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언, 당신은 태양이 아니라 달이었소"
[정치부 기자 23년의 기억들] <6> 박철언과 나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또 다른 어려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일보는 선거가 끝난 뒤 인사를 단행했다. 이영덕 정치부장은 워싱턴 특파원으로 가게 됐다. 하원 부장 대우는 동경 특파원이 됐다.
앞이 깜깜했다. 나를 조선에 데려온 두 사람이었다. 오직 두 사람만 보고 1년을 일했다. 그랬는데 특파원으로 간다니... 눈앞이 깜깜했다.
조선일보 정치부내에 용병이 둘 있었다. 나와 김교준 기자다. 서울 신문 출신이다. 나는 민정계 담당, 김 기자는 민주계 담당이었다. YS가 대통령이 됐으니 김 기자는 안전했다. 취재의 연속성 때문이다. YS가 제일 좋아하는 기자였다. 글도 잘 썼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민정계는 없어진 셈이다. 그러니 취재의 연속성도 필요 없었다. 더구나 나는 민주계를 몰랐다. 담당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필요 없는 존재가 된 거였다.
민주계는 연일 축제였다. 민주계 담당기자도 상종가였다. 그러나 나를 불러주는 곳은 없었다. 내가 민정계 담당이었기 때문이다. 민주계 머리 속에 내가 민정계와 싸웠던 기억은 사라졌다. 그때마다 나에게 전화를 걸어 “힘내라”던 그 사람들이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자 언제 봤느냐는 식이었다. 현실이었다.
나와 김현철씨 와의 관계는 그래서 시작됐다. YS차남 현철씨 말이다. 뭔가라도 잡아야 했다. 잡을 곳이라곤 거기밖에 없었다. 다른 실세들은 이미 다른 기자들의 몫이었다. 파고들 틈이 없었다. 나는 현철씨를 만났다. 고등학교 1년 선배였다. 선거 전에 한 두 번 얼굴만 봤던 사이다.
그에게 나의 사정을 설명했다. 좀 도와달라고 했다. 기대는 안했었다.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흔쾌히 돕겠다고 했다. 그로서도 내가 필요했던 거 같다. 사실 그때 민주계 일부에선 현철씨를 유학 보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의 힘이 갑자기 커졌기 때문이다. 의심많은 YS가 아들 말만 들으려 한 거다. 그러니 현철씨가 거추장스러워졌다. 민주계 입장에선 말이다. 그와 김덕룡씨의 관계가 틀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니 현철씨도 자기 편이 필요했던 거 같다. 그렇다고 내가 편이 되주진 못했다. 그저 정치판에 돌아다니는 얘기를 해주는 정도였다.
그와 몇 번을 만났다. 그랬는데 주워들은 얘기로 작은 특종 몇 개를 했다. 그에겐 지나가는 얘기가 내겐 특종이었다. 그에겐 집안 사소한 얘기가 내겐 1급 정보였다.
현철씨는 실세의 자리를 굳혀갔다. 그러다보니 기자들을 기피했다. 다만 나는 예외였다. 귀찮게 하지 않아서다. 나는 그에게 되도록 묻지 않았다. 아무리 궁금해도 말이다. 그가 말할 때만 기다렸다. 자기가 말하다가 툭툭 던지는 것들이 내겐 뉴스였다. 그때 살짝 거들면 더 큰 뉴스가 쏟아졌다.
지금도 그에겐 미안한 감이 없지 않다. 그에게 진정한 후배 노릇은 하지 못했다. 그저 정보 소스로서 이용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어쩔수 없었다. 반대로 내가 이것 저것 물어본다 치자. 한 두 번은 대답할 거다. 그러나 다음은 기약하기 어렵다. 내가 그에게 충고를 한다 치자. 그가 뭐가 아쉬워 나를 만나주겠는가. 귀찮은 존재로 여길 것이다. 그래서 묻지 않았다. 듣기만 했다.
그와 나의 만남을 민주계 사람들이 알게 됐다. 그러면서 그들도 내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멀어진 사람도 있다. 권력투쟁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해 나도 민주계 핵심정보들을 접하게 됐다. 정치부 기자로서 제 몫을 하기 시작한 거다. 민주계 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나로선 그때가 정치부 기자로서의 시작이나 다름없다.
YS는 대대적인 사정(司正)을 했다. 표적 사정의 성격도 없지 않았다. 결국 민정계의 박철언씨가 걸렸다. 빠징고 자금을 받은 혐의였다.
그가 검찰출두 하루 전 전화를 걸어왔다. 출두하면 곧바로 구속되는 상황이었다. 나와 술을 마시자고 했다. 내일 구속인데 말이다. 나를 그렇게 미워했던 사람이 그러는 게 의아했다. 그러나 거절할 수 없었다. 위로라도 해야 했다. 민정계 사람들과 화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인사동의 한 한정식 집이었다. 조그만 방에 둘만 마주했다.
