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닉의 법칙, "좋은 자산이 나빠지고 있다"
<뷰스칼럼> "이제부터 주목해야 할 것은 금융 아닌 실물"
"진짜 불황은 지금부터다"
리먼 브러더스 파산 직전, 월가를 방문했던 모 대기업의 자금담당 임원이 한 말이다. 국내에서 누구보다 국제금융시장에 정통한 것으로 국내외에서 평가받는 그는 리먼 등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 월가 금융기관들의 연쇄 도산을 기정사실화했다. 지금까지 부실도 천문학적 액수에 달하는 판에, 실물경제가 나날이 나빠지면서 부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니 살아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민유성 산은행장, 그 똑똑한 사람이 왜 그렇게 겁없이 리먼 인수에 달려붙는지 모르겠네."
그는 당시 진행중이던 산업은행의 리먼 인수 협상에도 냉소를 보냈다. 당시 리먼의 잠재부실은 월가에서 600억~8백50억달러로 추정되고 있었다. 이뿐이 아니다. 리먼의 6천억달러 채무 가운데 상당부분이 추가 부실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 실물경제가 악화되면 리먼의 부실은 순식간에 1천억달러를 넘어설 판이었다.
문제는 이 잠재부실을 털어줄 주체가 없다는 것이며, 그러기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기에 리먼이란 매물이 산은에게까지 돌아온 것이다. 미국정부가 잠재부실을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해주지 않는 한, 리먼 인수는 인수주체에게 파산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IMF사태때도 우리나라는 '경제식민통치'를 받으면서 제일은행을 서방금융자본에게 강제매각했다. 당시 조건은 향후 3년간 발생한 추가부실을 한국정부가 떠맡는다는 '풋백옵션'이었고, 실제로 그후 우리정부는 수조원의 추가부실을 떠맡아야 했다.
그러나 어떤 일인지, 한국의 주류 보수신문과 경제지 등은 "지금이야말로 월가를 인수할 때"란 어이없는 바람몰이를 했고, 그들 말대로 "싼값"에 눈이 멀어 리먼을 인수했다간 말 그대로 한국 전체가 쪽박을 찰 뻔했다. 한국의 수준이 그대로 드러난 일대 사건이다.
100년 역사의 GM도 무너질 판
월가는 지난 3월 베어스턴스를 필두로, 15일 리먼브러더스와 메릴린치 등 미국 투자은행 3~5위 투자은행이 모두 소멸된 데 대해 공황적 충격을 받고 있다. 이제 미국의 투자은행 '빅5' 중 남은 것은 JP모건과 골드만삭스, 둘뿐이니 그럴만도 하다. '대마불사' 신화가 붕괴된 것이다.
이들은 특히 158년 역사의 리먼의 파산에 큰 충격을 보이고 있다. 1,2차 세계대전과 세계대공황때도 살아남은 리먼이 쓰러졌으니 "100년만의 일대 참사"란 표현도 지나친 과장은 아니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리먼 직원들은 "지난 3월 베어스턴스 위기때는 정부가 구제금융을 해주더니, 이번엔 안해줘 쓰러지게 됐다"며 미국정부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반발이다. 그러나 미국 속사정을 보면 리먼에 구제금융을 해줄 형편이 못된다.
미국경제를 볼 때 진짜 주목해야 할 것은 앞서도 지적했듯, '실물경제'다. 대표적 예가 미국 자동차 '빅3'다. '빅3'의 맏형인 GM은 올해도 창사 100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파산 직전이다. GM과 포드, 크라이슬러는 최근 미정부에 500억달러의 긴급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살인적 이자를 대폭 깍아주고 원리금 상황시기를 대폭 늦춰주는 동시에, 대출도 새로 해달라는 요구다. 그도 그럴 것이 GM은 현재 두자리 숫자 이자를 내고 있다. 내용적으로 이미 파산상태니, 금융시장에서 두자리 숫자 이자 없이는 대출을 도통 안해주기 때문이다. '고리대의 파산 위기'에 빨려든 것이다.
