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의회 쿠데타로 알려진 40년만의 공화당 하원장악의 중심 인물인 뉴트 깅그리치 의장이 불과 3년만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그런데 뒤를 이어 의장으로 지목된 밥 리빙스턴이 갑작스레 터져 나온 스캔들로 의장 선출 며칠 만에 자리를 물러나야만 했다.
워싱턴의 각종 이익집단의 로비스트들은 크게 당황했다. 미국권력 서열3위 하원의장에 누가 올라갈 것 인가?가 도저히 예측불능이었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하원의 지도부 구성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결국 공화당이 일리노이 출신의 데니스 해스터트 의원을 하원의장 카드로 내놓았다. 많은 로비단체들은 그가 누구인지 또 누구와 가깝고 어떤 성향인지에 대해 알아 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데니스 해스터트 의장후보 지명에 오히려 안도하고 회심의 웃음을 짓는 로비단체가 있었다. 유태인 로비단체 에이팩(AIPAC)이다. 일리노이 에이팩지부는 10여년 이상 데니스 해스터 의원을 도와왔고 10회 이상 이스라엘 방문을 주선해서 완벽한 친이스라엘 정치인으로 만들었으며 매 선거 때마다 그의 지역구내 유태인들을 조직해서 선거를 도와왔다. 데니스 해스터트 의원이 1999년 에이팩 50주년 행사에 참석해서 이스라엘을 위한 미국의 외교정책을 강조한 것이 그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후 10여년 동안 이스라엘은 미국의회에 대해서만은 순풍의 돛을 단 배와 같았다 .
작년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워싱턴 의회를 장악했다. 부시 공화당 정부의 잘못된 전쟁에 대한 국민들의 심판이었다.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라크전쟁을 강력하게 지원한 에이팩이 당황했다. 하원의장으로 이라크전쟁을 가장 앞장서서 반대하고 비판해 온 낸시 펠로시가 하원의장으로 취임할 것이 기정사실로 되었기 때문이다. 선거직후 에이팩은 적어도 외교위원장만은 친이스라엘 의원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고 전국조직을 가동시켰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내정자는 미리부터 하원외교위원장에 본인과 코드가 가장 잘 맞는. 이라크 전쟁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해 온 펜실베니아의 존 머서 의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를 미리부터 알아 챈 에이팩은 아예 본부를 낸시 펠로시의 지역구인 샌프란시스코로 옮겼으며 펜실베니아 에이팩지부는 존 머서 의원 사무실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치밀하고 끈질긴 로비가 펼쳐졌다.
결국 1월4일 의회 1백10회기 개원식 직전에 낸시 펠로시는 하원외교위원장에 탐 랜토스 의원을 내정하겠다고 에이팩에 알려왔다. 탐 랜토스 의원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난 유태인 14선의원이며 에이팩의 '이너서클'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이스라엘에 애국하는 의원이다. 이것이 미국내 가장 강력한 친이스라엘 로비단체인 에이팩의 위력이다.
<포춘> <월스트리트저널> <이코노믹> 등 미국내의 유력한 저널들이 매년 선정하는 미국의 가장 막강한 로비단체 순위에서 5위권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친이스라엘 로비단체 에이팩의 58주년 컨퍼런스가 지난 3월11일부터 4일간 워싱턴 D.C의 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그동안 에이팩은 ‘이스라엘의 이익이 미국의 국익’이라는 논리로 미국이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중동의 이슬람국가들과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의외로 올해 에이팩의 슬로건엔 '안정,평화'와 같은 단어들이 많았고,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지난 11일부터 워싱턴에서 열린 친이스라엘 로비단체 에이팩의 58주년 컨퍼런스 모습 ⓒ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일요일 기조연설은 에이팩 회장의 인사말로 대처했고 식사중의 패널토의엔 이스라엘 국방부차관과 제임스 울시 전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 유태계 전직 모로코대사와 DC의 근동정책연구소 소장이 출연했다. 작년에는 국제외교가의 문제아인 존 볼턴 당시 유엔대사가 기조연사였고 패널토론자론 네오콘의 핵심인 리차드 펄과 윌리엄 크리스톨이 나와서 '불바다'발언을 반복하던 분위기와는 많이 달랐다.
