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에서 건네준 '정주영 보따리'
[정치부 기자 23년의 기억들] <5> 조선일보와 나 (2)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곳이었다. 내 몫을 해야 했다.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처럼 되진 않았다. 민자당내 민정계 담당으론 어림없었다. 그러나 나의 경쟁력은 그래서 만들어졌다.
민정계 의원들은 조선일보를 극도로 따돌렸다. 중진인 박태준 박철언씨도 그랬다. 조선일보 기자는 상대를 안했다. 툭하면 비아냥 거렸다. 기자들 면전에서 "조선일보는 YS 신문"이라고 했다. 그리곤 내 얼굴을 보고 이내 “아이구, 조선일보 기자가 여기 있는 줄 몰랐네” 하는 식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한때는 잘해 주었다. 많은 정보를 안겨준 적도 있다. 그러다가 바뀐 거다. 조선일보가 자기들의 주장과 전망을 안 실어 주면서부터다. 그러나 실은 조선일보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의 정보는 대부분 틀렸다.
그들 정보의 핵심은 ‘노태우가 YS를 버린다’ 였다. 두고 보라는 거였다. 당시 박철언씨는 시기까지 예고했다. 그러나 결과는 자기가 날라 갔다. YS가 쳐버렸다.
반면 YS쪽 정보는 비교적 정확했다. 핵심은 ‘내가 먹는다’였다. 시간이 갈수록 맞아떨어졌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과가 뒷받침됐다. 맞는 정보에 귀 기울이는 건 기자의 기본이다.
그럴수록 그들과의 갈등은 심해졌다. 나중엔 가장 기본적 정보도 안주었다. 오찬 일정 하나 확인하는데 반나절이 걸렸다. 그러니 민정계 담당인 나는 어떻겠는가. 죽을 지경이었다. 정보가 없었다. 회사에 들어와도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보고라도 할라치면 모두가 웃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기자는 글 아니면 정보다. 둘 다 잘하면 최고다. 그러나 글 잘 쓰는 기자는 대개 정보가 없다. 글 실력을 믿기에 게으른 거다. 반면 글 못 쓰는 기자는 정보가 많다. 글 실력이 없으니 정보라도 구하는 거다.
나는 그때부터 단문을 썼다.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글로 승부를 하자는 심산이었다. 기자로서 살아남는 길은 그것밖에 없다고 여겼다. 단문의 장점은 읽는 이의 긴장을 높인다는 거다. 정치기사에는 적격이다. 이야기의 전환도 쉽다. 왔다 갔다해도 잘 모른다. 문장이 짧아서다. 쫓아가기 바쁘다.
그러나 나의 단문은 내 것이 아니다. 중앙일보 수습기자 시절 내가 모셨던 분의 글을 흉내 낸 거다. 이영석 선배다. <야당 40년>이란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 언젠가 그분의 얘기를 따로 소개할 거다.
그분은 나의 스승이시다. 지금도 한 두달에 한번쯤은 만난다. 나이 70이 넘으셨다. 그분은 글만 가르쳐 주신 게 아니다. 세상을 가르쳐 주셨다. 정치를 보는 눈을 뜨게 해주셨다. 훌륭하신 분이지만 운이 없었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겠다.
3월 총선이 다가왔다. 각 당이 공천 작업에 들어갔다. 민자당은 한 지붕 세 가족이었다. 노태우의 민정계가 최대 계보였다. 다음이 YS의 민주계였다. 그 다음은 JP의 공화계였다. 각 계파마다 생각이 달랐다. 계파의 생각을 알아야 공천자를 맞출 수 있었다. 공천자 명단은 정치부 기자라면 당연히 구해야 하는 정보 중의 정보다. 한번 낙종하면 4년을 기다려야한다.
그런데 민정계 공천 자료를 구할 수 없었다.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말을 안했다. 조선일보라는 이유였다. 그런데 참 고마운 한 선배가 있었다. 최재욱 씨다. 동아일보 기자출신인 그는 당시 박태준대표의 비서실장이었다.
그가 공천 발표 이틀을 앞두고 밤늦게 전화를 걸어왔다.
“이연홍씨 명단 입수 못했지?”
“예, 아무도 말을 안 해주네요. 민주계 명단과 맞춰봐야 하는데.....”
“허허 그럴 거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나 좀 만나지.”
“어디든 지금 달려가겠습니다.”
“아니야. 나 지금 조선일보 앞이야. 차를 코리아나 호텔 앞에 세울 테니 차속에서 만나지.”
“최 선배, 고맙습니다.”
