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이 다수당이었던 지난해까지 하원외교위원장은 한국전쟁 참전경험을 자랑하는 '헨리 하이드'였다. 헨리 하이드 의원은 지난해를 마지막으로 정계를 은퇴했지만 34년 하원에서 활동하는 동안 한국과 관련해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각별한 애정을 늘 표현해 왔었다. 2006년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사건으로 노무현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에 당시의 한미관계 분위기를 감안해서 하원외교위원장(당시엔 국제관계위원회 라고 했는데 2007년부터 하원에선 그 명칭을 외교위원회로 바꾸었다) 자격으로 '노무현 한국대통령 환영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발표하기도 했었다.
지난해 하원결의안 759번으로 상정되었던 '일본군위안부결의안' 이 단지 58명 의원 지지로 상임위를 전격통과 될 수 있었던 것은 헨리 하이드 상임위원장이 처음부터 의지를 갖고서 외교위원회 의사일정에 기습적으로 상정. 통과를 시켰기 때문이었다. 결의안이 해당 상임위를 통과하면 상임위원장은 전체회의에 올려서 통과되도록 하는 데에 전적인 책임을 갖게 된다. 지난해엔 상임위원장과 하원의장간 이견이 좁혀지지가 않았었고 중간선거전에 다수당이 초조하게 휘말리면서 그냥 폐기가 되고 말았었다. 따라서 모든 결의안은 상임위통과에 그 노력을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올해 들어서 '일본군위안부결의안'을 추진하면서 '탐 랜토스' 하원외교위원장이 목표였으며 그가 지금까지 '벽'이고 '산'이었다. 그를 직접 만날 수 있는 방도. 그것이 종군위안부결의안 하원 통과를 위한 최대의 스트레스였다.
랜토스 위원장은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권과 평화 잇슈에선 누구보다도 앞장서는 워싱턴 정가의 인권 챔피언(Human Rights Champion)이지만 미국의 유태인답게 이스라엘과 관련해선 네오콘들의 외교정책과 궤를 늘 같이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민주당의 지도급 정치인이지만 상원의 조지프 리버맨과 똑같이 부시의 이라크전쟁을 적극 지지했었다.
지난해 중간선거를 거머쥐고 하원의장에 오른 '낸시 펠로시'는 전쟁에 대한 입장을 이유로 랜토스의 외교위원장직을 반대했었다. 그러나 AIPAC 의 로비력에 의해서 결국엔 랜토스가 외교위원장이 되었다. 지난 3월 11일 2007년 AIPAC Policy Conference가 DC의 컨벤션 센타에서 열렸었다. 필자는 AIPAC의 각종 프로그램에 늘 참가하는 거의 고정회원이었다. '시민로비'에 관해서 AIPAC으로부터 열심히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랜토스 위원장은 미국의회내 유일한 홀로코스트 생존자이며 AIPAC이 자랑하는 유태계 정치인이다. 더구나 그가 외교위원장에 올랐으니 AIPAC은 온통 "랜토스" 환호였다.
필자는 작은 랜토스 라고 불리우는 뉴욕주 출신의 유태계 하원의원인 '엘리옷 엥겔'에게 부탁해서 랜토스를 약 20초 정도 복도에서 서서 만났었다. 일본군위안부 관련한 하원 결의안을 설명했고 그는 좋은 일이라고 웃으면서 반응를 보였다. '엘리옷 엥겔'의원은 필자가 자기 지역구에서 유권자활동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적극적이었고, 그래서 그가 랜토스의 수석보좌관을 만나라고 소개해 주었다. 그 보좌관이 필자에게 100명의 지지서명을 받으라고 했고,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 이란 중요성 때문에 쉽지 않으니 웬만하면 포기하라는, 그래서 거의 불가능한 숫자를 말했던 것이었다. 우리가 100명을 넘긴 것을 알고 그 보좌관이 그렇게 설명해서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100명의 숫자가 와전되어서 한국의 미디어엔 위험스럽게도 " ... 랜토스가 100명의 지지의원을 확보하면 처리할 것을 약속했다..." 그렇게 보도가 되었는가 하면 지난 5월23일 첫 번의 일정에 누락된 것을 갖고서 " ...랜토스위원장의 마음이 일본로비로 인하여 변했다..." 는 식의 그런 보도가 신중치 못하게 나가게 되었다. 한국내에 언론보도된 내용까지 모두 취합해서 의회안으로 돌리는 일본로비스트의 활동에 필자는 정말로 마음 졸이며 지내왔다.
지난 5월10일 뉴욕서 대형 버스를 대절해서 워싱턴으로 대대적인 로비활동을 펼쳤다. 114명을 하루만에 127명으로 늘렸다. 혼다의원이 요청한 120명을 드디어 넘겼다. 결의안을 상정한 혼다의원이 직접 나서서 챙기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한숨 놓게 되는 시점이었다. 당일 외교위원회의 고위관계자가 5월23일을 귀뜸해 주었었고 그래서 필자는 뉴욕으로 돌아오는 길이 정말 가벼웠었다.
