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촉진시키는 것이 개혁이다?
가난을 촉진해야 개혁이 빛이나는 법이다.
그래서 개혁은 權慾의 장난감이자 민중에 대한 사기극이다.
개혁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개혁처럼 모질고 악질적인 것이 없는 법이다. 개혁은 민중의 희망이 아니라 민중을 해치는 해악일 뿐이다. 개혁은 권욕 겉치장이며 민중의 아픔을 이용하는 정치적인 장난감이다. 개혁은 민중에게 절대적 필요한 요소이나 정치인들에게는 권욕을 넘보는 먹이감이다. 우려먹고 이용하고 휘두르는 것이 개혁이고 당하고 후회하는 것이 곧 개혁이다. 때 빼고 광내봐야 때는 또 끼는 법이다. 개혁은 초자연적인 방임일 때 극적인 개혁이 이루어지는 법이다. 권욕에 이용당하는 개혁은 순간은 달콤해도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사기를 당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개혁정부에 대한 식상한 감정은 시간의 방임 속에 놓여질 수 없는 것이다.
개혁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환원시키는 변측에 대한 수술이다. 정치적 수사에 개혁을 달면 사기가 되기가 십상이고 오류의 범람에 의한 실패한 장난이 되기 십상이 되는 법이다. 참여정부는 개혁과 혁신을 표방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어떤가? 실패한 개혁정부다. 오류의 범람이 부른 자충수 때문에 국민과의 동행에 실패한 것이다. 권욕의 장난질이 만들어놓은 예술이 참여정부 앞에 놓인 선거탄핵의 모질기만 한 국민의 감정만 불러왔다. 가난을 촉진시키며 나락으로 내모는 희락에 젖어 정치적 수사로 이용한 몫으로 자리매김 된 것이다. 양극화를 부채질하고 부동산정책의 극심한 편차를 유도한 개혁의 사기가 부른 현실을 용납할 수 없다는 민중의 저항이 실패로 가는 참여정부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개혁은 민중들의 가난한 아픔을 이용한 사기극이며 민중을 호도하는 장난질인 것이다. 철저하게 민중을 이용하고 처절하게 가난을 촉진시켜야 개혁이 빛이 나는 순간에 머물러 있을 수 있을 것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정치인들이 노리는 것이 그것이다. 약자의 아픔을 이용한 권욕의 도구가 개혁이기 때문이다. 하이에나를 정치에 비유하는 것이 보통의 상식이 되어버린 오늘의 현실정치이다. 그것을 보면 정치인들이 가지고 있는 민중에 대한 사기가 얼마나 정치적 밑천으로 자리 잡고 있는 지를 대변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현실이다. 약자가 있어야 개혁을 이용한 사기극을 연출할 수 있는 법이다. 배부른 자에게는 개혁은 정치적 사기극으로 보이지만 배고픈 자에게는 개혁이 지상낙원으로 인도할 희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혁은 배부른 자에 대한 개혁이 될 수 없고 배고픈 자를 호도하는 사기극이 되기가 십상이다. 정치가 개혁이라는 수사를 이용하여 민중을 나락으로 내모는 결과를 양산하는 것은 법칙을 넘어 진리로 민중의 가슴들을 잠식하는 것일 게다. 진보도 개혁도 궁극적으로는 가난을 구하는 의식은 전무하는 것이 필연일 뿐이다. 철저하게 이용하고 철저하게 촉진시켜 권욕을 우려내는 도구일 뿐이지 절대적 아픔에서 구하고자하는 절대적 善 그 가치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사기는 영속적인 영구불변의 연극이 될 수 없는 법이다. 한없이 머물러 민중의 가슴을 사로잡는 연극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탈로 나고 들춰지고 밝혀지는 것이 사기가 가진 진리이기 때문이다.
개혁은 가난한 민중이 없으면 장난의 정치적 도구가 될 수 없다. 가난한 민중의 아픔을 이용하는 것이 개혁을 표방한 정치적 사기극이다. 가난한 민중의 가슴을 팔아 권욕의 도구로 이용하는 섣부른 개혁은 민중의 절규로 맺힌 봉기에 쓰러지는 법이다. 부동산 정책을 보라 가난한 민중을 이용한 섣부른 개혁의 수사가 얼마나 많은 민중을 나락으로 영원히 내몰았는지를 보라는 말이다. 궁극적으로 가난을 이용한 개혁이 철저하게 민중의 가슴에 절망을 안겨준 꼴이다.
그리고 그들 자신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제비 따라 강남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강남 따라 제비 가는 가난한 가슴에 원수가 되는 정치인들의 동냥적 사기극의 보금자리도 결국 강남이 아니면 어디라는 말인가?....개혁. 개혁을 앞세우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