“이 기자, 그동안 미안하오. 좋게 지냈어야 했는데...”
“무슨 말씀을요. 저하고는 나쁜 관계였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얘기를 했다. 술도 많이 마셨다. 나는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위로가 될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장관님, 장관님은 스스로를 ‘떠오르는 태양’이라 하셨죠? 그러나 그 착각이 장관님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봅니다. 장관님은 태양이 아니라 달이었습니다. 노태우란 권력을 세상에 반사하는 달 말입니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게 아니라 남의 빛을 반사하는 달 말입니다. 스스로가 권력이 아니라 남의 권력을 행사하는 달 말입니다. 달인 줄 진작 아셨다면 이렇게 안됐을 겁니다. 태양이라 착각했기에 이렇게 되신 겁니다. 장관님, 장관님은 지금 서산에 ‘지는 달’입니다. 그러나 낙심 마세요. 비록 지금은 지는 달이지만 한 바퀴 돌아 다시 떠오를 수만 있다면 그때는 태양으로 떠오를 수 있을 겁니다. 떠오르는 길은 용기를 잃지 않는 겁니다. 명분을 잃지 않는 겁니다. 새로운 명분으로 무장하세요.”
그는 가만히 내말을 들었다. 얼핏보니 눈이 충혈됐다. 그래서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얘기하기 시작했다. 노태우 대통령과의 관계에서부터 YS와의 3당 합당 당시까지 모든 걸 털어놨다. 듣고 보니 스스로를 태양으로 착각할 만도 했다. 그는 자신의 얘기를 마치고 이렇게 말했다.
“이형, 부탁하나 있는데 거절 말고 들어주었으면 좋겠소.”
“뭐든지 말씀하시지요. 할 수 있는 거라면 하겠습니다.”
“.......현철이 집 전화번호 좀 가르쳐 주시요. 내가 내일 들어가면 바로 구속될 거요. 그러니 오늘 통화를 좀 하고 싶소. 그런데 모든 번호를 바꾸었더구먼. 나도 현철이 잘 압니다. 실은 3당 합당을 준비하면서 YS와 비밀스럽게 만날 수가 없어서 현철이 집에서 만났소. 나와 친했소. 그러니 전화번호 가르쳐 줘도 괜찮을 거요. 내가 전화 걸면 받을 사람이요.”
구속을 하루 앞둔 그가 나를 만나자고 한 이유를 그때서야 알았다. 난 잠시 망설였다.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기가 곤란했다. 그건 현철씨와의 약속이었다. 절대로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기로 말이다.
“누구에게도 안 가르쳐 주기로 약속을 했는데요....”
“이 형한테 들었다고는 안 하겠소.”
나는 에라 모르겠다 생각했다. 그것이 도움이 된다면 돕고 싶었다. 도움이 안 될 줄 알면서도 말이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그 박철언이었다. 그가 내게 이렇게 부탁하는데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전화 번호를 불러줬다.
“집에 전화가 둘인데 하나는 부인이 받기 때문에 바꿔주지 않을 겁니다. 또 하나는 침대 머리맡 전화라 들었는데 그 번호로 밤늦게 하시면 현철씨가 직접 받을 겁니다. 내가 번호 가르쳐 주었다는 말씀은 하지 말아주세요.”
“고맙소.”
우리는 서둘러 술자리를 마쳤다. 그가 집에 가서 전화를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현철씨가 전화를 걸어왔다.
“혹시 내 전화번호 누구한테 가르쳐 준 적 있냐?”
“아니.....”
“진짜지? 근데 어떻게 알았을까?”
“누가?”
“아니 어제 밤 12시가 넘어서 박철언이가 전화를 건 거 있지.‘나 박철언이오’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얘기 좀 했어?”
“아니, 얼른 끊어 버렸어. 그리곤 수화기 내려놨지.”
“왜? 얘기 좀 하지. 오늘 출두잖아. 바로 구속이라며......불쌍하잖아...옛날엔 친했다며? 형네 집에서 YS랑 비밀 회동도 했다며? 그냥 얘기는 들어줄 수 있는 거 아니었나?”
“미쳤냐? 내가 무슨 얘기를 해줄 수 있겠냐......그래서 끊었지. 어휴 질겁했네.”
그게 정치였다. 그게 권력이었다. 과거는 없다. 미래도 없다. 오직 오늘만 있다.