워싱턴서 뉴욕의 중간 정도 오고 있는데 뉴욕의 직원이 큰일 났다는 전화가 왔다. 한국미디어에 '5월23일'이 떴다는 것이다. 랜토스쪽 관계자가 23일을 언급하면서 확정되어 공개될 때까지 일정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각별하게 주의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기에 필자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당황했다. 보통 양당의 관계자가 충분히 논의를 거쳐서 공개가 될 때까지 의사일정은 대단히 민감하다. 결의안을 추진하는 사람들에겐 고가의 상품이기 때문에 양당이 서로 경쟁을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확정전에 공개가 되면 이를 저지하려는 일본측 로비스트들이 손을 쓰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엔 5월23일이 긍정적으로 논의되다가 공개된 것에 대한 양당 보좌관들간 책임공방으로 그만 일정에서 빠지고 말게 되었다.
사실인즉 이런데 한국내 미디어는 갖은 추측의 기사들을 쏟아내었다. 계속해서 모금을 하고 주류언론에 광고를 내고 서명운동을 그대로 유지해서 통과가 될 때까지 밀어부쳐야 하는데 이 운동이 그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서 5월말로 접어들면서 소강상태로 빠져들었다. 가장 무서운 장애물이 생긴 것이다. 아무리 한인언론을 통해서 설명을 해도 한국내 언론에 보도된 것의 영향을 극복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12월까지 매달 일정이 있고 이제 첫 번째 일정이 지났는데 왜 이런 분위기에 빠졌는지 너무나 답답했다.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선 혼다 의원과 랜토스 위원장을 직접 만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6월1일 뉴욕서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상황을 소상히 설명했다. 우리의 목표는 하원의원의 과반수인 220명 지지서명을 목표로 더욱 밀어부칠 것이고 혼다의원과 외교위원장인 랜토스 의원을 상대로 직접 나설 것이라는 점도 밝혔다. 이를 위해 미국 전역의 한인교회에 이것을 위해서 나서줄 것을 요청하기로 했다. 미국내 한인교회가 2004년 북한인권 법안을 위해서 나섰던 것의 백분의 일만 관심을 표해주어도 정말 수월하겠다는 평소의 생각을 언론을 통해서 호소했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로 인하여 한국기독교가 얼마나 수치를 겪었는가...생각하면 교회가 가장 먼저 나설 것이란 기대가 애초부터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소강국면의 이 운동을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서 6월7일 다시 한차례 워싱턴 로비를 감행했다. 6월7일 워싱턴을 다녀오고서 130명이었던 지지서명 의원의 숫자가 140명으로 늘었다. 우연히도 마이크 혼다 의원을 의원회관 카페테리아에서 만났다. 우리의 로비활동을 보고서 혼다의원은 필자를 가까이 불러 어깨동무를 하고 작은 소리로 ' 6월을 기대해도 되겠다 ' 하고, 뉴욕서 간 로비팀에게 좋은 일은 언젠가는 꼭 성사된다고 그렇게 인사하였다. 혼다의 6월 언급이 평소와 달랐다. 필자는 누군가 들었을까...두리번 거리기까지 했다.
내친김에 외교위의 랜토스 사무실을 ?O았다. 외교위 보좌관은 필자에게 랜토스위원장이 6월16일 주말에 LA를 방문한다면서, 그런데 랜토스위원장이 오전에 LA에 도착 하는데 공식일정은 저녁 7시라고 아주 중요한 정보(스케쥴)를 알려 주었다. 그 자리에서 필자는 LA의 121 추진연대에 무조건 랜토스를 초청할 것을 준비하고 지역구에 알리라고 했다. 그로부터 3일 만에 랜토스 위원장이 한인커뮤니티와 만나겠다는 것을 확답 받았다. 이것은 사건이었다. 이때만큼 "지성이면 감천이다"란 말을 실감한 적이 없다. 그의 위치를 생각해서 우리 하고만 만나는 일은 정말로 큰 기회였다.
워싱턴DC를 경험한 사람에겐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121 결의안이 아니고도 랜토스 하원외교위원장을 별도의 장소와 시간에 그것도 2시간을 보장 받으면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굉장한 일인 것이다. 인권문제에 있어서 가장 앞서있는 하원의원에 집중해야 하겠고, 이틈에 한인들이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알도록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서 전국의 121 결의안 활동가들과 협의를 했다. 뉴욕과 워싱턴, 그리고 LA의 121결의안 추진 한인대표들이 랜토스를 만날 준비에 진력했다. 그가 홀로코스트 생존자라는 그런 그의 경험을 최대한 존중하고 한인들이 인권과 평화에 관련해서 그에게 거는 기대가 각별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보여줘야 하고 세계의 인권과 평화를 위한 랜토스 위원장의 노력에 한인들이 최대한 지지를 보내고 참가를 하겠다고 그렇게 준비를 하기로 했다.
