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니시'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할복자살로 최후를 마친 일본군 해군중장이다. 오오니시는 1945년 8월16일 새벽 2시에 해군사령부 장군관사의 방 한가운데에 하얀 자리를 깔고 그 한 가운데에 누워 일본군도로 자신의 배 한가운데를 십자형으로 갈라서 자결하였다. 할복 후 15시간 동안 살아있던 오오니시는 카미카제 자살특공으로 죽어간 청년들과 유족들에게 사죄의 유서를 남겼는데, 일본전사에서 유명하게 회자되는 유서이다. 1인승 항공기에 폭탄을 싣고 상대의 항공모함이나 기타 목표물에 돌진하여 산화하는 자살 특공대 카미카제를 창설한 자가 바로 이 '오오니시' 이다.
1941년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초전을 화려하게 장식했지만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연합군에게 전세를 넘겨주게 되었고 급기야는 1944년 10월25일 그 유명한 자살특공대 카미카제를 투입하기에 이르렀다. 패전 후 일본 극우세력의 군국주의자들에게 이 '오오니시' 장군은 전설적인 영웅이 되었다.
'오오니시'의 정신을 충실히 이어받아서 일본을 위하여 장렬하게 죽을 것을 결심하여 카미카제 특공대에 자진 지원했던 '센 게시추'란 군인은 그의 출격명령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3일 후였기 때문에 극적으로 살아났다. 카미카제 특공자살로 죽어간 3천5백명의 목숨에 늘 빚진 생각에 살아오던 80세 고령의 '센 게시추'가 지금 워싱턴에 '종군위안부결의안' 저지공작에 특공대로 투입되었다.
지난 5월11일, 워싱턴 DC의 의회 의원회관인 레이번 빌딩 외교위원회 회의실에선 '가토 료조' 주미 일본대사가 주관하는 ‘의원초청 일본식 다도회(茶道會)’가 열렸다. 이 회의실은 불과 3달전에 일본군 강제 종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청문회가 열렸던 곳이다. 가토 대사는 청문회가 열렸던 이 회의실에서 하원의원들을 초청해서 일본의 다도(茶道)에 깃들인 ‘평화와 조화’(Peace & Harmony)를 소개하려는 시도를 했다.
일본식 다도의 명인인 카미카제 특공대 출신의 '센 게시추'가 탐 랜토스 외교위원장 부부 앞에서 자신이 카미카제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을 랜토스 위원장이 홀로코스트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것과 비교하면서 일본의 차(茶)에 관해서 소개를 하였다. 랜토스 위원장은 "자살특공대가 그렇게 살아나서 지금은 워싱턴에 와서 세계의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로 믿을 수 없는 모순(Clash)"이라고 힐난했다.
이날 가토 일본 대사는 마이크 혼다 의원을 포함한 20여명의 의원들을 초청했지만 랜토스 위원장과 또 다른 한명의 의원만이 참석했다. 꼭 일주일전에 가토 대사는 랜토스 위원장과의 면담을 요청했었는데 거절당했었다. 두 번째 요청인 관계로 이를 거절하기 힘든 랜토스 위원장이 잠시 참가했다가 자리를 떴다고 한다.
꼭 3달전인 지난 2월15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한맺힌 절규가 미국 전역으로, 그리고 세계 도처로 울려퍼진 바로 그 회의장에서 카미카제 특공대 출신의 일본 전통다도 명인이 나와서 미국 의원들을 상대로 정중하게 굽신굽신 절을 하면서 평화를 강의하는 어처구니 없는 해프닝이다. 결의안을 저지하려는 아베 권력도 일본 정부도 로비스트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별의별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하고 있다.
일본정부 본국으로부터 하원에서의 '종군위안부결의안' 통과를 저지할 것을 강하게 훈령 받고 있는 '가토 료조' 대사는 여의치 않으면 우선 표결을 연기라도 시키려고 방법을 모색 중이다. 일본측은 마이크 혼다 의원으로부터 결의안이 상정되었을 때인 회기 초반엔 감히 자기들의 로비력을 당할 수는 없겠다고 정말로 방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기습적인 청문회 개최에 놀랐고 한인들의 풀뿌리 정치력에 의해서 결의안을 지지하는 의원들의 숫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에 크게 당황하였다.