그가 명단을 줬다. 다음날 조선일보는 공천자 명단을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특종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신문보다 충실했다. 다른 곳은 거의 민정계 명단만으로 기사를 만들었다. 내가 입수한 명단 말이다. 그러나 조선은 민주계 명단이 있었다. 훨씬 충실한 자료였다. 당시 민주계 담당이던 김교준 기자가 입수했다. 사실상 그의 특종인 셈이었다. YS가 준 것 같았다.
모두가 그런 식이었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나는 취재할 수 없었다. 다행스러운 건 그때마다 누군가가 나타났다. 최재욱 의원처럼 말이다. 대부분이 기자출신 의원들이었다. 기자의 고충을 알아 주었던 거다.
그러나 나도 점점 감정이 상하게 됐다. 민정계 의원들을 향해서 말이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감정적으로 변해갔다. 공정성을 잃어갔던 거다. 회사가 아니라 내가 말이다. 잘못이었다.
나는 연일 민정계에 대해 좋지 않게 기사를 썼다. 같은 기사도 한 바퀴 돌려서 썼다. 그러니 그들도 나를 더 미워하게 됐다.
악순환이었다. 나는 취재 방식을 바꿨다. 그들에게 물어봐선 소용없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으니 말이다. 필요한 건 뒷얘기들이었다. 이면의 상황들 말이다. 그래서 그들이 자주 다니는 곳을 탐문했다. 거기서 그들이 흘리고 간 정보를 주으려 했다. 그거라도 해야 했다.
대상은 박태준씨와 박철언씨가 아니었다. 그들의 보좌관 혹은 비서들이었다. 그들은 밤만 되면 기자들과 어울렸다. 주로 자기들에게 우호적인 기자들과 말이다.
그래서 그들이 잘 가는 조그만 술집을 알아냈다. 술값도 별로 비싼 곳이 아니었다. 나도 그 곳을 기자들과 들락거렸다. 그랬는데 그곳에서 중요한 정보를 듣게 됐다. 민정계 보좌관과 기자 한명이 누군가를 데려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YS의 숨겨둔 아들이라는 얘기였다. 그 술집 주인은 YS지지자였다. 그러니 내게 귀띔을 해준 거다. 순간적으로 ‘폭로전’이구나 생각했다.
이미 그런 루머가 있었다. 그러니 ‘올 게 왔구나’ 했던 거다. 일단 상황 파악이 필요했다. 폭로 상황에서 기사를 쓰자면 말이다. 나는 아무것도 못 쓸 게 분명했다. 얘기를 안해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사전 취재에 들어갔다. 우선은 실제로 그런 사람이 존재하는지를 알아봐야 했다. 그렇지만 누구한테 물어본단 말인가. YS한테 “숨겨둔 아들이 있으십니까”고 물을 수도 없었다. 그때만 해도 DNA검사는 생각지도 못했다. 있었다 해도 머리카락 하나 구할 수도 없었다. 한참을 고민했다. 결국 물어 봤다. YS측근비서에게 물었다.
그러자 다음날 아침 그가 나를 보자고 했다.
“내가 어제 YS한테 직접 물어봤어. 그랬더니 허허 웃으시더구먼. 실은 우리도 그런 정보가 있어서 그 사람의 신원을 알아봤나봐. 그런데 나이가 안 맞아. YS는 현철이 낳고 정관수술하셨데. 수술기록도 있어. 그런데 그 친구 현철이보다 한 살인가 두 살 아래래.”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른 기자들에게도 얘기했다. 민정계쪽에 그 얘기가 들어가라는 속셈이었다.‘그러니 괜히 폭로한 뒤에 망신당하지 말고 중단하라’는 메시지를 보낸 거였다. 그 문제는 그렇게 조용히 넘어갔다. 그러나 나는 찜찜했다. 민주계한테 이용당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뒤 비슷한 상황이 또 있었다. 이번엔 숨겨둔 딸이었다. 일본에 사는 여자라 했다. 그러나 역시 나이가 안 맞았다. 가짜였다.
그때 나는 기사를 썼다. 전례가 있어서였다. 이용 안 당할려면 기사를 써야했다. 기자 컬럼이었다. 아무리 선거라지만 이런 음모가 횡행해서 되겠느냐는 요지였다. 가짜임을 알았기에 음모라 규정할 수 있었다. 음모 주체가 누군지도 암시했다.
그런데 얼마 뒤 한 주간 잡지가 그 여자 얘기를 썼다. 그러나 큰 반향은 없었다. 이미 음모론이 퍼진 뒤였다. 결국 그 잡지사 사장은 한참 뒤 다른 건으로 구속됐다.
