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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인의 꿈' 접은 황인구의 26년

<뷰스 칼럼> 26년만의 명예회복. 권력과 폭력의 차이

유신말기 1979년 후반의 일이다. 18년 박정희 정권 철권통치에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지방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고 서울도 그랬다. 광화문에서 시위가 있었다. 요즘처럼 거창하게 대규모로 오래 하는 시위가 아니었다. 잠시 반짝 기습시위가 전부였다. 그래도 상징적 의미는 컸다.

기습시위를 하다가 재수없는 몇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그 중 한명이 당시 서울대 법대 2학년생이던 황인구였다. 단순가담자로 분류돼 간단히 조서를 쓰고 풀려났다.

그로부터 2년뒤인 1981년 황인구는 사시에 합격했다. 1, 2차를 모두 통과했다. 당연히 합격한 줄 알았다. 3차는 형식적 면접절차였기 때문이다. 부모님을 비롯해 친지, 친구들이 모두 축하를 했다. 그런데 3차에서 떨어졌다. 이유는 본인도 까맣게 잊고 있던 '1979년 경찰 조서' 때문이었다.

양손에 피를 묻히고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은 겁이 많았다. 대학에서 데모를 할 것 같은 학생들은 모조리 군대로 끌고가 '녹화사업'을 시켰고, 데모를 하다가 감옥 갔다 나온 학생들에겐 담당형사를 붙이고 예비군 훈련에도 못나가게 했다. 선량한 시민들에게 물을 들인다는 이유에서였다.

마찬가지로 논리로 전두환 정권은 사시합격자들에게도 시위전력이 있거나 시위로 처벌을 받은 사람은 사시 3차에서 무조건 탈락시키라고 지시했다. 황인구가 여기에 딱 걸린 것이다. 본인도 잊고 있던 한장의 조서때문에. 전두환 정권은 이 정책은 1981~1982년 2년간 강행했다. 이렇게 해서 3차서 떨어진 사람이 모두 10명.

10명중 4명은 전두환 규제가 풀린 1984년이후 사시에 재응시해 합격해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황인구 등 6명은 다른 길을 걸었다. 황인구는 법조인의 꿈을 접고 유공(현 SK 전신)에 입사해 직장인이 됐다. 다른 5명도 학계, 금융계, 언론계, 정계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조일래 한국은행 법규실장, 신상한 산업은행 기업금융 4실 총괄팀장, 한인섭 서울대 법대교수, 박연재 KBS목포방송국장, 정진섭 한나라당 의원 등이 그들이다.

그로부터 26년이 흘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18일 이들 6명에 대해 "불합격 처분을 취소하고 사법연수원 입소 기회를 주라"고 법무부에 권고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대한 당연한 귀결이었다.

황인구는 20일 우즈베키스탄에 있었다. 그의 현재 직책은 SK가스 석유개발팀장. 국가생존이 걸린 에너지전쟁 시대를 맞아 유전을 개발하기 위해 지난 2년간 우즈벡에서 동분서주하다가 최근 귀국했다가 다시 잠시 출장을 나가 있는 상태였다.

축하 전화에 "고맙다"고 했다. 명예를 되찾아준 진실화해위에도 감사하다고 했다. 축하전화 많이 받았냐고 했더니 "몇 통 받았다"고 했다. 지인들이 멀리 우즈벡까지 국제전화로 축하들을 해준 것.

흘러간 26년에 대한 감회, 그리고 회한도 깊은듯 했다. 당시 법조계에 들어갔으면 지금쯤 부장급 판사나 검사가 돼 있을 터였다. 그보다는 젊었을 때 꿈꾸었던 '법조인의 길'을 접은 데 대한 회한이 읽혔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물었더니 "생각 좀 해봐야겠다"고 했다. 자식들이 다 커 대학을 다니는 나이에 고민이 많을 것 같았다. 귀국하면 소주 한잔 하기로 했다.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전두환 시절, 그로 인해 인생 행로가 바뀐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연합뉴스

동아투위 출신의 한 중견언론인이 전두환 퇴임후 그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박정희 시대는 물론, 전두환 시대에도 많은 핍박을 받았던 언론인이었다. 전두환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핍박받은 얘기를 했다. 전두환이 깜짝 놀라는 듯 하며 "죄송하다. 그런 일이 있었는 줄 정말 몰랐다"고 했다. 이어 아들 재국을 불러 "애비가 잘못을 했으니 앞으로 네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열심히 도와드리라"고 했다. '물질적 도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들려 씁쓸했다고 그는 말했다. 자신이 남에게 준 피해를 돈으로 간단히 풀려하는 '권력의 속성'이 읽혔기 때문이다.

최악의 권력은 국민을 숫자로 인식하는 권력이다. 신문을 본 전두환은 황인구 등에 대해 이렇게 생각할 줄도 모른다. '까짓 6명쯤이야.' 숫자로 보면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한사람한사람에게 26년전 그가 행한 행위는 그들의 인생 전체를 밑둥채 뒤흔든 폭력이었다. 국민을 '숫자'가 아닌 하나하나의 '사람'으로 읽을 때만 권력은 폭력이 안되는 법이다.
박태견 대표 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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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이 1 개 있습니다.

  • 14 19
    돌려놔

    차라리 그때로 돌려놔
    그때는 물가가 싸서 돈이 가치가 있었다.
    굴비좋아하는 슨상개굴 세이들땀시
    물가는 천정, 공장들은 해외로 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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