결의안을 추진하는 태스크 포스가 뉴욕에 있다는 것을 일본측이 알아 차렸을 때는 결의안을 지지하는 의원이 이미 70명을 넘어선 때였다. 필자에게 일본 <TV아사이> 워싱턴지국이 처음으로 접촉을 해 온 때가 우리가 72명의 의원을 확보했던 부활절 휴회직전인 3월29일이었다.
워싱턴에 있는 미 의회를 방문해 종군위안부결의안 서명 요청에 나선 한인동포들. ⓒ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연방의회에서 '인권과 평화'에 관련한 초당적인 결의안은 보통 30명의 지지서명 의원이 확보되면 통과가 충분하다. 이익단체의 이해관계가 있는 결의법안은 50명이 지지 서명하고 로비스트를 동원해서 통과를 시키는 것이 통례이다. 그래서 필자는 결의안 하원 통과를 위하여 전략을 짜고 기획을 하고 조직을 궁리하면서 70명의 의원확보를 목표로 했었다. 청문회를 통해서 잇슈를 달구었고 갖가지 정보와 자료를 미디어에 쏟아 부어서 여론을 형성하였다. 급기야는 <LA타임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가 동시다발로 사설에서 일본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에 비례해서 일본측 로비스트들의 방어도 만만치 않게 되었다. 유권자 2만 여명의 서명부를 전달하는 자리에서 외교위원회 고위 관계자가 결의안 지지서명 의원을 1백명 이상은 확보해야 한다는 귀띔에 정말로 크게 당황했었다. 의회 결의안 통과를 위해서는 육상 1백미터의 10초대를 비유해서 1백명의 지지의원을 확보하는 것을 "마의 1백명대" 라고 불릴 정도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필자에겐 황당한 말이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겐 말도 못하고 그냥 최선을 다 하자고만 했다.
그래서 뉴욕의 로비팀을 4회에 걸쳐서 워싱턴으로 이끌고 진입했다. 경찰에 쫓기면서 의원뱃지만 보이면 달려가서 바짓가랭이를 잡고서 애걸복걸했다. 뉴욕과 워싱턴을 오갈 차비 마련도 어려운 빠듯한 재정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자비와 동포 모금을 각출해 의회신문에 전면광고를 퍼부었고, 모두들 의원실을 발이 닳도록 찾아 다녔다. 아베 총리가 워싱턴 DC를 방문했을 때 드디어 1백명이 넘었고 뉴욕의 로비팀이 5번째 워싱턴을 찾았을 때인 지난 5월10일엔 하루에 16명의 의원으로부터 서명 약속을 받았다.
뉴저지 포트리에 있는 한 노인아파트에선 10여명의 한인노인들이 대거 참가를 했다. 의사당 앞에선 5명이상 모여 있으면 안 되고 동시에 멈추어 있어도 안 되고 또한 의원들의 진로를 방해하면 경찰에 체포가 되는 규율이 있다. 할머니들 4, 5명씩 조를 짜서 목에는 "위안부에 관한 진실(The Truth about Comfort Woman)"이라고 쓰여진 적당한 크기의 피켓을 걸어 드렸다. 한조가 너무 오랫동안 걸어서 지치면 다른 조를 교대 시키고...그렇게 3팀을 운영했다.
의원회관에서 의사당으로 통하는 의원들 전용통로의 길목에서 이렇게 하루종일 버텼다. 봄날이 되다보니 의원들이 지하통로를 이용하지 않고 지상 보행통로를 이용하는 것에 착안한 것은 상황을 호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몇 달 동안 면담신청해도 한번 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인 의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신호등을 건너오는 의원들의 손에 노란색갈의 전단지가 보이면 뒤로 접근해서 결의안 121 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의사당 건물 입구까지 단 2분동안 설득하여 답을 받아야 한다.