5천여명 이상이 한자리에 모여서 아까운 기색없이 경쟁적으로 기부금 수표를 써서 기부하는 모습이나 연방 상.하원 의원들이 일반참가자들과 똑 같이 테이블에 앉아서 자기지역구 에이팩과 만나는 모습에는 변함이 없었다. 순서가 끝났어도 오히려 초청된 거물급 정치인들이 에이팩 사무총장인 하워드 코어를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도 이전과 같은 모습이다.
회의장에서는 “하마스, 헤즈볼라, 이란...”을 언급하면서 “미국의 유태인들이 깨어있지 않으면 또 다른 홀로코스트가 온다”를 반복해서 영상 메시지로 전하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은 7시에 전원 입장이었다. 에이팩의 요구대로 미국의 중동정책을 만들고 집행해 온, 그래서 지난 만 5년 이상 유태인들이 가장 믿고 사랑했던 '딕 체니' 부통령이 오기 때문이었다. 오하이오에서 참가한 한 에이팩 회원은 필자에게 "유태계 미국인들은 만일에 그가 도둑질을 했더라도 우린 잘했다고 했을 것"이라고 그를 설명했다.
에이팩은 이스라엘을 위하는 외국인 로비단체가 아니다. 에이팩이 미국정치권에서 이렇게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미국에서 세금을 납부하는 시민단체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납세자 입장에서 정치권을 향해 요구하는 것이다. 에이팩은 미국내 유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서 재원을 확보하고 있다. 자유롭게 마음대로 로비활동을 하기위해서 국세청의 세금공제 혜택도 받지 않는다. 알 만한 사람은 금방 이해가 가지만 워싱턴서 외국정부의 1달러와 세금을 낸 미국시민의 1달러는 같은 달러이지만 그 영향력에 있어서는 1백배의 차이가 난다.
미국에 있는 뉴욕.뉴저지유권자센타가 에이팩을 모델로 10년을 활동해 왔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도 받고 있다. 2006년 4월 처음으로 워싱턴진출 사업이 ‘일본군위안부결의안’의 연방의회 통과이다. 유권자센타 역할은 현역의원이 이 결의안에 동의하도록 하는 일이다.
필자가 에이팩에 참가해서 첫날 패널로 참가한 외교위원회 소속인 뉴욕 브롱스 출신의 엘리옷 엥겔의원을 만나서 요청을 했다. 엥겔 의원은 필자가 에이팩에 참가한 것을 알고 깜짝 놀라며 반겼다. 5천여명 이상의 참가자 중에서 거의 유일한 비유태계이기 때문인 것 같다. 오늘과 내일 결의안 지지요청서를 들고 에이팩의 지도부를 따라 다니면서 의원들을 만나는 것이 다행스럽다고 생각이 들고 신나기도 하지만 웬지 ‘자랑스런 한국인’의 자존심으로 씁쓸한 기분이다.
필자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 김홍국 기자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겸 본지 편집위원은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한인들의 정치 참여를 통한 권리 찾기와 한인들의 정치적 위상 높이기를 목표로 93년 뉴욕 등 미 동부 대도시에 ‘한인유권자센터’를 만들어 15년째 활동해온 대표적인 정치 비정부기구(NGO) 운동가다.
한인들의 정치력을 높여온 김 소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93년 당시 7%에 불과하던 한인들의 평균 투표율은 2004년 25%로 뛰어올랐고, 미국의 상원과 하원의원들이 한국어 정치광고를 할 정도로 한국의 위상을 높임에 따라 워싱턴 정가에서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한국인 출신 시민운동가로 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