니까?”
“누가 자네보고 하랬나? 내가 할 걸세. 자네는 그저 내가 만나보라는 사람들 만나서 얘기나 듣고 메모나 해오게. 나도 왜 편집국장이 자네를 내 밑에 보냈는지 알 수가 없네. 나는 심부름 하는 사람 하나 필요하다 한 것 뿐인데.......”

나와 그는 그렇게 만났다. 그러나 운명과도 같았다.

이 국장은 기자로선 최고였다. 내가 쓰는 단문은 그의 것이다. 나는 그저 흉내만 낼 뿐이다. 그의 글은 정말이지 간결하다. 메시지도 강하다. 직선적이다. 그러면서 쉽다.

나는 글쓰기를 배웠다. 그러나 가장 많이 배운 건 ‘좌절’이었다. 그 ‘좌절’을 이겨내는 방법말이다. 프로의 근성을 배웠다.

그는 불운했다. 정말이지 운이 없었다. 중앙일보 정치부장을 했다. 그러나 딱 한달이었다. 최단기 기록일 거다. 일종의 필화 사건이었다.

그는 정치부장이 되자마자 ‘죽산 조봉암’을 썼다가 정보부에 끌려갔다. 이승만 정권이 간첩죄를 씌워 사형시킨 그 조봉암 말이다. 당시로선 조봉암을 쓴다는 건 정보부에 끌려가는 걸 각오해야 가능했다. 그는 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했다. 그러나 세상은 몰랐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게 김형욱의 정보부였다. 그게 당시의 언론이었다. 이 국장은 동양방송 외신부장을 잠시 한 뒤 결국 회사를 떠나고 말았다.

이영석 중앙일보 대기자는 정치부장이 되자마자 이승만 정권의 조봉암 간첩조작의 진실을 밝히는 글을 쓰고 중정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뒤 한달만에 정치부장직을 그만 둬야 했다. 사진은 1958년 재판을 받고 있는 죽산 조봉암(왼쪽). ⓒ연합뉴스


내가 그얘기를 듣고부터 20년뒤, 그러니까 지금부터 3년전 중앙일보에 ‘이연홍의 정치보기’라는 컬럼을 쓰면서 느닷없이 죽산 조봉암 선생의 얘기를 일부러 썼던 것도 실은 그 때문이었다.

내 스승이 그걸 쓰고 정보부에 끌려갔고 그로 인해 회사까지 그만두었으니 제자인 내가 언젠가는 다시 중앙일보에 죽산 조봉암을 쓰는 것으로 스승의 명예를 회복해 드리리라 다짐했었다.

“그는 억울한 죽음 앞에서 원수를 저주하지 않았다. 보복을 주문하지도 않았다. 원망도 없었다. 오히려 산 자들을 위로했다. 복수가 복수를 부른다는 이치를 알았기 때문이리라.”

내가 썼던 조봉암 글의 한 토막이다. ‘보복의 사슬을 끊자’는 제목이었다.

조봉암을 썼지만 이 국장을 생각하며 썼다. 이국장이야말로 그토록 당했지만 그렇게 살았다. 권력에 대한 한없는 분노가 있었지만 그 분노를 글로 표출하지 않았다. 폭음이 분노를 대신했던 거 같다.

어찌됐든 이 국장은 언론계를 떠났다. 그렇지만 글쓰기는 멈추지 않았다. 음식점을 하면서도 말이다. 그는 지인들과 조그만 음식점을 운영했다. 그러나 잘될 리 없었다. 운도 없었다.그것마저도 실패했다. 그러면서도 책은 냈다.

그러다가 중앙일보에 돌아왔다. 당시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의 배려였다고 한다. 기자들의 세계를 잘 이해하고 그들을 다룰 줄 아는 큰 그릇의 인물로 중앙일보 사람들은 지금도 말한다.

이국장과 나는 제3공화국 연재 준비에 들어갔다. 자료를 모으고 사람을 만났다. 녹음기를 들고 다니며 녹취를 했다.

어느날이었다. 내게 큰 게 걸렸다.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1급 비밀 문서가 다발로 들어왔다. 당시 그곳에서 일했던 이재만이란 사람이 보관해둔 문서였다.

민정이양 계획부터 당시의 모든 게 망라되어 있었다. 20년이 지난 뒤였지만 눈이 휘둥그레질 내용들이었다. 공작과 음모가 들어 있었다. 나로서는 기자생활 시작 후 첫 번째 특종이었다. 그날 밤 나는 이국장과 술을 마셨다. 날아갈 듯 좋았다.

그러나 잠시였다. 며칠 뒤였다. 회사로 민간인 복장을 한 군 정보기관 사람들이 들이 닥쳤다. 이 국장은 나보고 밖에 나가 있으라 했다. 한참을 그 사람들과 얘기했다. 여기저기 전화를 거는 듯도 했다. 그리곤 이국장이 먼저 나왔다. 내 얼굴을 힐끗 보곤 어디론가 나가버렸다. 내게 아무 소리 안한 채 말이다. 차마 말을 못했던 거다. 그러자 그 사람들이 나를 불렀다. 문서들을 내놓으라고 했다. 마치 애 다루듯이 했다.