조선일보를 따돌린 건 민정계만이 아니다. 정주영씨의 국민당도 그랬다. 국민당은 총선에서 31개의 의석을 확보했다. 그리고는 대선을 향해 내달렸다. 그들도 연일 조선일보를 비난했다. 자기네 기사를 나쁘게 쓴다는 이유였다. 당시 조선일보는 반(反)국민당이었다. 재벌의 정치참여를 내놓고 반대했다. 원래 현대그룹과는 굉장히 좋은 관계였는데도 말이다. 정주영씨로선 섭섭했을 만도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싸움은 치열했다. 조선일보로선 더 힘든 상대였다. 급기야 소송사태가 벌어졌다. 내가 쓴 기사만 두 개가 걸렸다. 조선일보로선 대책이 필요했다. 현대 직원들이 조선일보를 끊기 시작했다. 현대라는 회사가 끊은 건 물론이다. 그런데 직원들까지 집에서 보는 신문을 끊은 거다. 끊긴 부수가 꽤 됐다. 대통령 선거는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정치부 하원 차장이 나를 불렀다. 이명박 의원을 만나라 했다. 정주영씨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란 지시였다.
그는 당시 민자당 의원이었다. 정주영씨의 정치참여뒤 그도 정치에 입문했다. 민자당이 애써 그를 영입했다. 정주영씨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던 거 같다. 그렇다면 그는 당연히 선거전에 앞장서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정주영씨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나는 하원 차장에게 말했다.
“이명박 씨는 당에서 나서라 하는데도 꼼짝 않는데 내가 간다고 정 회장 나쁜 얘기를 해주겠어요?”
하 차장은 그러자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 글쎄 한 번 만나보시라니깐요.”
그래서 연락을 취했다. 시간을 넉넉히 갖고 만나자고 했다. 그때도 곧바로 답신이 왔다. 1년전의 그때처럼 말이다.('조선일보 나' 1회분 참조)
강남 어느 호텔 일식집 방이었던 것 같다. 나는 오후 약속을 모두 취소했다. 기사도 다른 후배에게 써 달라 부탁했다.
간단히 식사를 했다. 그리곤 수첩과 펜을 꺼내 들었다. 나는 좀처럼 수첩을 꺼내지 않는다. 상대가 말을 끊을 까봐서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아예 새 수첩을 가지고 갔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처음엔 말을 안 하려 했다. 자기가 전면에 못 나서는 이유부터 얘기했다. 그럼에도 자기가 나를 만나 준 이유도 얘기했다. 나름대로 충분한 명분으로 무장했었다. 작은 이익보단 공익을 위해서라 했다. 그러고 나서 말하기 시작했다. 두어 시간은 걸린 듯 하다. 나는 열심히 받아 적었다. 손이 아플 정도였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어느 것도 기사로 쓰기에는 적합치 않은 것들이었다. 기대했던 내용들이 아니었다.너무 개인적인 것들이었다.
나는 회사로 돌아왔다. 그리곤 하 차장에게 보고했다. 들은 얘기들을 해주었다. 하 차장도 나와 같은 판단이었다.
“기사거리는 아니구먼.”
그러나 그때 들은 얘기들은 현대그룹을 이해하는데 지금까지 소중한 판단의 근거가 되고 있다.
그사이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YS가 당선됐다. 조선일보로선 빨리 현대와의 관계를 매듭지어야 했다. 빨리 소송 문제를 매듭지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러나 나로선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한 선배가 나를 보자고 했다. 정치권에 있는 선배였다.
코리아나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는 분홍색 보자기에 서류 한보따리를 싸가지고 나왔다.
“그게 뭡니까? 서류 같은데...”
“집에 가서 풀어보고 현대하고의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된다면 활용해봐”
그 선배는 그 말만 하고 자리를 떴다. 그리곤 커피숍을 나서다가 뒤돌아서는 이렇게 말했다.
“다 쓰고 나면 돌려줘.”
나는 집에 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회사로 들어가 빈 회의실을 찾았다. 그 속에서 보따리를 풀어봤다. 순간 입이 벌어졌다. 정주영 회장과 관련된 각종 자료들의 집합체였다. 루머는 루머대로, 확인된 사항은 확인된 사항대로 분류되어 있었다. 근거 사진도 있었다. 자세한 사항은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아마도 선거에 대비해 만든 자료였던 것 같다. 그러나 써먹지 않은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 자료를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으로 현대와 협상하지도 않았다. 소송은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믿었다. 내 예측이 맞았다. 저절로 풀렸다. 신문도 다시 구독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자료를 내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다녔다. 스노우 체인에 둘둘 말아놓은 상태로 말이다. 어쩌다 엔진오일이라도 갈라치면 보따리를 빼내고 차를 맡겼다. 2년 넘게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다. 조선일보를 떠나면서 누군가에게 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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