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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의 최대 난관은 '네거티브 캠페인'

[김동석의 뉴욕통신] 경쟁자들 벌써 '좌파 정치인' 포지셔닝 공세

2004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존 케리 상원의원은 ‘이슈 파이팅’의 귀재였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정치 현안에 대한 분명하고 명확한 자신의 입장을 갖고서 지명도를 높여왔다. 베트남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반전의 기치를 들고서 정치권에 폭풍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1984년 매사추세츠주의 민주당의 우파정치인으로 잘 알려진 폴 송가스 상원의원이 지병으로 불출마를 선언하자 존 케리는 당시 부주지사 직위를 미련없이 던져버리고 상원의원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문제는 공화당 예비경선에서 이변을 연출하면서 후보를 쟁취한 억만장자 '레이먼드 샤미' 였다. 더구나 당시엔 레이건 우파의 돌풍이 전국으로 몰아치고 있을 때여서 동북부 진보성향의 유권자들에게도 '레이거노믹스'가 크게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다. 케리 진영은 공화당 후보인 '레이먼드 샤미'의 전력에 주목하여 그가 미치광이 수준의 극우파 조직인 '존 버치 소사이어티(John Birch Society)'의 회원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알아냈고 그것을 캠페인에 활용하였다.

'존 버치 소사이어티'는 1958년 12월 인디애나에서 창설됐다. 존 버치라는 선교사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미국의 첩자로 발각되어서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살해 되었는데, 그가 냉전이 시작된 이후 공산주의자 손에 살해된 최초의 미국인이라는 의미에서 그의 이름을 딴 극우조직을 설립한 것이다. '존 버치 소사이어티'는 ‘공산주의 척결’이라는 명목으로 무고한 많은 사람들을 마녀사냥식으로 때려 잡았던 조셉 매카시(Joseph McCarthy) 상원의원을 영웅으로 추종하며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자처하였다.

당시 이들은 모든 사회현상을 '음모론'에 입각해서 보았다. 이들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부쳤으며 유엔이 공산주의 손에 넘어갔다고 미국의 유엔탈퇴를 주장하기도 했다. 흑인민권운동도 공산주의 음모라고 몰아부쳐서 이를 지지하는 학자나 정치인 종교, 언론인을 공산주의로 매도하였다. 일반 국민들의 눈엔 비정상 조직으로 인식된 단체였다. 1983년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서 격추 되었을 때 그 비행기에는 미국의 연방하원 의원인 '래리 맥도널드' 의원이 탑승, 사망했었다. 당시 미국의 우파 언론들은 맥도널드 의원이 '존 버치 소사이어티'의 회장을 역임했기 때문에 소련이 이를 노려서 그가 탄 여객기를 격추시켰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었다.

존 케리의 경쟁자인 공화당의 레이먼드 샤미는 한때 장난삼아 '존 버치 소사이어티'에 관심을 갖었을 뿐 열성회원은 아니었다. 그러나 케리 진영은 '샤미=존 버치 소사이어티'라는 등식을 24시간 끊임없이 강조했다. 그래서 유권자들에게 샤미는 정신적으로 비정상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인식이 되었다. 1984년 11월6일 상원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동시에 실시되었다. 레이건은 민주당 후보인 먼데일을 가볍게 물리쳤다. 매샤츄세츠를 포함해서 무려 49개 주에서 승리하는 그야말로 압승이었다. 그러나 케리는 레이건 돌풍 속에서도 25만표 이상의 차이로 승리를 거두었다. 자신은 언급하지 않고 상대후보를 특별하게 포지셔닝해 함정에 빠트리는 전략이었다.

상대후보를 포지셔닝하는 전략은 2000년 공화당 예비선거전에도 있었다. 당시 부시의 공화당후보 선출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포지셔닝한 맥케인의 예기치 않은 선전은 부시 캠프를 당황시켰다. 부시 진영의 칼 로브는 맥케인을 겨냥하여 슬로건을 '결과를 동반하는 개혁(Reform with Result)'을 들고 나왔다. 공화당에서 아웃사이더로 지지를 받는 맥케인을 오랫동안 워싱턴에서 비평과 비판만을 반복한 워싱턴 의회의 골수 인사이더로 포지셔닝하였다. 부시는 맥케인을 가볍게 누루고 후보가 되었다.

2001년 상원의원에 선출된 뒤 미 의회에서 남편인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맨왼쪽), 딸 첼시(왼쪽에서 두번째)와 함께 당시 상원 의장인 엘 고어 부통령(오른쪽)에게 취임선서를 하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 ⓒ 미 의회


2008년 대통령선거의 가장 유력한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의 공식적인 출마선언이 임박했다. 힐러리를 두려워하는 양당의 여타후보들은 벌써부터 경쟁적으로 그녀를 '중산층을 불안케 하는 좌파 여성정치인'으로 규정하여 포지셔닝하기 시작했다. 출마를 선언하기도 전에 벌써부터 그녀에 관한 이러한 이력이 온갖 미디어로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다.

1월10일자 <뉴욕타임즈>엔 그녀의 선거캠프 본부가 지역구인 뉴욕의 화이트 플레인이나 뉴욕시가 아니고 워싱턴 한복판으로 결정날 공산이 크다고 보도했다. 그녀의 캠프가 워싱턴에 설치된다는 것은 그녀의 전략이 예비경선과 본선거전의 이미지 만들기를 별도로 하지 않고 아예 당내 경선부터 공화당의 거점인 중남부 바이블벨트를 겨냥 해 나가겠다는 전략으로 해석되고 있다.

지난 1월4일 110회기 의회 개원식에 힐러리의 손님으로 초청받은 캠페인 전략가들은 이구동성으로 힐러리의 가장 큰 난관으로 이같은 고정된 이미지를 지적하였다. 누가 힐러리 진영에서 전략가로 일할 것인지를 탐색하기 위해서 필자는 이 자리에서 부지런히 명함을 거두어 왔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 자리에는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나타난 남편이자 전 대통령인 빌 클린턴이 그녀의 고정된 이미지를 중화시키는 역할을 맡기에 제 격일 것 같다.

필자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 김홍국 기자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겸 본지 편집위원은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한인들의 정치 참여를 통한 권리 찾기와 한인들의 정치적 위상 높이기를 목표로 93년 뉴욕 등 미 동부 대도시에 ‘한인유권자센터’를 만들어 14년째 활동해온 대표적인 정치 비정부기구(NGO) 운동가다.

한인들의 정치력을 높여온 김 소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93년 당시 7%에 불과하던 한인들의 평균 투표율은 2004년 25%로 뛰어올랐고, 미국의 상원과 하원의원들이 한국어 정치광고를 할 정도로 한국의 위상을 높임에 따라 워싱턴 정가에서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한국인 출신 시민운동가로 꼽히고 있다.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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