“그런 중요 문건들은 국가 기록 보관소에 보관을 해야 합니다. 주시지요. 회사측과도 다 얘기가 끝났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주셔야 됩니다.”

수습기자인 나는 아무 말을 못한 채 자료를 내주었다. 그 굴욕감은 지금도 지울 수 없다.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많은 기자들은 어디에 있었는지...구경꾼 조차 없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옛날 자료가 전두환 정권 사람들한테 왜 필요하단 말인가. 왜 뺏어간단 말인가...... 결국 제3공화국 연재를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이국장과 나는 할 일이 없어졌다. 시리즈는 사실상 취소됐다. 그러나 이 국장은 멈추지 않았다. 잡지에다 글을 썼다. 월간조선, 신동아, 주간 중앙, 일요신문, 심지어 여성중앙 주부생활에까지 글을 썼다. 모두가 제3공화국이었다. 그것을 모아 책까지 냈다. 불굴의 기자였다.

그 원고료로 우리는 매일 술을 마셨다. 호프집 소주집 포장마차 가리지 않았다. 동네 구멍가계 파라솔 밑에서도 마셨다. 우리의 술자리는 취재 계획을 짜는 회의였다. 나는 이미 중앙일보의 기자를 포기한 상태였다. 나로서도 그저 쓰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어디다 쓰는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옐로우 페이퍼인 주간 중앙이면 어떠랴. 시간이 걸릴 뿐 언젠가는 모두가 알게 될 거란 생각이었다. 그것이 기자라 여겼다.

굵직한 특종도 많이 했다. 지금 보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얘기지만 말이다. 내가 가장 신나게 일했던 시절이다.

6개월의 수습기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나도 편집국으로 돌아갈 때가 됐다. 이국장이 나를 불렀다.

“수습이 끝나가는데 어디로 가고 싶냐?”
“.....그냥 더 있겠습니다.”

당연히 가야 했다. 중앙일보 기자를 하자면 말이다. 그러나 갈 수가 없었다. 혼자 놔두고 나만 갈 수 없었다. 내가 미친 거 아닌가 생각도 했다. 말이 안되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골방 같은 작은방에 이 국장 혼자 두고 갈 수 없었다. 나는 의리를 선택했다. 그래서 더 있겠다고 했다.

“조금 더 배우고 싶습니다.”
“자네 동기들은 이제 펄펄 나는 사회부 기자가 되가는데 이렇게 내 밑에 있으면서 기사 한줄 써 본 적도 없이 있을 순 없지 않나.이제는 데려가겠다는 부도 없을 텐데. 정식 기자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끝날지 모르네.”
“아닙니다. 그냥 있겠습니다. 저의 선택입니다.”

나는 이 국장 밑에 그대로 남았다. 1년을 더 있었다. 같은 생활을 반복하며 말이다.
나는 이 국장을 졸졸 따라다녔다. 그림자였다. 그는 YS와 친했다. YS집도 가끔 들리곤 했다. 아마 그때 YS는 연금 비슷한 상태였을 것이다. 상도동 자택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문 앞의 전경들이 일일이 체크했다. 나는 이 국장을 따라 모자를 눌러쓰고 골목을 몇 바퀴 돌기도 했다. 그러다가 전경들이 한 눈을 파는 사이 YS집으로 들어갔다. 이국장이 YS와 얘기하고 있으면 난 그저 옆에서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당시 내노라 하는 재야인사들은 다 만났던 거 같다. 금새 1년이 지나갔다.

이 국장이 내게 다시 물었다.

“1년이 지났다. 수습기간까지 합치면 1년6개월이다. 자, 어느 부로 보내줄까. 아니 내 생각부터 말하지. 안가겠다는 소리는 말고 들어라. 가되 정치부는 가지마라. 그건 나 때문이다. 나는 YS와 친하다. 그러니 너도 친(親)YS라고 사람들이 볼 거다. 지금 전두환 정권이다. 너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너를 경계할 거다. 중앙일보 내에서도 말이다. 너를 대통령 직선제나 하자고 우겨대는 놈으로 알 거다. 나처럼 불행한 기자가 되지 마라. 경제부로 가라. 경제부장한테 너를 받아주라고 내가 얘기했다. 거기 있다가 나중에 기회가 오면 정치부로 가라. 그러나 그것은 내 힘으론 안되는 거다. 니 실력으로 가야 한다. 운도 있어야 하고....더 이상 있겠다는 얘기는 하지 마라.”

나는 다음날인가 경제부로 갔다. 그러나 난 단신 하나도 쓸 줄 모르는 기자였다. 입사 2년이나 된 기자인데도 한 줄 짜리 기사 쓰는 법도 몰랐다. 죽을 노릇이었다.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나는 이 국장 방을 찾았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나오면 위안이 됐다. 고향 같았다. 내가 그로부터 1년 뒤 정치부로 갔을 때 제일 기뻐해준 분도 이국장이었다.