다음날인가 현철씨는 전화번호를 바꿨다. 그리곤 내게도 한동안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아마도 나를 의심했던 거 같다. 그는 근 6개월마다 번호를 바꿨다. 어떨 땐 3개월만에 바꾼 적도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도청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다. 어찌됐든 그의 전화번호는 그 자체만으로 1급 정보였다.
어느 날인가 기자실 책상위에 수첩을 놔두고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나가다 생각하니 수첩을 두고 왔다. 그래서 다시 기자실로 들어갔다. 그랬더니 다른 신문사 한 기자가 내 책상에 앉아서 뭔가를 열심히 베끼고 있었다. 전화번호였다. 민주계 실세들과 연결되는 숨은 전화번호들 말이다. 그때만 해도 핸드폰이 지금처럼 없었다. 안 걸리기 일쑤였다. 있다 해도 너무 컸다. 그래서 대부분이 카폰을 이용했다. 그러니 직통 유선 전화번호를 아는 건 취재의 기본이었다. 나는 얼른 수첩을 집었다. 그 기자의 수첩까지 뺏었다. 그리곤 베껴간 것을 검은 싸인펜으로 싹싹 지웠다. 그 기자는 그저 ‘미안하다’만 연발했다.
그 후부터 내 수첩엔 번호만 있다. 이름이 없다. 어디서 잃어버려도 괜찮게 꾸몄다. 나만이 아는 암호로 이름을 대신했다.
박철언씨 얘기를 조금만 더하고 싶다. 그는 검사출신이었다. 그러다보니 정치인의 일반적 행태를 잘 몰랐다. 그럼에도 실세였다. 그러니 항상 기자들을 가볍게 보는 듯 했다. 기자들로선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몇몇을 제외하곤 그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자.
거물 정치인은 아침을 기자들과 먹었다. DJ도 YS도 그랬다. 그러면서 담소를 나눴다. 기자들은 그 자리에서 그날의 대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박철언씨는 달랐다. 그의 집은 양재동 신동아 빌라였다. 말이 빌라지 단독주택이었다. 그런데 그는 기자들에게 문을 안 열어주었다. 부인이 싫어하기 때문이란 비서들의 얘기였다.
그렇다고 기자들이 안 갈 수도 없었다. 아침에 모이는 기자가 7명 정도 됐다. 그 7명이 다 모여야 문을 열어줬다. 7명이 찰 때까진 수위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집을 개방한 건 한참 뒤다. 그것도 기자들의 거센 항의 때문이었다.
밤에도 기자들은 모였다. 보통 박철언씨는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그때까지 기자들은 그를 기다렸다. 그 집 전화는 두 대였다. 그러나 한밤에 누가 전화를 그리 쓰는지 도무지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 시집 안 간 딸들이 거는 것 같았다. 문제는 회사에서 기자들을 찾을 때였다. 그때는 핸드폰이 없었다. 삐삐라 불리던 호출기가 전부였다.
그런데 삐삐가 울리면 5백 미터를 뛰어가야 했다. 약국 공중전화로 말이다. 도무지 전화를 걸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어떨 땐 하루 밤에 서너 번을 뛰어다녀야 했다.
정말 욕이 나올 지경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그가 집에서 기자들에게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몇 마디 얘기를 했다. 내용인즉 자기가 뻥긋하면 YS가 날라 간다는 요지였던 거 같다. ‘오프’를 전제로 했으니 말을 심하게 했다. 그 자리에 나는 없었다. 그런데 난리가 났다. 기자들이 ‘오프’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거다. 그 정도의 말이라면 기사화해야한다고 했다는 거다. 결국 대서특필됐다. 박철언씨는 그것으로 장관직을 내놓았다. 기자들과의 좋지 못한 관계가 원인 중 하나였다.
YS라면 기자들이 ‘오프’를 받아 줬을 거다. DJ라면 아예 말을 안했을 거다.
박철언씨는 검찰출두 직후 구속됐다. 재판을 받았고 징역형을 살았다. 6개월쯤 살았을 때였던 거 같다. 그가 사람을 내게 보냈다. 메시지는 간단했다. 면회 좀 와달라는 거였다. 갈까 말까를 망설였다. 우선은 왜 그가 나를 보자는 지가 궁금했다. 구속 전날 술 마시며 했던 ‘지는 달’ 얘기를 다시 듣고 싶어서일까. 다시 떠오를 땐 태양일 거란 얘기 말이다. 아니면 또 현철씨 얘기를 하려는 걸까. 전화가 안 되니 메시지를 전해달라고 말이다. 몇 번을 고민했다. 고생하고 있는 사람의 부탁이라서다. 그러다가 안가기로 했다. 미안하지만 그러는 게 피차 좋다고 본 거다.
그후로 그를 본 적이 없다. 어디서 마주칠 만한데도 그러질 못했다. 만나면 그때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데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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