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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공화당의 비명 "베이커를 평양에 보내라"

[미국발 특별기고] 베이커는 북핵 해결할 공화당의 '마지막 구원투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16일 미국 <뉴스위크>와 인터뷰에서 "북한에 특사로 간다면 미국정부가 가장 신임하는 미국의 지도자가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그런 의미에서 제임스 베이커씨가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보도를 접한 많은이들이 '하필이면 왜 베이커인가'라는 궁금증을 가졌다.

이에 대해 미국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센터소장인 김동석 소장이 본지에 보내온 특별기고문에서 "부시는 베이커를 대북 특사로 보내야 한다"는 미국 공화당내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며 베이커가 공화당내 어떤 절대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인가를 상세히 밝혀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다. 베이커는 11월7일 미국 중간선거로 부시 대통령의 공화당이 참패할 경우 대북특사로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그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편집자 주>


공화당 "부시, 현실적 보수주의 3인방 복귀시켜야"

중간선거를 2주일여 앞두고 공화당의 선거 전략팀 내부에서는 "공화당이 전통보수로 회귀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 정책논의 구조에 현실적 보수주의 3인방을 복귀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공화당 내 ‘현실적 보수주의 3인방’이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당시 백악관 비서실장과 아버지 부시 대통령 때 국무장관을 지낸 제임스 베이커,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지낸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미군 역사상 덕장으로 가장 신망이 높고 부시 행정부 1기 때 국무장관을 역임한 콜린 파월 등 세 사람을 가리킨다.

민주당의 마이클 듀카키스 후보를 가볍게 누르고 1988년 레이건 대통령에 이어 백악관을 차지한 아버지 조지 부시는 사실상 당내에서 레이건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이었다. 1980년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아버지 부시는 레이건을 향해 “정치 애숭이인 레이건이 지나치게 극우적이고 비현실적인 정책을 갖고 있다”고 공격했고, 레이건은 부시를 향해 “타협적 실용주의 행태로 볼 때 부시가 진정한 공화당원인지 의심이 간다”고 대응했다.

예비경선에서 승리한 레이건은 본선승리를 위해서 본인의 (지나친 극우 이미지, 그리고 국정경험 부족의 영화배우출신이라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우선 워터게이트로 중도하차한 닉슨의 잔여 임기를 채운 제럴드 포드 전직 대통령을 지목했다.

당시 포드측의 협상대표인 앨런 그린스펀(경제대통령이라고도 불렸던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과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과도한 요구에 영입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레이건의 캘리포니아 사단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이비리그 출신이고 제 2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갖고 있는 데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지냈고 중국대사를 역임한 아버지 부시야말로 포드의 옵션이 사라지고 난 상황에서 레이건의 약점을 보완해 줄 최고의 적임자였다.

레이건 측은 부시를 싫어했지만 선거에서 이기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당시 그들은 부시를 부통령 후보로 영입하면서 내심 편치 않았다. 당시 캘리포니아의 레이건 사단은 부시가 상원선거에서 두 번이나 낙선한, 연방선거에서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인물이기 때문에 레이건 이후에 공화당 후보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란 것에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1980년 부통령 당선에 성공한 조지 부시는 8년간을 숨죽이며 시간가기만을 기다렸다. 전두환 씨 밑에서 자신의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노태우 씨와 같은 형편이었다. 그래도 노태우는 전두환과 쿠데타의 동지적 관계였지만, 레이건-부시의 관계는 '적과의 동침'이었다.

2001년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의 제임스 베이커 전 미국 국무장관. ⓒ연합뉴스


아버지 부시의 최고 정치파트너, 제임스 베이커

조지 부시가 부통령이 되고서 훗날을 기약할 수 있었던 최고의 무기는 그의 정치 파트너였던 제임스 베이커였다. 조지 부시는 부통령직을 걸고서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당시 공화당 최고의 전략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던 제임스 베이커를 레이건의 비서실장으로 보내는 데 성공하였다. 제임스 베이커는 백악관에서 부시가 8년동안 레이건의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중간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88년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측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레이건이 부시를 지지하도록 한 것은 전적으로 베이커의 공이었다.

드디어 친구인 조지 부시가 백악관을 차지하자 제임스 베이커는 꿈에 그리던 국무장관직에 올랐다. 현실주의자인 베이커는 레이건 행정부 외교안보팀의 거의 대부분을 현실주의자로 교체했다. 이에 따라 현재 외교안보 정책을 주도하는 신보수주의자들이 베이커로 인하여 당시 고위직에서 모두 보따리를 싸야만 했다.