훗날 YS가 집권하면서 이 국장은 회사를 떠났다. 누가 봐도 그는 YS계 기자였다. 그러니 언론사를 일부러 떠난 거다. 남아서 큰소리 칠 만도 한데 말이다. 그렇다고 YS가 그를 특별히 챙겨주진 않았다. 언론 유관 기관 이사직을 맡긴 정도였다.

지금은 쉬고 계시다. 어쩌다 한번 씩 만나 식사를 한다. 하루가 다르게 흰머리가 늘어간다.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그렇지만 지금도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난 나의 중요한 결정이 있을 때마다 그의 얘기를 듣는다. 조선일보 갈 때도 중앙일보 다시 올 때도 그에게 물었다. 언제나 내편이 되어주었다.

내가 4년전 컬럼을 처음 쓰게 될 때였다. 막상 뭘 써야 할 지 몰랐다. 첫 번째 컬럼이 신통치 못했다. 회사에서 계속 쓰게 하냐마냐로 이런저런 말들이 있었다. 그때도 이국장은 내 앞에 나타났다.

“컬럼을 쓰기 시작했던데. 잘 읽었어....2회분은 뭘로 쓸건가.”
“아직...정하지 못해 걱정입니다.”
“YS가 퇴임하고 기자들을 한동안 만나다가 얼마전부터 기자들 안 만난나고 있지? 기자들 안 만난 지 몇 달 됐지?”
“예, 오래됐습니다. 모든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고 있다고 하데요. 인터뷰를 할 수만 있다면 특종인데...”
“내일 프라자 호텔에서 만나자. 같이 상도동 가자.”
“기자들을 안 만나 주는데 저를 만나주겠습니까?”
“자네 간다는 말 안하고 내가 간다고 하면 되잖아. 같이 만나서 이것저것 물어봐.”

그런 식이었다. 2번째 컬럼에 YS를 단독 인터뷰했다. 내 컬럼이 자리를 잡게 해준 것도 이국장이었다.

나를 자기의 분신처럼 여겨준다. 그러면서도 자기처럼 불운한 기자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언제나 강조한다. 그 때문에 나에게 기자직을 관두라고 한 적도 있다. “너처럼 곱게 자란 놈에겐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라고 했다. 세상 어렵게 살지 말라고 했다. 살아남기 어려울 거라 했다. 그러나 20년전 그런 충고들이 나를 만들었다. 그래서 살아남았다. 그래서 지금도 글을 쓴다.
이연홍 대표

댓글이 10 개 있습니다.

  • 24 14
    궁금이

    이영석기자님께써 쓰셨다는 그책
    정말 일부러라도 찾아서 읽어 보고 싶군요
    그런데. 전편에서 언급하셨던
    그책은 서점에 없드라구요 아쉽게도
    그래도 다른 책은 있어 다행이드라구요

  • 17 15
    착한사람

    마음이 훈훈해지네요.
    오늘 이기자의 글을 읽으면서 느낀게 많네요.
    23년전에 나의 선생님...
    생각이 안나네요.
    억지로 생각하니 매맞은일만 생각나구요.
    오늘 글 읽으면서....
    지금까지도 존경하고 사랑하는스승님을
    마음에 품고 살아오면서 이런글을 쓸수있는
    이기자를 정말 존경합니다.

  • 28 17
    유구무언

    ㅉㅉ
    이기자와 이영석선배와의 아름다운 의리가 있는반면, 거짓을 밥먹듯하고 사람을이용만하고 팽해버리는 의리없는놈은 어떻게해야하는지?

  • 21 16
    인연

    이연홍 기자님이 부럽습니다!!
    정말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연홍 기자님과 이영석 기자님같은 인연을 만난다는게
    쉽지 않죠..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 27 16
    진실

    우리가 이연홍기자를 좋아하는이유
    써야하는것을 쓰지않는것은 독자에대한배신행위아닌가! 우리가이연홍기자를 좋아하는이유는 써야하는것을 꼭 쓰는 용기때문이다!

  • 25 16
    순수

    남자의 의리
    거짓이난무하고, 사람못믿는 이험한 세상에 이기자님과 이영석선배와의 23년간의 의리와 우정(?)이 존경스럽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이연홍대표님의 의리와 믿음, 순수한열정이,이기자님의 삶의목적인듯합니다!

  • 21 30
    사부

    옛날 생각
    의리만 있는 그런 끈끈한 사이
    오늘날엔 그림의 떡?
    만들면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세태는 반의리 사회로
    사부님과 제자
    참 좋은 그림입니다.

  • 19 23
    불친절한 동건씨

    좋은사람에겐 좋은사람이 붙는법
    부럽네요

  • 27 23
    신문인

    이연홍은 계속 써야한다
    오늘도 즐겁게 잘 읽고 갑니다.
    그대가 펜을 놓는 것은
    모든 이들의 슬픔이라는 것만 기억해주세요

  • 25 27
    푸른하늘

    아름답네요
    세상살면서..
    저런 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인생에서 오는 3번의 기회가 아닐까 한답니다.
    저에게도 저런 선배님이 한분 계신데..
    지금..열심히 일하는 것도..
    어쩌면 그때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랍니다..
    살다보니..저런 분 만나는게 결코 싶지 않음을..
    알게 되는데..그래서..더 소중하게 느껴지드라구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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