문제는 '빅3' 위기의 본질이다. '빅3' 위기는 경쟁력 상실의 결과다. GM은 미국시장 점유율 1위 자리를 일본의 도요다에게 빼앗겼다. 제품에 경쟁력이 없기 때문이다. 포드나 크라이슬러도 마찬가지다. 국내뿐 아니다. 해외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등에 집요한 자동차시장 개방을 가해 시장을 열어줘봤자, 반사이익을 얻는 것은 미국내 도요다 등 일본자동차업계뿐이다. '빅3'의 제품경쟁력에 결정적 하자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이 직면한 위기는 투기적 행태를 일삼아온 금융자본의 위기인 동시에, 고용 창출의 근원인 제조업의 경쟁력 상실 위기가 복합된 것이다. 그러기에 위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렇듯 복합 위기에 직면하다보니, 미정부는 리먼에 구제금융을 안해준 게 아니라 '못해준 것'이다. 지금 미정부에 손을 벌린 곳은 리먼뿐이 아니다. 세계최대 보험사인 AIG도 400억달러의 SOS를 보내고 있고, 워싱턴뮤추얼 등 뮤추얼업계와 헤지펀드 등등 거의 모든 금융계가 정부의 지원을 애타게 바라고 있다. 여기에다가 제조업체인 '빅3'를 비롯해 경쟁력을 상실한 제조업체들까지 대선을 앞두고 '표'를 무기로 구제금융을 압박하고 있으니, 미국 정부가 리먼 파산이란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좋은 자산이 나쁜 자산이 돼가고 있다"
며칠 전 일본 유력경제지 <니혼게이자이>는 월가 위기가 더 악화될 것으로 전망하며, 그 이유를 "좋은 자산이 나쁜 자산이 돼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량자산까지 나날이 불량자산이 돼가고 있으니, 월가 위기는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지난해 8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졌을 때만 해도, 월가는 '설마'했다. 은행을 이용 못하는 신용불량자들을 상대로 두자리 숫자 고리대 장사를 해오다가 대형사고가 터진 게 바로 서브프라임이다. 하지만 설마가 곧 사람을 잡았다. 투기적 서브프라임외에 신용우량자를 상대로 한 프라임 모기지 대출도 부동산거품 파열로 빠르게 불량자산화했다. 미국의 모기지 대출 규모는 무려 10조달러. 월가를 비롯한 서방의 초거대 금융기업들이 휘청대며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미정부는 미국자본주의 붕괴, 더 나아가 세계자본주의 붕괴를 막기 위해 페니매이와 프레디맥에 2천억달러의 구제금융을 해야 했다.
하지만 문제의 심각성은 '우량자산의 불량화'가 여기서 그치지 않을 공산이 크다는 데 있다. 미국에서 모기지 다음으로 대출이 많은 것이 신용카드와 학자금 대출, 자동차 할부금융이다. 경기침체가 본격화하면서 벌써 신용카드와 학자금 대출, 자동차 할부금융에 적신호가 켜졌다. 카드회사 등도 위기의 범주에 포함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2002년말, 한국에서 카드 거품파열이 심각한 경제문제가 됐을 때 일이다. 한 카드사 임원은 "고객 1명이 부실화되니 순식간에 300명의 고객을 통해 벌어들인 수입이 허공으로 날라가더라"며 혀를 내두른 적이 있다. 마찬가지 현상이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며, 지구촌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 위험에 직면한 것이다.
한국은 11년전 IMF사태라는 국가부도 사태를 경험했었다. 당시 막대한 국부유출이란 천문학적 수업료를 내고 뼈저린 경험을 했었다. 중국은 요즘도 한국 금융전문가들을 초청해 당시 상황에 대한 학습을 하고 있다. 한국의 경험을 최대한 값싸게 빨아들이기 위해서다. 문제는 최근 산은의 리먼 인수 시도나 최근의 외환정책에서 볼 수 있듯, 우리 스스로가 당시 경험을 까마귀 고기 먹은듯 까먹고 동일한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데 있다.
수영선수 박태환은 최근 "한번 실수는 실수나, 두번 실수는 실패"라는 나이답지 않은 진리를 말했다. 월가의 위기는 예고된 위기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불가항력이다. 하지만 우리는 'IMF 경험'이란 자산을 갖고 있다. 모든 경제주체에게 부화뇌동하지 말고, 차갑고 차분하게 고통의 터널을 통과할 수 있는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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