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의 범인인 김현희(47) 씨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피해자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씨 가족이 11일 오전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BEXCO)에서 극적으로 만났다.

KAL기 폭파사건이 발생한 지 22년 만이고, 다구치 씨가 납치된 지 31년 만이다.
일본 정부는 다구치 씨가 1978년 북한에 납치된 뒤 2년 가량 김현희 씨와 함께 살면서 일본어를 가르친 이은혜라는 인물인 것으로 보고 있다.

김현희 씨는 이날 다구치 씨의 장남 이즈카 고이치로(飯塚耕一郞·32) 씨, 오빠인 일본 납치피해자가족회 대표 이즈카 시게오(飯塚繁雄·70) 씨와 공개적으로 만났다.

김 씨가 공개석상에 나타난 것은 97년 전국 공안검사를 대상으로 한 특별강연 이후 12년 만이다.

검은색 바지정장 차림에 짧은 머리를 한 김 씨는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를 하며 면담장으로 들어섰고, 4분가량의 공개면담과 90분간의 비공개 면담후 다구치 씨 가족과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입장과 소회를 밝혔다.

김현희 씨는 "KAL기 사건은 북한이 한 테러고, 저는 가짜가 아니다"라며 일각에서 제기된 사건 조작설을 일축했다.

'참여정부 때 KAL기 사건의 진상을 왜곡하려는 시도가 있었느냐'는 취지의 질문에는 "그런 일이 있었다"면서도 구체적인 언급을 피한 채 "현 정부의 조사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김 씨는 다구치 씨와 관련, "87년 1월부터 10월까지 북한초대소에서 생활하며 들은 것은 '다구치 씨를 어디로 데려갔는데 어디 갔는지는 모르겠다'는 것이었다"면서 "사망한 게 아니라 다른 곳에 간 것으로 생각했고, 86년에 결혼시켰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또 다구치 씨의 장남 고이치로 씨에 대해 "어머니를 많이 닮아 핸섬하다"면서 "제가 아들을 만난 것을 알면 다구치 씨가 얼마나 기뻐할까 생각한다"고 말해 다구치 씨가 이은혜임을 재확인했다.

일본 정부는 김현희 씨로부터 확보한 다구치 씨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그동안 "다구치 씨가 1986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유골은 호우로 유실됐다"고 설명해온 북한에 해명을 요구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씨는 지난 1월 NHK 등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구치 씨의 가족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다구치 씨의 가족도 이를 수용하자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면담성사를 위한 협력을 요청해 이날 면담이 이뤄졌다.

김현희 씨는 KAL기 폭파사건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고, 1990년에 특별 사면됐다.

이후 책 집필이나 강연 등의 활동을 하다 전직 안전기획부(현재는 국가정보원) 직원과 결혼한 1997년 12월 이후 공식활동을 전면 중단했고, KAL기 폭파사건 조작설을 담은 소설이 출간된 2003년 말부터 은둔생활을 해왔다.

국정원과 경찰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벡스코에 폭발물 탐지능력을 갖춘 경찰 특공대를 비롯한 정예 요원을 배치하고, 3중의 경비망을 설치하는 등 삼엄한 경비작전을 폈다.

이날 면담장에는 내외신 기자 110여명이 몰려 열띤 취재경쟁을 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