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독심 품고 '살생부' 짜야 산다"
<뷰스칼럼> 은행의 '건설사 살생부' 작성, 그리고 외압
'살생부' 작성에 착수한 은행
주대상은 100대 건설사다. A(우량), B(채권단구조조정), C(법정관리), D(파산) 등 4개로 분류할 예정이다. 최소한 20개 이상 건설사가 C, D 즉 퇴출대상에 속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부채비율이 1000%를 넘는 회생불능 기업이나, '바지계약' 사기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건설사들이 포함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 그 숫자는 크게 늘어날 것이나, 줄이고 줄여도 20개 정도는 된다는 게 금융계 전언이다.
반면 은행과 정부는 "A, B 등급은 살린다"는 계획이다. 대출-채권만기를 1년 연장해주고 필요하면 신규자금 대출도 해줄 예정이다. 채권단모임인 '대주단'에 들어갈 수 있는 건설사들이 살아남을 건설사들이다.
건설사 살생부 작성은 살생부 작성 1라운드에 불과하다. 이어 지방 군소조선소, 유화, 철강 등이 줄줄이 대기중이다. 큰 고통이 불가피한 수술들이다.
김태동 성균관대교수는 "피를 안 묻히고 수술할 방법이 있나"라고 반문했다. 냉엄한 현실이다. 이한구 국회예결위원장 같은 경우 "은행과 정부가 독하게 마음먹고 산불 방어선을 쳐야 한다"고 말했다. 온산으로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솎아낼 것은 과감히 솎아내야 한다는 의미다.
안팎의 압력에 직면한 은행
그러나 메스를 쥔 은행 입장에서 보면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일일 게다. 기업을 퇴출시키면 은행 부실도 급증할 것이다. '묻지마 대출'을 해준 데 대한 경영책임을 묻는 비난도 드높아질 거다. 옷을 벗어야 할 경영진도 나올 것이다. 또한 직원들을 줄이는 등 혹독한 은행 구조조정도 해야 한다. 은행 입장에서 보면 가능한 한 피하고 싶은 일일 게다.
퇴출을 막기 위한 외부압력도 대단할 것이다. 지역구를 갖고 있는 정치인이나 지방자치단체장들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지역 건설사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더욱이 지금 대다수 지방경제의 최대 생명선이 건설이다. 이들이 자기 지역구 건설사의 퇴출을 수수방관할 리 만무하다. 이미 금융계에는 실력자 모씨가 그동안 자신의 스폰서 역할을 해온 모 지방건설사를 살려달라고 은행에 부탁했다는 등, 벌써부터 좋지 못한 풍문이 나돌고 있다.
더욱이 내년은 본격적으로 지방선거운동이 시작되는 해다. 내후년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벌써부터 수도권규제완화를 놓고 한나라당 소속 지방자치단체장들까지 이명박 중앙정부와 날카로운 각을 세울 정도다. 이런 마당에 지역경제에 치명타를 가할 건설사 퇴출을 이들이 가만히 지켜볼 리 만무하다.
2010년 지방선거를 현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로 여기고 있는 정부여당도 마찬가지일 게다. 이미 정부는 지방살리기의 포커스를 지방부동산 경제살리기에 맞추고 있다.
"시늉만 했다간 은행도 국가도 죽는다"
이렇듯, 은행은 메스를 손에 쥐긴 했으나 쉽게 칼질을 하기 난감한 처지에 몰려있다. 벌써부터 국내외 일각에서 "피래미 몇만 잡는 시늉만 하고 끝나는 게 아니냐"는 냉소적 전망이 나돌고 있다.
그러나 시늉만 했다가는 은행이 죽는다. 국가신인도도 붕괴될 것이다. 부실기업들을 살리기 위해 돈을 퍼줄 경우 부실을 더 키우면서 은행도 동반 부실화되고, 가뜩이나 한국 은행들을 불안하게 보는 외국투자자들의 시선을 더욱 싸늘해질 게 불 보듯 훤하기 때문이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직후, 당시 청와대는 민간신용평가기관 H사에 극비용역을 줬다. 5대그룹에 대한 평가작업이었다. 알려지면 난리가 날 일이었다. 그룹의 로비력이 얼마나 막강한가. 아무도 모르게 했다. 그 결과 대우와 현대가 살생부에 올랐고 결국 쓰러졌다. 대마불사 신화가 깨진 것이다.
은행도 사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다.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여의도 큰손들을 만나보니 '큰 건설사들도 몇개 쓰러지고 저축은행도 몇개 쓰러지고 강만수도 물러나면 그 때쯤 증시에 들어가볼까 한다'고 하더라"며 "시장의 요구는 분명하더라. 경제위기를 '경제논리'로 풀라는 거였다"고 시장 분위기를 전했다.
방향이 정해지면 독심(毒心)을 품고 밀고나가야 한다. 무엇보다 은행 경영자들이 자신의 자리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최고권력 부탁이라도 물리쳐야 한다. 이게 벼랑끝 위기에 몰린 은행도, 나라도 살리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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