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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5.18 당시 자위권 발동 주장"

군 과거사위 조사결과 발표,"5.17계엄확대 사전에 계획"

5.18 진상을 조사중인 국방부 과거사위원회(위원장 이해동)가 군의 발포가 있었던 1980년 5월21일 군 수뇌부 대책에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자위권 발동'을 강조한 문서를 발굴, 전씨가 발포 사태의 책임자임을 우회적으로 지적했다.

신군부 5.18 당시 '자위권 발동' 논의해

국방부 과거사위원회는 24일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 "1980년대 초반부터 계속된 '충정훈련'을 통해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불순분자 또는 적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5.18 이후 상부의 강력대처 명령이 과격진압의 배경이 됐다"고 밝혔다.

과거사위의 발표에 따르면, 최대 핵심사항인 군의 발포와 관련, 당시 군 수뇌부는 '자위권 발동'을 논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5월 21일 수기로 작성된 문서에는 주영복 당시 국방장관실에 주 장관, 이희성 육군총장, 진종채 2군사령관,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차규헌 육사교장이 참석했다.

특히 문서에는 '전(全) 각하(閣下:전두환):초병에 대해 난동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명기돼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자위권 발동을 주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사위는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대가 계엄군을 향해 먼저 총격을 가했다는 주장을 입증할 만한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다"며 "같은 날 오후 1시경 계엄군의 발포 후 계엄군에 의한 조준사격이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지만 5월 21일 발포를 직접 명령한 문서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기욱 과거사위 부위원장은 전두환씨에 대해 "그동안 검찰조사에서 군 상층부에 대한 조사는 충실히 했다"며 "그러나 과거사위가 조사권이 없는 상태에서 당사자가 거부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전두환씨는 삼청교육대 사건 조사 때도 조사를 추진했는데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며 전씨의 비협조를 비판했다.

그는 "실제 전두환씨와 관련된 메모도 하나 밖에 없다.(진종채 2군사령관 행적과 작전지침 문서 가운데, `전두환:초병에 대해 난동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는 부분) 그 부분은 조사권한이 있는 진실.화해위에서 조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며 "발포에 참여했던 11공수여단 장병들을 면담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제대로 열지 않았다"고 밝혔다.

당시 발포 상황에 대해서도 상세한 조사가 이뤄졌다. 과거사위 발표에 따르면 계엄군은 5월 23일 광주-화순간 15번 국도에서 미니버스에 총격을 가해 버스에 타고 있던 민간인이 대부분 사망했고 사망자 가운데 2명의 여성은 대검으로 찔린 흔적이 발견됐다.

또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의 지휘권에도 혼란이 있어 5월 19일 광주시 계림동에서 발생한 11공수여단의 발포에 대해 전투교육사령부나 31사단은 발포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했고, 다음날 광주역 앞에서 일어난 제3공수여단의 발포에 대해 전투교육사령부나 31사단이 파악을 했지만 발포를 막기 위한 추가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또한 작전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5월 24일 하루에만 계엄군 간에 두 차례의 오인사격이 발생하기도 했다.

5.18때 광주에서 시민들을 구타하고 있는 계엄군들. ⓒ연합뉴스


최규하, 12.12 반란후 날짜 조작해 반란 추인

과거사위는 또 12.12 군사반란과 관련, 보안사에서 감청기록을 토대로 작성한 '12.12 상황일지'를 최초로 입수해 당시 상황을 분석했다.

자료에 따르면 합동수사본부는 처음부터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이건영 3군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을 연행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최규하 대통령과 노재현 국방장관은 12월 13일 오전 5시에 이에 서명하면서 날짜를 12월 12일로 소급해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 대통령 등이 전두환 군부의 지시에 따라 사후에 날짜를 조작하면서까지 군사반란을 추인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신군부,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 계획 사전에 수립"

과거사위는 또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관련해선 "신군부가 사전에 계획을 수립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육군본부 작전참모부도 '학생시위 대처방안'에서 4단계로 계엄군 투입을 계획했다"고 밝혔다.

과거사위에 의하면, 5월 8일 긴급 계엄위원회 개최 이전에 5월 17일 계엄군 투입을 계획했고, 실제로 공수부대가 이동했다. 이에 따라 대학의 휴교령과 포고문 발포, 예비검속 등이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발표되자마자 동시에 이뤄졌다.

과거사위는 "따라서 학생들의 시위로 사회가 혼란해 이에 대처하려고 군이 나섰다는 신군부의 주장은 거짓 주장"이라고 밝혔다.

"보안사에 의한 민간인 사찰 '청명계획'이란 이름으로 마련돼"

보안사에 의한 민간인 사찰의 새로운 내용도 밝혀졌다.

지난 90년 '윤석양 이병 양심선언'으로 드러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행위와 관련, 과거사위는 "보안사는 89년 3월 20일 노태우 대통령의 중간평가 유보와 같은 달 25일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계기로 조상된 공안정국을 국가위기 상황으로 판단, 89년 4월 '청명계획'이라는 이름으로 계엄대비계획을 마련했다"며 "이에 따라 보안사 3처 6과 윤모 계장과 3처 3.5.7과 인원 6명으로 '청명 TF'가 구성돼 4월 27일~6월 20일까지 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 주요인사 9백23명에 대해 4천9백여쪽 분량의 '청명카드'를 작성했다"고 밝혔다.

이 청명카드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 법적 근거 없이 여러차례 실시된 예비검속을 위한 체포카드였으며, 향후 민간인 사찰 자료의 토대가 됐다.

보안사 3처 6과 분석반은 또 '청수'라는 명칭으로 89년 5월부터 1천3백여명의 주요인사에 대해 공개된 자료와 예하 보안부대의 '동향관찰보고서' 등을 바탕으로 90년 10월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이 있기 전까지 '개인별 신상자료철'(청수카드)를 작성, 관리하며 민간인 사찰을 실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청수카드에는 별도 관리된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빠졌고, 지난 90년 윤석양 이병이 사찰카드를 빼내 공개한 노무현 대통령과 이강철 대통령 비서실 정무특모, 문동환, 박현채 등 4명에 대한 사찰카드는 누락돼 있다.

이해동 과거사위원장 "그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때 우리 역사 바로 서"

이해동 위원장은 이같은 조사결과를 발표하며 "5.18 민주화운동 관련 당사자나 유족, 관련단체 등의 입장에서 볼 때 오늘 조사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수도 있다"며 "하지만 오늘 발표는 군 스스로 자기고백적 진상조사 결과를 국민 앞에 내놓는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과거사위 권한의 한계와 능력부족으로 명쾌히 밝혀내지 못한 부분에 있어서는 앞으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를 비롯, 모든 관계기관이나 국민의 힘으로 밝혀내야 할 공동의 과제로 남아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조사과정을 보면서 12.12 쿠데타, 5.17 전국비상계엄확대, 5.18 민주화운동 진압 등을 획책한 장본인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때 우리 역사가 바로 서는 그날이라고 생각한다"며 "동시에 그들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우리에게 남아있다. 그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때 우리 역사가 바로 서고 민족의 쓰라린 상처가 치유될 수 있으며 화해가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과거사위는 현재 현재 신군부에 의한 언론통제 사건과 10.27 법난 사건, 간첩조작 의혹사건 등을 조사하고 있고, 오는 10∼11월께 이들 사건 조사를 마치고 활동을 종료할 예정이다.
이영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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