걸어가는 의원의 진로를 방해 한다고 서너차례 경고를 받으면서까지 포기할 수가 없었다. TV 카메라를 든 동료가 따라 붙으면 의원은 정중해지고 대답이 부드러워진다. 아무도 시도한 적이 없는 로비방식이다. 정상적으로 의원을 직접 만나려면 최소한 한 달 전에 면담 요청을 해야 하고 그것도 의원을 직접 만나는 약속은 어림도 없다. 잘 되어야 보좌관이다. 보좌관과는 백날 이야기 해 봐야 의원에게 "표가 생기거나 돈이 생기는 일"이 아니고는 요청한 답을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세 번째 로비때엔 한인 신문사의 한사람을 대동하고 그에게 무비 카메라를 들게 했다. 의원실에 들어가서 무조건 의자에 앉았다. 지역구민의 서명부를 전달하기 위해서 지역 언론과 함께 왔다고 했다. 안에 의원이 있는 것이 확인되면 보좌관에게 의원이 있는데도 만나질 못한 사실을 지역구에 가서 지역 언론에 보도한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선거때에 반대운동을 한다고 협박을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덕분에 4명의 의원을 직접 만나서 지지서명을 받기도 했다.
지역구에서 결의안 지지를 청원하는 서명을 받아서 그 서명부를 들고 의원실을 방문하는 거기까지는 보통 누구나 다 한다. 거기서부터 의원의 지지서명을 받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의원을 직접 만나서 약속을 받아도 그 보좌관이 그것을 처리해 주지 않으면 그것도 큰 문제이다. 의원의 지시를 받아서 그 담당 보좌관이 결의안을 상정시킨 의원 사무실에 이메일이나 우편으로 통보를 해 주어야 한다. 정말로 의원 한명이 얼마나 어렵고 소중한지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의원으로부터 또는 의원실로부터 동의를 약속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그 의원(사무실)의 ‘스토커’가 되어야 한다. 귀찮게 해야 결국엔 마무리가 된다. 길거리에서 따라 붙고, 자신의 사무실로 찾아가서 보좌관을 만나라고까지 해도 명함을 요구하니까 성질을 내는 사례도 있었다. 그 의원은 자신의 전화기로 결의안 번호를 눌러서 직접 지지 통보를 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의원이 이렇게도 서명을 보낸다" 라고 말해 그런 방법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종군위안부결의안' 지지를 서명한 의원수가 1백22명(5월11일 현재, 현지시간)이다. ‘마의 1백명벽’을 훨씬 초과해서 우리 스스로도 놀라고 있다. 1백명을 확보한 필자에게 '마이크 혼다' 의원은 20명만 더 되면 이 결의안의 통과를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이 지난 4월26일이었다.
지난 2002년 어느 결의안이 2백10명을 확보하고도 폐기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1백% 확언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 만 5개월째 숨 쉬는 모든 시간을 여기에 집중한 댓가가 이제 서서히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다만 연방의회 최고의 거물인 일본계의 '이노우에 상원의원'의 움직임이 두렵기는 하지만 의원 1백20명이면 미국시민 7천8백만 명의 요청인 결의안이다. 분명한 것은 미국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결의안 통과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군위안부결의안'이 미주동포의 힘으로 기필코 연방하원 결의안으로 통과될 것에 확신하고, 역사속에서 참혹한 고통을 받으신 할머니들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해드릴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원한다.
필자
김동석(오른쪽) 소장이 5월초 미 의회앞에서 앨라배마주의 4지역구 로버트 애더홀트 의원을 만나 종군위안부결의안에 서명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겸 본지 편집위원은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한인들의 정치 참여를 통한 권리 찾기와 한인들의 정치적 위상 높이기를 목표로 93년 뉴욕 등 미 동부 대도시에 ‘한인유권자센터’를 만들어 14년째 활동해온 대표적인 정치 비정부기구(NGO) 운동가다.
한인들의 정치력을 높여온 김 소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93년 당시 7%에 불과하던 한인들의 평균 투표율은 2004년 25%로 뛰어올랐고, 미국의 상원과 하원의원들이 한국어 정치광고를 할 정도로 한국의 위상을 높임에 따라 워싱턴 정가에서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한국인 출신 시민운동가로 꼽히고 있다. 최근에는 미하원의 '종군위안부 결의안' 통과와 한국국민 비자면제프로그램(VWP) 성사를 위해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