랜토스위원장이 지난 16일 LA에서 한인언론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갖고 26일 종군위안부결의안을 안건으로 상정하겠다고 공표하고 있다. ⓒ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6월16일 LA의 한인타운 가운데 위치한 월셔 플라자 호텔에서는 121 전국연대가 주최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 자리는 하원 국제위원회 의장인 탐 랜토스 의원과 부인인 아네트 랜토스(Annette Lantos)가 함께 참석하여 인권을 위한 랜토스 위원장의 활동과 의회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자리는 캘리포니아 121연대를 주축으로 뉴욕과 워싱턴의 121 추진연대 대표들이 함께 참석하였다. 추진연대는 그동안 인권을 위하여 활동을 해온 랜토스 의원의 활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유태계 헝가리 이민자이면서 오늘날 미 하원 외교위원장으로 정치적 성장을 한 랜토스 의원의 활동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랜토스 의원은 자신의 부인이 평생 동안 자신을 보좌하면서 인권에 관련된 활동을 나서서 해준 것이 큰 힘이 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들이 나치의 폭압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을 회상하면서 그것이 자신들이 인권을 위하여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달라이 라마와 아웅산 수지여사 등을 지원하기 위한 활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참가한 한인들은 몰랐던 랜토스 의원의 인권활동과 의지를 지지하면서 “인권의 챔피온! 랜토스!”라고 하면서 기립박수를 쳤다. 많은 질문과 대답 속에서 랜토스 위원장은 그동안 한인들이 주축이 되어 추진해온 121결의안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6월 26일에 121 결의안을 하원 외교위원회에 상정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여 참가한 관계자들로 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한편 행사 이후 랜토스 의원은 한인언론과 기자회견을 자청해서 121 결의안을 반드시 상정하겠다는 발언을 다시 반복하였고, 자신은 계속해서 세계 여러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인권을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겠다는 발언을 하였다. 우리는 랜토스 위원장과의 처음 만남이기에 '121 결의안' 관련해서 지나친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지만 오히려 위원장이 먼저 결의안에 관해서 언급을 했고 결국엔 우리가 6월26일 외교위원회 통과를 약속받은 것이다.
마이크 혼다 의원이 1월31일 종군위안부결의안을 상정한 데 이어 전국적인 서명운동에 돌입했고, 2월15일 청문회를 개최해서 미디어를 우리 편으로 만들었다. 이어 전국의 한인동포들을 조직해서 지역구 정치인들을 접촉, 워싱턴 로비활동을 통해서 140명의 하원의원의 지지서명을 받아냈다. 일본측의 저지로비를 막아내기 위해서 동포들의 코묻은 돈을 모아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즈>에 전면광고를 게재했으며 의회신문인 <힐>과 <롤콜>에 반복해서 광고를 냈고, 의원실을 직접 방문해서 로비활동을 전개 하였다. 무지막지하게 접근하여 동의할 것을 강요하는 새로운 방식의 로비라고 지금은 하원의원들 간에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워싱턴에 로비스트도 없었고 그곳을 오갈 경비도 충분치 않았다. 엄청난 액수의 광고료를 모금하느라 밤낮을 뛰었다. 그러면서 일본의 저지전략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철저하게 미국시민의 입장을 확고히 했다. 유권자를 당할 로비스트는 없었다. 26일 상임위를 통과한다 해도 전체회의의 의결이 남아있게 된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그동안 수차례 지지의사를 표했지만 전체회의에서 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리기 전까지 조금도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되겠고 지금까지의 노력을 조금도 멈추어서는 인될 것이다. 미주동포의 결집된 정치력으로 인권을 지키고 평화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이 지난 7일 미 의회에서 7일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이 마이크 혼다의원을 만나 종군위안부결의안의 통과를 당부하고 있다. ⓒ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겸 본지 편집위원은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한인들의 정치 참여를 통한 권리 찾기와 한인들의 정치적 위상 높이기를 목표로 93년 뉴욕 등 미 동부 대도시에 ‘한인유권자센터’를 만들어 14년째 활동해온 대표적인 정치 비정부기구(NGO) 운동가다.
한인들의 정치력을 높여온 김 소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93년 당시 7%에 불과하던 한인들의 평균 투표율은 2004년 25%로 뛰어올랐고, 미국의 상원과 하원의원들이 한국어 정치광고를 할 정도로 한국의 위상을 높임에 따라 워싱턴 정가에서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한국인 출신 시민운동가로 꼽히고 있다. 최근에는 미하원의 '종군위안부 결의안' 통과와 한국국민 비자면제프로그램(VWP) 성사를 위해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