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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선주자들이 클린턴에게 배울 점

[김동석의 뉴욕통신] 클린턴의 '국민과의 고통공감 능력'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능가할 사람이 없다. 극우 테러분자에 의해 자행된 1995년 4월 오클라호마 주 연방 건물 테러 폭파 사건은 클린턴에겐 정국 주도권을 쥐게 될 절호의 기회였다. 클린턴 참모들은 당초 이 사건을 공화당의 극우적 성향과 하나로 묶어서 공화당을 규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클린턴은 참모들의 뜻을 묵살했다. 현재 <ABC방송>의 시사프로 앵커로서 백악관 대변인을 맡고 있던 조지 스테파노폴로스는 "클린턴이 준비한 연설문을 무시하고 즉홍적으로 국민담화를 발표하는 것을 보고서 지옥을 넘나드는 기분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클린턴의 즉홍적인 연설은 한마디로 감동적인 애도사였다. 그의 연설을 들은 국민들은 잠시나마 그들 공화당과 대립하고 있는 민주당 대통령으로 보지 않고 대공황 시절 국민들의 민생을 가슴으로 이해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처럼 국민의 아버지 같은 존재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 연설 직후의 조사에서 그에 대한 지지율이 급격히 상승한 것은 물론이었다. 클린턴의 이 연설은 양당간의 당파적 대립을 뛰어넘어 자신이 대통령으로서 국민들 가슴속 고통을 얼마나 절절하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클린턴은 또한 퇴임 직전인 2001년 1월 뉴햄프셔를 방문했다. 1992년 예비경선 당시에 뉴햄프셔를 방문했을 때 실직을 당했고 그래서 의료보험이 박탈되어 거의 자녀까지 잃을 위기에 있었던 ‘론 마코스’란 여인이 이제는 어엿한 중소기업의 사장이 됐다. 마코스가 클린턴을 환영하는 모임에서 사회를 보며 장내에 클린턴을 소개하자 클린턴은 눈물을 글썽이며 감격해했다. 클린턴은 임기 시작 당시 실업을 당해 고통에 처해있던 이들을 회고하는 청중들의 심금을 울리는 연설을 해서 장내를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당시 이 연설이 국민들의 가슴에 얼마나 감동을 주었던지 TV로 이를 지켜본 국민들은 눈이 부어오를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한다.

섹스 스캔들의 방어에 급급하여 집권 후반기를 거의 다 허비해야 했던 클린턴은 그러한 와중에서도 대중과의 공감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클린턴은 자신이 정치스승으로 추앙하던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의 영결식장에서 쳐다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눈물을 펑펑 흘려서 이야깃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눈물이 많은 대통령'으로, 국민과의 거리가 가장 좁혀있던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지금도 누가 물어오면 "뚜렷한 해결책이 없으면 뛰어들어 고통을 나누라" 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놀라울 정도로 잘 감지하고 이를 그 자리에서 즉각적인 대화에 반영하는 감성적 대화의 달인이라고 한다. 클린턴의 평생 동안 정적인 공화당의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조차 “그를 만나고 나면 정치적 견해와는 무관하게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1994년 4월27일 미 캘리포니아주 요르반 린다에서 열린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한 전현직 대통령 부부. 이들 가운데 클린턴이 가장 국민과 거리를 좁혔던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다. 왼쪽부터 빌 & 힐러리 클린턴 당시 대통령, 조지 & 바버라 부시, 로널드 & 낸시 레이건, 지미 & 로절린 카터, 제럴드 & 베티 포드 전 대통령 ⓒ 미 백악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대중과의 공감 능력이 가장 뛰어난 대통령으로 평가된다. 백악관에서 흑인어린이와 함께 책을 읽으며 공부를 가르쳐주는 클린턴 전 대통령 ⓒ 미 백악관


지난 1월4일 필자는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110회기 의회 개원식에 참가했었다. 뉴욕서 참가한 3백여명의 참가자들을 부인인 힐러리 클린턴 의원이 모았다. 지나가는 눈썰미로 필자의 이름표를 읽은 클린턴은 “ 미스터 김(Mr. Kim)! 추운데 DC에 왜 왔습니까? ” 설마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지...했는데 오히려 내 어깨를 툭 치면서 웃고 있었다. 그가 필자를 알 리가 만무한데...유심히 살펴보니 그 많은 사람들 모두에게 한마디씩 건네면서 사인공세를 모두 소화하고 있었다.

1980년 공화당 전당대회는 ‘강한 미국’ 이란 슬로건으로 출렁였다. 이란 인질사태, 석유파동, 유가상승, 고인플레이션 등등 카터의 4년이 미국의 위상을 추락시켰다는 분위기가 팽배된 상황이었다. 당시 대통령 후보 지명 수락 연설을 위해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전당대회장에 나타났다.

환호하는 당원들을 진정시킨 다음 레이건은 저음의 단호한 음성으로 “우리는 추락한 미국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성전을 위해서 잠시 결연한 묵념의 시간을 가집시다”라고 즉홍적인 제안을 해서 주변을 놀라게 했다. TV를 통해서 이를 지켜보던 전국민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함께 묵념을 했다. 1분 동안의 이 묵념이 전체 국민에게 레이건 공화당후보를 실제 성전에 나서는 '때묻지 않은 지도자'로 깊이 각인시키는 효과를 보았다. 국민의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을 십분 발휘한 것이다.

2008년 대통령 선거는 조지 W. 부시가 치룬 지난 두 번의 선거전에 비해서 훨씬 다양한 현안들로 치루어질 전망이다. 미국의 안전, 테러와의 전쟁, 이라크 전쟁 같은 강한 지도력을 요구하는 선거전에서 사회가치, 경제안정에 적합한 전문적이면서도 국민과의 친밀한 공감 능력을 가진 지도력을 요구하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 미국은 1990년대 접어들면서 잠시 선보였던 ‘보통사람들의 친구’ 같은 이미지 만들기가 한창이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의 후과를 줄이기 위해서 백악관에 리무진을 거부하고 걸어서 들어갔던 것이나, 1987년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하고서 ’광주‘를 숨기기 위해서 직접 서류가방을 들고 원탁서 회의를 주재한 것이나, 클린턴이 재임 중임에도 힐러리를 대신해서 부엌에서 도시락을 싸고 있는 장면을 거리낌 없이 연출해 내 보낸 것 등 모두가 시대가 새로운 지도자상을 원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008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미국 양당의 각 후보군에선 사회적 가치변화를 안정되고 편안하게 통제할 수 있는 지도자상이 무엇인가에 골몰하고 있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있는 한국의 대권주자들도 참조해야 할 중요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필자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 김홍국 기자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겸 본지 편집위원은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한인들의 정치 참여를 통한 권리 찾기와 한인들의 정치적 위상 높이기를 목표로 93년 뉴욕 등 미 동부 대도시에 ‘한인유권자센터’를 만들어 14년째 활동해온 대표적인 정치 비정부기구(NGO) 운동가다.

한인들의 정치력을 높여온 김 소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93년 당시 7%에 불과하던 한인들의 평균 투표율은 2004년 25%로 뛰어올랐고, 미국의 상원과 하원의원들이 한국어 정치광고를 할 정도로 한국의 위상을 높임에 따라 워싱턴 정가에서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한국인 출신 시민운동가로 꼽히고 있다. 근자에는 미하원의 '종군위안부 결의안' 체결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댓글이 1 개 있습니다.

  • 9 8
    주이시

    양키들이 단세포가 된 까닭이다
    맨날 바보상자만 보다보니 저런 쇼에 넘어가지.
    넷에서 클린턴 바디카운트를 검색해보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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