제임스 베이커는 ‘미국의 힘은 시민사회의 가치를 전통 보수주의로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보수주의자였다. 상대를 소멸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강자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대화하면 결국엔 존중을 받게 된다는 정치철학을 갖고 있는 제임스 베이커는 '강자의 관대함과 포용이 세계평화의 희망'이라고 일관성 있게 주장했다.

91년 걸프전에서 승리하고 백악관은 전후 이라크에 대한 대책회의를 거듭했다. 국무장관인 베이커는 쿠웨이트에서 이라크를 몰아낸 전쟁 목적을 달성한 이상 더 이상의 인명피해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국방부 정책차관이었던 존 울포위츠 현 세계은행 총재를 대변했던 체니 당시 국방장관은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교체를 주장했지만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베이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스라엘의 항구적인 보호를 위해서는 후세인을 제거해야만 했던 울포위츠는 울분을 삼키며 훗날을 기약해야만 했다. 대량살상무기(WMD) 존재 유무와 관계 없이 2003년 이라크 전쟁을 벌여야 했던 체니와 럼스펠드 및 울포위츠의 입장을 여기서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베이커는 ‘미스터 픽스-잇’(Mr.Fix-it)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문제의 해결사’란 애칭이다. 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이끌어 냈고 2000년 대선 재검토 파동 때에는 플로리다주 공화당 대책본부장으로 대응전략을 지휘해 아들 부시가 대통령에 취임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본인의 별명처럼 2대에 걸쳐서 부시 행정부의 해결사 역할을 해온 베이커 전 장관이 중간선거를 코앞에 두고 곤경에 처한 '공화당 구하기'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공화당 내에서 우후죽순처럼 나오고 있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베이커 "북핵문제는 북-미 직접대화로 풀어야"

북한의 '제2차 핵실험'이 언급되고 있고 여기저기서 그 징후에 대한 언급과 보도가 잇따르면서 불안 가득한 나날이 연속되고 있다. ‘위기 넘기기 외교’의 이니셔티브를 놓지 않으려는 중국은 후진타오 주석의 특사를 북한에 보냈다. 일본과 대북정책을 공모한 강경전략을 위주로 아슬아슬한 북핵문제를 밀어붙이려는 미국의 콘돌리자 라이스 장관은 아시아를 순방하면서도 중국 특사를 통한 북한의 메시지에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고 있다.

유엔안보리의 북한 제재가 현실화 되면 상황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 도무지 앞이 안 보이는 오리무중의 형국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미국내의 2백만 한인동포를 제외하더라도 미국 시민사회는 인구의 절반이 훨씬 넘는 이들이 평화적 해결을 위해 미국이 북한과 직접 대화를 병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행정부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 정치거물 베이커 전 국무장관이 이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1992년에는 미국과 북한간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2백만 미주동포의 노력으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빌 클린턴 대통령의 특사로 평양에 보냈고, 그래서 마침내는 한반도에 평화공존이 시작됐다. 그 이후 정치의 실패로 지금의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최악의 상황까지 왔다.

지금 미주 동포들이 할 수만 있다면 '제임스 베이커'를 부시 대통령의 특사로 평양에 보내야 한다. 이는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에 대해 조금만 진지하고 신중한 사람이라면 이견이 없는 일이다. 평화적인 방법이어야 한다. 전쟁은 절대로 안 될 일이다.

필자 소개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 김홍국 기자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은 대학 재학시절 학내 군사훈련 거부투쟁 등을 벌이다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한인들의 정치 참여를 통한 권리 찾기와 한인들의 정치적 위상 높이기를 목표로 93년 뉴욕 등 미 동부 대도시에 ‘한인유권자센터’를 만들어 14년째 활동해온 대표적인 정치 비정부기구(NGO) 운동가다.

소수인종의 투표율은 누군가를 당선시킬 수는 없지만 집단적으로 반대투표를 해 누군가를 떨어뜨릴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투표율을 통해 미국사회에서 한인들의 정치력을 높여온 김 소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93년 당시 7%에 불과하던 한인들의 평균 투표율은 2004년 25%로 뛰어올랐고, 뉴욕과 뉴저지 지역의 한인들이 시장과 의회의원으로 출마해 속속 당선하는가 하면, 미국의 상원과 하원의원들이 한국어 정치광고를 할 정도로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

김 소장은 이같은 정치적 기여에 따라 지난 2004년 대통령선거 당시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의 대통령 후보선출 전당대회에 전례 없이 초청을 받는 등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한국인 출신 시민운동가로 꼽히고 있다.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댓글이 1 개 있습니다.

  • 8 5
    해골단

    미국도 종말이 가까웠다
    3류인간들이 나대는거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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